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2024 여성의 날] 죄를 빌고 용서를 짓네 벌하고 사라지는 이 있네 - 현호정 소설가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 현호정 소설가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당신은 저에게 벌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반드시 용서할 것입니다. 그게 제가 당신에게 주는 죄입니다. 복수는 쉽지 않을 겁니다.’ (2024.03.05)


채널예스 여성의 날 특집 기획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욕망을 숨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여성들은 선입견을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소설, 영화, 과학,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형성을 부수고 다채로운 욕망을 보여주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누군가에게 죄짓고 일정 기간에 걸쳐 죗값 치르는 식으로 살았다. 손바닥만 한 하루에 갇혀 어떻게든 그를 돕는 데 전념하다, 돌연 머릿속에서 스스로 석방 결정이 나면 주저 없이 나가 다음 죄지을 자리를 찾았다. 그리 짠 시절이 이어져 내 인생이 됐다.

벌 받는 나야 괴로우니 그게 그 계절의 전부 같지만, 정작 상대방은 기억조차 못들 할 테다. 어쩌면 그 당시에도 내가 자기에게 뭔가 잘못해서 이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왜 쟤는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나 의아했을 수 있다. 비웃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냥 내가 살기 위해 그랬을 뿐임을 이 지면을 빌어 밝힌다. 나는 삶을 이어갈 다른 방식이랄지 동력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역사적으로는 물론 개인사적으로도 오랜 풍화와 침식을 거쳐 이미

‘         아야          .’

정도로 남아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이 훼손에 으뜸으로 기여한 첫 직장으로부터 야반도주하는 내가 뒷문을 열기 전 허겁지겁 브래지어 속에 뭔가를 쑤셔 넣는다. 감춘 패물은 ‘Why 대신 How를 찾는 요령’이었다. 굳이 하나하나 의미나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말라는 것. 다만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 아무도 딱히 할 말 없는데 원탁에 둘러앉은 주간 회의, 그냥 안 만드는 게 사는 쪽에도 심지어 파는 쪽에도 게다가 당연히 지구에도 이득인 신제품의 개발이 이럴진댄 삶이라고 뭐가 다를까. 내가 이 회사에 왜 다녀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대신 할부로 차를 하나 사라는 가르침이 있었으니 나는 얼굴도 모르는 타 부서 소나타 오너에게 모티브를 얻어 내 삶을 이어갈 죄의 융자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었다. 사소한 행정 실수에서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는 사건, 전 지구적 재난과 역사적 비극에 이르기까지 나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안은 모두 차곡차곡 내 마음 속 죄의 명부에 기록되었다. ‘이 일을 어떻게든 해결할 때까지는 죽으면 안 돼.’삽시간에 나는 ‘살아야 하는 사람’에서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됐고 이 전환은 진정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모든 상처에서 내 혈흔을 발견하는 데에 얼마나 탁월하였나. 솜씨는 기적과 같아서 우리가 우주의 팽창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듯 나 또한 그 진행 양상을 더 이상 인지하지도 감각하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스스로 느끼기에 지상에서 가장 죄 많은 자가 됐다. 앞으로 벌 받을 날이 까마득해 도망치고 싶어졌다. 나는 내가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으나, 알고 보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였다. 그것도 아주 능동적으로. 쉽게 말해 나는 예전보다 더 자주, 더 오래, 더 깊이, 나의 죽음을 생각했다.

유서를 쓰다 보니 차차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나쁘게 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조금 억울해지기 시작한 나는 유서 작성 프로그램을 한글에서 엑셀로 바꾸었다. 지금까지 나한테 잘못한 사람들을 기억의 저편에서 다 끌어올려 연도 내림차순으로 정렬. 그러다 보니 쉽게 복수가 가능해 보이는 건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식으로 또 몇 년을 이어 살았다. 은혜든 원한이든 절대로 못 잊고 아무리 작아도 갚고야 만다는 사주를 타고난 탓인지. 머리가 좋은 편인 데다 기록 강박까지 있기 때문인지 이 죄와 벌의 목록은 또 하염없이 늘어났고 이제 나는 최소한 백 살까지 산 뒤에야 죽을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됐다.

