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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현대사를 통하여, 우리의 미래를 읽는다.

글쓴이: (初步)_내가 나를 만나는 곳 | 201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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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은 세계사에서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어왔다. 그러나 현대의 시작은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러시아혁명을, 중국은 5.4운동을 현대사의 기점으로 삼고 있으며,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나라들은 독립이 곧 현대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8.15해방이 현대사의 시작이 된 것이다. 지금부터 약 70여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의 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행하게도 현대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에서 가까운 역사이다 보니, 보다 자세하고 정확히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런저런 이유로 더 잘 알지를 못하고 있다. 특히나 절대권력과 관계된 부분은 왜곡되고, 은폐되기 일쑤여서 지금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음은, 우리의 현대사가 그만큼 오욕의 세월을 거쳐온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의 현대사, 다시 말해 해방 이후 70여년간의 역사 중, 전반기에 해당하는 약 35년간의 역사를 두 권의 책에서 다루고 있다. 역사에 대한 전문 연구자가 아닌 저자는, 그가 쓴 책이 통사도 아니고 특정분야만을 다룬 부분역사서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 시기는 한국전쟁중 군대에 징집되었던 우리들 부모세대가 청춘을 보낸 시대였고, 우리들이 어린 시절과 감수성 예민한 청년시절을 보낸 시대였다. 또한 그 시기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대통령으로 살아간 시대이기도 했다.


 


먼저, 1권인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에서는 해방 후부터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59년까지 가혹하기만 했던 경찰국가 시절을 다루고 있다면, 2권인 이 책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에서는 1960년부터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쓰러지는 1979년까지, 병영국가 시절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나에게도 많은 기억이 있는 시대이기에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자라면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했다.


 


산골대통령이 활개치는 경찰국가도 민의를 거슬리지는 못했다. 1960 3.15부정선거와 그에 따른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어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의 장면내각은 신구파간의 자리다툼에만 이전투구 하면서 군부장악에 실패했고, 이는 4.19혁명에 대한 반혁명을 불러왔다.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정변은 이제 겨우 자생적으로 움트기 시작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군부가 민간정치를 지배하는 권위주의 체제로 바뀌는 서곡이 되었다. 사실 5.16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군사정변이었으나, 당시 대통령이던 윤보선과 총리이던 장면의 무능과 기회주의 속성, 그리고 미국의 방관과 동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승만에서부터 윤보선 그리고 장면에 이르기까지 제1,2공화국을 이끌었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권력과 자리다툼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국가란, 그리고 국민이란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5.16으로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는 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눈물겹게 노력한다. 한때 남로당 활동을 했던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혁신계열 인사들을 체포하고, 민족일보를 탄압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문득, 일본 육사에 들어가기 위해 벌였던 그의 행적이 겹쳐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일 인지도 모른다. 민정이양을 앞두고,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사전에 창당준비를 하고, 당원을 교육시키며, 막대한 정치자금을 끌어드리기 위해 4대 의혹사건이 불거진 것은 차라리 애교로 봐둔다 할지라도,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의 진행과정은 그의 머릿속에 짙게 베어있던 황국사관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현재도 계속되는 일본의 과거사 부정과 반복되는 망언을 가능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이 1962년부터 밀실에서 시작된 한일회담이기 때문이다.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계속되자 그는 마침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한다. 이른바 1964년에 일어난 6.3사건이다.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어떠한 사과도, 반성도 받아내지 못하고 그저 차관 몇 푼에 민족혼을 팔아 넘긴 것이다.


 


박정희 역시 이승만에 버금가는 권력의 화신 이었다. 1950년대의 정치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코미디였다면, 1960년대 혹은 70년대의 정치는 이승만이 박정희로 바뀌었을 뿐, 그다지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경찰국가에서 병영국가로 변한 것 정도이다. 동백림사건, 향토예비군 창설, 베트남 파병, 국민교육헌장선포, 삼선개헌, 김대중납치사건,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 교련반대, 긴급조치, 유신체제, 장준하를 비롯한 수많은 의문사, 전태일에서 YH 김경숙에 이르기까지의 노동자 탄압, 부마항쟁, 그리고 10.26에 이르기까지.. 이루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다. 오로지 박정희의 영구통치를 위해서 말이다.


 


이 시기에 일어났던 일들 중, 나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첫 사건은 국민교육헌장이다. 어느 날,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형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 가니 그것을 모두 외우라고 하였다. 매일매일, 수업이 끝나고도 그것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갈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우리들 모두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병영의 전사가 되었다. 그렇게 외운 국민교육헌장이 아직도 대부분 기억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시달린 것 같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10월 유신이 일어났다. 사회시간에 배웠던 헌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이 한 사람에게 귀속된, 우리만의 한국형 민주주의라고 열강을 하시던 사회선생님도 떠오른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우리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오직 박정희대통령이 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고 역설하던 선생님이 그 때는 멋져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월남의 패망으로,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사건으로, 곧 북한에게 적화되고 말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고, 공설운동장에 모여 하루 종일 북한을 규탄하는 것으로 그 불안감을 해소하던 것도 그 즈음의 일이 아닐까 싶다. 그땐 어린 내가 볼 때에도 박정희가 대통령이었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던 시기였다. 그렇게 세뇌되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그 시기에 생각나는 것은 장발과 미니스커트에 대한 단속이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은 골목골목으로 숨어 다녔고, 여자들은 백주 대낮에 경찰들이 내미는 줄자에 자신의 치마길이를 갖다 대고 있어야 했다. 뒤에 생각해보면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다. 그렇지만 대학입시에 찌 들렸던 그 시절, 하교 길에 보았던 장발과 미니스커트에 대한 단속을 제외하곤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는 것을 보니, 나 역시 체제에 길들여진 순한 양이었던 것 같다. 1979년은 재수를 하던 시기였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나는 광릉에 있는 한 사찰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비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어느 날, 뜬금없이 라디오는 대통령유고라는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골짜기마다 널려있는 삐라에는 공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산 속에서 10.26을 접하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체제에 길 들여졌고, 그들이 말하고 책에서 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래서였을까? 대학에 입학해서 듣는 내용들은, 소위 금서로 지정된 책 속에서 얻는 사실들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던 것 같다. 지나간 세월에, 그렇게 보낸 대학생활에 후회는 없지만, 그 시절의 역사들이 조금씩 왜곡되는 것에 대해서는 가슴이 아프다. 물론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다르고, 자신이 겪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도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대사를 제대로 알 때, 다시는 이 땅에 그러한 체제가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왜곡되고, 잊혀 저가는 현대사를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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