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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을 가진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
『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 연재
대학원 시절 목장에 실습 나갔을 때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인부들이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고, 가축 시설 설계도를 들고 기업에 찾아갔을 때에는 자폐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2020. 03. 02)
초원에서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따먹으며 살아가는 원시 인류에겐 불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번개가 치거나 화산이 폭발한 뒤 마른 풀에 불이 붙어 초원을 다 태워버릴 때 그들은 타오르는 불 속에서 세상의 종말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동물이든 사람이든 불을 보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갈 때, 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겁도 없이 불에 가까이 가서 불씨를 얻어온다든가, 부싯돌을 수도 없이 부딪히다가 결국 스스로 불을 피워내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지나치게 무모했고, 엄청난 집중력과 인내심을 보였다. 인류 문명은 이런 자폐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불을 가져왔기에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지극히 나만의 개인적 의견이다.
몇 년 전 한 TED 강연에서 반갑게도 내 생각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는 연사를 만났다. 멋진 카우보이 차림으로 강연에 나선 그는 콜로라도 주립대 교수이자 동물학자인 템플 그랜딘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 <템플 그랜딘>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강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어떤 마법이 지구상에서 자폐증을 없앴다면, 인류는 아직도 동굴 입구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원시인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폐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없었다면, 누가 돌창을 만들고, 누가 실리콘 밸리를 만들었으며, 누가 에너지 위기를 해결했겠는가?”
실리콘 밸리나 에너지 위기를 해결한 사람이라면, 스티브 잡스와 니콜라 테슬라, 혹은 일론 머스크를 가리키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뇌과학자 올리버 색스도 말했듯이 인류 문명 발전을 이끄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폐 성향을 지닌 인간들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자폐인을 사회 부적응자나 정신지체자쯤으로 여기며, 어떻게든 이들과 거리를 두어야만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1940년대 후반 미국의 부유한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던 템플 그랜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딸이 두 살이 가까워질 때까지 말을 못하던 끝에 결국 자폐아란 진단을 받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템플을 평생 맡아줄 보호기관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정상인으로서 살기 어려운 딸 때문에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템플의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다. 우선 딸이 ‘평생 말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지성인답게 교육의 힘을 믿었다. 교육과 훈련으로 인간의 뇌를 바꿀 수 있다는 ‘뇌가소성’ 이론을 배우기라도 한 사람처럼 딸을 위해 탁월한 선택을 했다. 템플을 위해 최고의 언어전문가와 개인교사를 고용해 말과 예절을 가르치도록 했고, 덕분에 템플은 네 살 무렵부터 더듬더듬 말을 하기 시작했다.
템플에게 예절을 가르쳤던 가정교사도 아주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미 그전에 자폐아를 가르쳐본 적이 있어 템플과 같은 아이들의 뇌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싶을 때 그에 해당하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많은 자폐아들은 그에 해당하는 그림이나 장면을 떠올린다. 언어 대신 그림이나 사진으로 생각한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사과를 달라고 말해야 할 때 사과란 단어가 생각나지 않고, 다양한 사과 이미지들 몇십 가지가 한 번에 한 장면씩 영화 필름 돌아가듯 순식간에 떠오른다. 템플의 가정교사는 사과처럼 쉬운 단어를 알아들을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제자를 위해 시청각 교육법을 택했다. 예를 들어 교통규칙을 가르칠 때엔 ‘위험’이나 ‘교통사고’ 같은 단어로 설명하는 대신, 차에 치어 죽은 다람쥐를 가져와 보여주면서 한 마디만 했다.
“길 건널 때 양쪽을 보고 차가 오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너도 이렇게 된단다.”
‘위험’이나 ‘교통사고’라는 말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차에 치어 죽은 다람쥐’의 이미지는 평생 템플의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이런 식으로 사회에서 지켜야 할 예절과 말을 철저하게 교육받은 끝에 템플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사춘기 무렵부터 템플의 학창생활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자폐아 특유의 예민한 감각 때문에 좌충우돌 문제를 일으켰고, 자폐아의 특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학교 분위기에 눌려 학업을 포기하려고도 했다. 이때 템플에게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칼록 선생님이었다, 템플의 뛰어난 이미지 기억력과 공간 설계능력을 눈여겨본 칼록 선생님은 이렇게 격려했다.
“대학을 향한 문을 열고 나가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거야.”
늘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던 칼록 선생님의 말을 믿고, 템플은 대학에 진학했으며 어릴 때부터 동물과 소통해오던 능력을 살려 뛰어난 동물학자가 되었다. 대학원 시절 목장에 실습 나갔을 때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인부들이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고, 가축 시설 설계도를 들고 기업에 찾아갔을 때에는 자폐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물을 다루는 템플의 능력을 가까이서 보거나, 템플이 직접 그린 설계도를 본 뒤엔 사람들의 태도가 곧 바뀌었다. 현재 미국 목장의 60퍼센트가 템플이 설계한 시설을 도입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이 분야에서 얼마나 뛰어난 전문가인지 알 수 있다.
자폐아의 사회성 발달을 연구하는 루돌프 연구소의 고윤주 소장에 따르면, 자폐아들은 ‘소통과 교류의 어려움’이 있는 대신, ‘남다른 특별한 행동과 집중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아인슈타인이나 모차르트 같은 천재들뿐만 아니라, 현재 국내외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지만, 본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얼마나 호의적인 환경에 있는가에 따라 급변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의 템플 그랜딘도 포기할 줄 모르는 어머니의 조기 교육, 제자의 재능을 발견한 칼록 선생님이 불어넣어준 용기가 없었더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평생을 보호 기관에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또 템플이 자폐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핸디캡을 딛고, 동물학자, 작가, 강연가로 성공하기까지에는 소수자이자 약자들의 ‘다름’을 인정하고 안아주는 사회적 울타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템플처럼 고도의 자폐인이자 여성이 한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로 인정받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물론 그전에 미리 만들어놓아야 할 것이 있다. 일반인과는 좀 다른 자폐인의 삶을 존중하고 너그럽게 포용해주는 사회 분위기이다.
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유윤한 저 | 궁리출판
여학생들이 어린 시절부터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고 과학기술계로 활발하게 진출하도록 안내하는 책들이 부러울 정도로 많이 나와 있다고 전한다. 이에 자극을 받아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진로지도 등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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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양 과학 책을 쓰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궁금했어, 인공지능』 『궁금했어, 우주』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카카오가 세계 역사를 바꿨다고』 『생활에서 발견하는 재미있는 과학 55』 『매스히어로와 숫자 도둑』 『몸이 보내는 신호, 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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