친구는 묻곤 했다.

“호정아,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게 만수무강이랑 뭐가 달라?”


그러나 의지는 거친 때를 만나 삽시간에 꺾이기도 뽑히기도 하는 법이라, 지난 가을에는 또다시 사건을 겪은 뒤 친구에게 울면서 애걸복걸했다.

“친구들은 나를 사랑하니까 내가 모두 떠나 편히 쉬기를 바라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매 순간 고통을 느끼며 계속 살아있기를 원할까? 매분 매초 조금의 기쁨도 없이 괴로움으로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럼에도 계속 살아있어 주기를 바랄까?”

그러자 친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기를

“어, 계속 고통스러워 주기를. 제발.”

기가 막혀 나는 눈물이 그치고, 그러자 친구는 울기 시작하던 그날의 더없이 미천한 삶과 사랑의 회전문. 나는 이 순간 누가 누구에게 나쁜 사람인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한 사람이 반 바퀴 돌아 다시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는 설계. 그 안에 갇혀 죄수와 형리 역할을 바꿔 가며 빙빙 도는 게 놀이가 아니면 뭘까 하는 생각도 체념의 한숨처럼 배어 나왔다.

하지만 진실로 나는 내 삶이 누군가와 죄와 벌을 뒤집으며 노는 놀이에 그치지 않기를 원한다. 이 놀이는 웃음을 거의 유발하지 않으며 자칫하면 소중한 이를 매우 다치게 한다. 끝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벌써 지쳤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러나 어떤 이가 깊게 빠진 놀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완전히 질릴 만큼 반복하는 것뿐이지 않을까. 이에 나는 죄와 벌을, 복수와 용서를 뒤바꾼 문장을 다시 몇 차례 적는다.

‘당신은 저에게 벌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반드시 용서할 것입니다. 그게 제가 당신에게 주는 죄입니다. 복수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이때의 ‘당신’은 한 명일 수도 여럿일 수도 있지만 가상의 인물은 아니다. 언제나 내 손바닥 위에서 따뜻한 피부로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다 무슨 소용일까. 나는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내게, 내가 당신에게 더 이상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당신이 내게, 내가 당신에게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임을 이해하나요. 당신이 내게, 내가 당신에게 저지른 나쁜 짓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난 적 없었다는 의미임을 이해하나요. 그리하여 용서는 제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일이 되고 저는 이제 더없이 정결한 얼굴빛으로 아무도 없는 정면을 최초로 응시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제 더없이 정결한 얼굴빛으로 아무도 없는 정면을 최초로 응시하기 시작한다.

(혹은 더없이 비참한 얼굴빛으로 모두의 얼굴을 내내 응시하고 있다.)



*필자 | 현호정

『단명소녀 투쟁기』 『고고의 구멍』, 『삼색도』 등을 썼다. 2020년 박지리문학상, 2023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추천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현호정(소설가)

『단명소녀 투쟁기』 『고고의 구멍』, 『삼색도』 등을 썼다. 2020년 박지리문학상, 2023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오늘의 책

산업의 흐름으로 반도체 읽기!

『현명한 반도체 투자』 우황제 저자의 신간. 반도체 산업 전문가이며 실전 투자가인 저자의 풍부한 산업 지식을 담아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반도체를 각 산업들의 흐름 속에서 읽어낸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산업별 분석과 기업의 투자 포인트로 기회를 만들어 보자.

가장 알맞은 시절에 전하는 행복 안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작가 김신지의 에세이. 지금 이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들, ‘제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1년을 24절기에 맞추며 눈앞의 행복을 마주해보자. 그리고 행복의 순간을 하나씩 늘려보자. 제철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2024년 런던국제도서전 화제작

실존하는 편지 가게 ‘글월’을 배경으로 한 힐링 소설. 사기를 당한 언니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 편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모르는 이와 편지를 교환하는 펜팔 서비스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진실한 마음으로 쓴 편지가 주는 힘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

나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물질적 부나 명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나 자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심리학은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무기다. 요즘 대세 심리학자 신고은이 돈, 일, 관계, 사랑에서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을 위해 따뜻한 책 한 권을 펴냈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