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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영화적인 순간] 이제 나 혼자 가네요

영화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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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허울만 좋은 발전 속에 허물어가는 미국, 유럽 사회 내부에 대한 강력한 은유이기도 하다. (2022.06.08)


“당신과 함께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제 나 혼자 가네요.”

영화는 조금 거북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한 남성이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무언가를 빚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여성의 나체다. 그런데 이걸 인식하기도 전에 남성은 모래로 만든 여성 위에 올라타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행동을 한다. 주변에 있던 해군들, 그러니까 이 남자의 동료들조차 남자를 거북하게 바라보며 멀어지지만 남자는 전혀 멈출 기미가 없다. 군복을 입고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모래로 만든 나체의 여성 위에 있는 남성의 모습은 마치 전쟁 중 벌어진 강간 살인을 연상시킨다. 본래 전쟁 시 패전국의 여성들을 강간 살해하는 것은 여성들을 전리품 중의 하나로 생각하여 승전국으로서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공포를 강화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남자의 이름은 프레디. 실제 참전 군인이며, 신체적 훼손 없이 귀환했으나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정신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참전 용사임에도 전쟁 후 먹고살기 위해 이곳저곳에 취직하려 노력하지만 전쟁 중 얻게 된 정신의 질병은 그가 도무지 이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든다. 언제나 술병을 휴대하며 어느 순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건을 던져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하는 남자, 스스로도 고백하듯 그럼에도 전혀 동정하고 싶지도 않은 남자. 영화는 이 남자를 동정하거나 합리화하는 대신 그의 찢어진 마음 상태만을 보여준다. 영화의 초반, 해군 복장을 한 그가 귀환하던 배에서 홀로 갑판 맨 위에 위태롭게 누워있을 때 카메라는 그의 아래 활기에 찬 군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일 때조차 고립된 상태나 다름없는 그의 정신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실 프레디는 전쟁에 참전하면서 사랑하던 여자와 헤어졌다. ‘전쟁 신부’라는 걸 들어보았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간을 피하고자 딸을 가진 부모들이 군인들과 혼인을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남편을 전쟁으로 잃은 여성들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무작정 결혼을 하게 된 여성도 있었다. 프레디가 사랑했던 여성도 아마 그렇게, 둘은 서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헤어졌다. 

사랑과 군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 그러나 전쟁 중 살인은 살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 인간이길 포기한 전쟁이라는 행위는 전쟁에 휘말린 일반인들의 이후 삶은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순식간에 사람을 살인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된 프레디는 말할 수 없는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의 고통과 이런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사회에서의 다시 한번 고립감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이 고통을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신도 좀 변하지 않을까. 프레디의 이런 생각은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며 상처를 치료한다는 ‘프로세싱’ 연구자이자 ‘코즈’ 이끄는 랭케스터를 만났을 때 절박함으로 터져 나온다. 프레디는 그에게 온전히 사로잡힌다. 

자, 그런데 전쟁이 빚어낸 아이러니한 상황은 프레디라는 개인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전쟁이 끝난 1950년대의 미국과 유럽은 그야말로 아이러니의 집합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는 냉전으로 돌입하며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한 시대가 된다. 물론 그에 반해 예술과 개인의 가치에 기반한 세대가 등장하며 해방을 부르짖는 반문화의 시대가 도래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얼핏 과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 사고에 자유와 예술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프레디가 일하는 사진관에는 즐거운 사람들이 오고 코즈의 일원들도 저마다의 깊은 사유와 사상을 가진 지성인들처럼 보인다. 이런 그들의 모습에서 적군이라는, 적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강간 살인을 일상처럼 저질렀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모습은 오히려 코즈의 일원들조차 손가락질하는 프레디에게만 남아 있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국가의 명령은 거부조차 할 수 없는 일반인들에게만 말이다. 이들의 손가락질에서 알 수 있듯이 프레디 같은 동물적 인간은 정신을 치유하는 곳에서조차 쫓겨나야 할 ‘근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기도 하다. 마치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은 그것이 ‘평화와 자유를 위한’ 부르짖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국민들을 치켜세우지만 그들의 트라우마는 철저히 외면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런 ‘근대적, 이성적 엘리트’들의 실상은 어떨까? 이들은 자신들의 지적인 면모를 과시하면서도 ‘마스터’라는 하나의 인간을 절대시 하는 코즈의 일원이 되려고 집착한다. 사실 이런 모습은 종교와 자본이 동시에 작동했던 1950~60년대 미국 사회와 유사하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희망을 교묘하게 비튼 자본과 전쟁 후 상실을 감당할 수 없던 사람들이 기대야 했던 절대자의 종교. 이 대립적인 두 가지가 얼마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강력하게 작동했는지를 영화는 보여준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이 자신들은 이성적 사고를 한다고 믿으며 종교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점과 치료를 위해 온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급을 구분 짓고 프레디 같은 사람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코즈지만, 이런 곳에서도 유일하게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랭케스터를 위해 프레디는 랭케스터를 욕하는 사람을 보면 폭력을 휘두를 정도로 그에게 맹신하고 또 빠져든다. 그런데 이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랭케스터 또한 항상 자신의 이론을 믿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밑바닥이 보일까 불안한 그는 프레디가 자신을 통해 변화한다면 자신의 이론이 완벽해질 거라는 생각에 점점 프레디에 의존한다. 절대자의 의존, 물론 그 순간 그는 이제 절대자가 아니다. 이 영화가 빗는 인간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한번 더 빛을 낸다. 그가 프레디에게 의존하는 순간 프레디는 그에게 멀어진다. 그리고 오히려 프레디는 랭케스터에 대한 의존이 아닌 자기 자신, 혹은 자신과 연관된 당사자를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을 괴롭히던 것에서 벗어난다. 거기엔 마스터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찾아 나선 사랑하는 이의 소식이 있었다. 영화의 말미, 프레디가 랭케스터에게 등을 보이고 사랑했던 여인을 찾으러 가는 모습은 외롭지만 오롯이 홀로 설 수 있는 프레디의 모습이자 이 둘의 결별을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평은, 결국 인간은 타인을 통해 구원받을 수 없으며 인간은 항상 누군가를 갈구하지만 결국 홀로일 것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 또한 그 말에 공감한다. 다만 그러한 평에 나의 개인적인 관점을 얹어보자면,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허울만 좋은 발전 속에 허물어가는 미국, 유럽 사회 내부에 대한 강력한 은유이기도 하다.

많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1950년대 마오쩌둥에 집착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를 선언하고 혁명을 부추긴 문화대혁명을 이끈 마오를 신처럼 따르려 했던 서구 지식인의 모습은 마치 영화 속 랭케스터를 추앙하는 엘리트들과 유사했다. 마오가 부르짖던 문화대혁명이 사실상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낙인찍고 중국의 소수민족과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지식인들은 이를 맹목적으로 동경했다. 블랙 코미디 같은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난 걸까. 혹시 그들은 과학과 이성이라는 명목하에 정복자의 위치를 선점하고 무수한 식민지를 만들며 전쟁을 일삼았던 과거를 자신들과 다른 사상을 적극 따르고 지지한다는 제스처로 용서받고 싶었던 걸까. 그 식민지에서 다른 인종을 노예로 만들고 생체 실험을 서슴지 않았던, 자본으로 무화하려 했던 그런 실상에 대해 종교가 아닌 사상으로 회개하고 구원을 받고 싶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영화는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용서와 구원은 하나의 사상이나 절대자에게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회피로써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자신이 죄를 지었던 대상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마주 보았을 때 용서와 구원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문명이든 개인이든 말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 ‘마스터’는 존재할까. 존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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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정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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