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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칼럼]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열흘이 이야기

하재연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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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하소연을 하며 보낸 석 달이다. 그들이라고 별수 있을까. 나 역시 이렇다 할 기대와 대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2020.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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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위트 앤 시니컬은 중간고사를 치르거나 마친 대학생들로 가득했어야 했다. 나는 그들에게 불편한 것이 있으려나 살피며 내심은 흐뭇해 웃음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밤에는 그들을 내보내지 못해 서점 문을 닫지 못하기도 했으리라. 서점의 작은 냉장고에 자양강장제를 넣어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대개의 계획이 그렇듯, 생각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며, 다양한 변수에 당황하고 그르치느냐, 그럭저럭 잘 대처하느냐 그 모양에 따라 역량과 지속성을 가늠하고 또 평가받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럴 줄을 몰랐다. 상상과 짐작의 바깥은 이렇게 생겼구나 싶어 놀라고 탄식하고 이내 시름시름 앓고 있는 요즘이다. 팬데믹이라니. 이런 적이 또 있었다는데, 왜 내 기억에는 없는 것일까. 왜긴 왜겠어. 이번 생에 자영업은 이번이 처음이니 그럴 수밖에.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하소연을 하며 보낸 석 달이다. 그들이라고 별수 있을까. 나 역시 이렇다 할 기대와 대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라도 속풀이를 해야 밤이 되면 문을 닫고 아침이 되면 문을 여는 삶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시일이 늘어날수록, 이러다 듣는 사람조차 지치겠다 싶어 자책의 그물 속에서 더 뒤엉키곤 했다. 매일 쓰고 나누던 서점 일기를 멈추게 된 것도, SNS에 접속하지 않게 된 것도 그러한 위기감이 있어서다. ‘없던 병도 생긴다’는 말, 바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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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화분을, 정확히는 식물이 담긴 화분을 샀다. 다소 개연성이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밖에는 설명을 할 도리가 없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다. 인연이라는 게 그렇지. 우연의 탈을 뒤집어 쓴 필연이라든가, 필연이라는 우산을 쓴 우연이라든가. 사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그날 하필이면 친구의 차를 얻어 탔고 그 친구는 인근 화원에 가는 길이었으며 차 안에 가만 앉아 기다리느니 어디 꽃구경이나 해보자 하고 따라나선 이 모든 일에 각주 따윈 필요 없다.

 

화원 앞은 작고 아담한 크기의 모종들로 가득했다. 이것은 먹을 수 있구나. 저것은 먹을 수 없겠네쯤의 마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좋아졌던 것은 그 모종들이 지닌 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친김에 커다란 비닐하우스 안까지 들어가 보았다. 그때까지도 무언가를 가지고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처에 감염병의 기세가 험악한데도 비닐하우스 안 식물들은 마냥 푸른 잎들을 단 ‘생동’ 그 자체였다. 문득 작은 벵갈고무나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내 무릎께 닿을 정도의 키에 말끔하게 윤기가 도는 아이였다. 마치 계획이 있었다는 듯 친구에게 말했다. “이 아이로 해야겠어.” 

  

적갈색 토분에 흙이 담기는 동안, 친구가 셈을 치러주는 동안(‘사가독서’ 오픈 선물이랬다), 벵갈고무나무의 습성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 동안 나는 이 작고 말끔하고, 어딘지 모르게 단단한 녀석의 이름을 고민했다. 그것은 애착의 단계. 내가 이름 붙여준 그 많은 것들 속으로 발 없는 화분이 걸어들어와 제 크기보다 조금 더 큰 그늘을 만들어 기울였다. ‘이미 소중해.’ 어떤 소중함은 예감으로 만들어진다. ‘난 제제가 되기에 너무 나이 들어버렸지만, 너는 밍기뉴가 될 수 있겠구나.’

 

열흘에 한 번 물을 주어야 한다기에, 때를 기억하기 위해 ‘열흘이’라고 이름 붙이고 나서 한 번 물을 주었고 다음 때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 없던 애정으로, 화분을 내어놓았다가 들이고 다시 내어놓기를 반복하고 있다. 식물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은 하재연 시인에게 무시로 자문을 구하고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다. 분갈이는 몇 주에 한 번 해야 하나요, 따위의 질문을 했다가 혼난 적도 있다. 며칠 전에는 새순이 돋아나 혼자 비쭉 자라났다. 자다 깬 아이의 뻗친 머리 같아 볼 때마다 우습다. 물꽂이라는 것을 해볼까 하는데, 가위를 대는 것이 무서워서 여태 그냥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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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오롯한 집중과 애정이라니. 순전히 나의 만족을 위한 일이다.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 화분에 저 식물에 별다른 의미를 담지 않으려 하는 거겠지. 어찌 되었든 서점에는 무엇이 하나 ‘있는’ 것이 되니까. 기왕이면 책을 읽을 줄 알았으면 좋겠는데, 하다가 부모의 욕심이란 게 이런 것인가 하고 혼자 웃다 만다.

 

오늘도 화분을 내어놓는다. 조금만 있다가 들어오자, 더 무거워지면 너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걱정이다, 하고 말을 걸기도 하면서. 거듭 보태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바람도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화분은 화분. 서점은 서점. 그리고 나는 나. 가깝게 무엇이 있으면 무탈하게 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거기 있을 당신.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부디 잘 있으면 돼. 어떤 열 밤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까. 날이 흐린데 비는 내려 보내지 않으려는 하늘이다. 담뿍 비를 맞아도 좋을 텐데. 뿌리 걱정은 하지도 않고, 비는 식물에 좋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한다.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하재연 저 | 문학과지성사
음소거 된 화면 혹은 음향이 켜지지 않은 무대 같은 배경에서 그녀는 세상의 모든 면면을 조용히 그러모으면서 최소한의 감각으로 그것들을 마주한다. 소리 없는 걸음에 더 큰 힘이 들어가는 법. 그것이 곧 세상에 대한 시인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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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유희경(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2007년 신작희곡페스티벌에 「별을 가두다」가,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가 당선되며 극작가와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 있으며 현재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고 있다. 시 동인 ‘작란’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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