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인아영의 잘 읽겠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늦을 거야

<월간 채널예스> 2020년 5월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우루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남자는 대학 졸업 후 교사가 되어 우루와 우연히 마주친다. 남자는 우루만 좋다면 함께 생일 파티에 가자고 하지만, 우루는 모든 종류의 파티를 싫어하고 춤추는 사람도 아니며 파티 시간도 이미 늦었다. (2020. 05.08)

제목 없음.png

 


소설가가 다른 소설가의 소설에 대해 쓴 글은 왠지 더 재밌다. 대체로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고,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입장이 스며있으며, 무엇보다 소설가로서의 자신이 밀도 높은 성분으로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건 자신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는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움직여지는 현상은 어쩔 수가 없으니까. 배수아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 을 번역한 뒤 ‘옮긴이의 말’에서 쓴 글을 보고서도 그랬다. “아직 아무런 내용도 줄거리도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까지도 아무런 내용도 줄거리도 시작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릴 것만 같으므로, 이 책에 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줄 수 없어. 어쩌면 도중에 읽기를 그만두게 될지도 몰라.”(364쪽) 리스펙토르의 소설을 옮긴 번역가로서의 글이었지만, 내용과 줄거리가 시작되고 진행될 것도 없이 아름답게 흐르기만 하다가 끝날 것만 같은 소설이라면, 그 순간을 간직하듯 그만 읽기를 멈추고 싶어지는 소설이라면, 배수아의 소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까.

 

배수아의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의 시작에서 우루는 일행과 함께 무녀를 찾아 떠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기억하지는 못하고 단지 감각할 수 있을 뿐인 우루는 마치 어떤 근원을 찾으려 흘러가듯 헤매는 것 같다.   우루, 혹은 여자는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떠오르는 기억에 닿으려는 듯 연필 한 자루를 꺼내 노트에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 다만 무언가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서 아주 먼 곳으로부터 와야만 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그것을 쓰기 위해서 멀리 온 것 같아요.”(82쪽)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는 왜 멀리에서 와야 하는 것일까?

 

잠시 우루의 눈을 따라가 보자.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지는 못하는 우루는, 그러나 무언가를 본다. 하지만 관찰하거나 응시하지 않고 단지 옆으로 흐르듯 비치는 것을 본다. 거기에는 매번 모습을 바꾸는 최초의 여인도 있고, 어느 강가에 있던 꿈도 있고, 멜로디 없는 시 같은 노래도 있고, 무엇보다 사랑과 아름다움이 있다. 우루의 눈은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사랑과 아름다움에 닿는다. “우루는 보는 것처럼 사랑한다. 멀리서 보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점점 더 멀어지는 방식으로, 영원히 우회하는 방식으로, 오직 멀리서 반짝이는 그것을 향해 짧고 순간적인 일별만을 던지며 흘러가는 방식.”(138쪽) 우루가 멀리서 떠나와 미지의 목소리를 받듯 글을 쓰는 이유는 자신으로부터 앞서서 시작된 최초의 근원적인 기억에 닿기 위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이미 시작된, 애초에 진행되고 있었던 사랑과 아름다움을 눈에 담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멀리서 보아야 할 테니까. 그래서 우루는 오직 멀리에서 와서 멀리에 있는 것이다.

 

우루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남자는 대학 졸업 후 교사가 되어 우루와 우연히 마주친다. 남자는 우루만 좋다면 함께 생일 파티에 가자고 하지만, 우루는 모든 종류의 파티를 싫어하고 춤추는 사람도 아니며 파티 시간도 이미 늦었다. 우루는 말한다. “우리는 어차피 늦을 거야.”(154쪽) 멀리 있는 우루는 늦을 것이다. 기억과 사랑과 아름다움은 근원적이고 아득하고 깊은 곳에서 이미 시작되어 있었기에 그것에 닿기 위해 멀리 있는 우루는 늦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서 오는 동안 그 거리만큼의 시간도 한꺼번에 높은 밀도로 몰려온다. 늦은 만큼 쌓이고 중첩되어 몰려온다. 어떤 시간은 앞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증폭되고,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에서 무수한 거울이 영원히 반사되듯 동시에 일어난다. 무언가를 쓰면서 뒤늦게 도착한 기억에는 그 증폭되고 무한한 시간이 있다. 우리는 멀리 있고 늦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은 사랑과 아름다움을.

 

 

 


 

 

달걀과 닭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저/배수아 역 | 봄날의책
그녀는 전 작품을 통해서, 가난한 이민자의 가족으로 북동부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과 성인이 된 후 리우에서의 시절을, 명백한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명백한 브라질인으로서,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추상적으로, 비극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종교와 언어의 질문에 실어 표현했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인아영(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비평집 『문학은 위험하다』를 함께 썼다.

ebook
달걀과 닭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저/<배수아> 역10,000원(0% + 5%)

‘환상적인 불협화음’을 내는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좋아하는 여성작가를 만나기 위해 마르그리트 뒤라스, 엘프리데 옐리네크, 버지니아 울프를 거쳤지만, ‘환상적인 불협화음’을 내는 리스펙토르야말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다.”“「달걀과 닭」은 희게 번득이는 빛의 칼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칼날에 베이는 것..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무라카미 하루키 6년 만의 소설집

무라카미 하루키가 새 소설로 돌아왔다.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과, 작가가 꾸준히 응원해온 야구팀 등 하루키 월드를 구성하는 다채로운 요소들을 한데 만나볼 수 있는 단편집. 특유의 필치로 그려낸 소설들과, 이야기를 아우르는 강렬한 표제작까지, 그만의 작품 세계가 다시 열린다.

변화의 핵심, 새로운 주도주는 무엇?!

올 한해 주식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벤저민 그레이엄 역시 변덕스러운 사람에 빗대었을 정도로 예측이 어려운 시장, 미스터 마켓. 앞으로 또 어떻게 전개될까? '삼프로TV'로 입증된 전문가들이 양질의 분석과 통찰을 통해 2021년 변화의 핵심에 투자하는 방법을 공개한다!

김소연 시인의 첫 여행산문집

『마음사전』으로 시인의 언어를 담은 산문집을 선보였던 김소연 시인이 지난날에 떠난 여행 이야기를 담은 첫 여행산문집을 출간했다. 시인이 소환해낸 자유롭고 따뜻했던 시간들은 기억 속 행복했던 여행을 떠오르게 한다. 지금 당장 떠나지 못하는 답답한 일상에 더 없이 큰 위안을 주는 책.

차라투스트라, 니체 철학의 정수

니체를 다른 철학자와 구분짓는 두 가지는 혁명적인 사상과 이를 담은 문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두 가지가 극대화된 작품으로, 니체 산문의 정수다. 니체 전문가 이진우 교수와 함께 차라투스트라를 만나자. 나다움을 지킬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KALIO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