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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22화 : 니가 주의자 활동한다든데?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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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는 그때에 입장을 확인하고 서로를 이해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러한 약속을 둘은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했다. 처음의 약속이 어긋나게 된 것은 해방이 된 이후의 일이었고 그것은 이미 아우 이철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다. (2019. 0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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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이이철이 해고당한 것은 한 해 전 가을이었고 그가 독서회를 시작한 것이 이듬해 봄이었다면 그해 가을쯤에는 회원도 두 배로 불어나서 공장 안에서만도 두 그룹이나 되었고 이웃 제사공장까지 연계하여 세 그룹이 되었다. 이이철은 바깥의 연락부서를 자원하여 분주했고 조영춘은 박선옥과 함께 독서회를 이끌었다.

신금이는 박선옥 손영순과 더불어 제사공장 친구들과 원족도 가고 신파극을 구경하러 다니기도 했다. 신금이가 공장 야학 시절부터 늘 붙어 다니던 손영순을 독서회에 끌어들인 뒤에 손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여공들을 회원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셋 중에 그녀가 나이가 가장 많아서 스물 한 살이었고 신금이와 친해지자 사실은 충청도 친정집에 아들을 맡기고 왔다고 말했다. 보통학교를 다녔고 열일곱에 결혼했다는데 남편은 자기보다 세 살이나 아래였던 소년이었다. 아들을 배고 있을 때에 남편이 어느 여름날 마을 동무들을 따라서 금강에 뱃놀이 겸 천렵을 갔다가 빠져 죽었다.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갔고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친척의 소개로 방직공장에 취직하는 길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신금이는 그녀와 삼 년 동안 같은 기숙사 방에서 기거했는데 밥을 먹다가도 자리에 누워서도 가끔 손영순이 멍하니 다른 곳에 생각이 가있는 때가 많았다. 신금이는 저절로 그녀의 젖은 눈을 들여다보면 머리숱이 적고 눈이 큰 아기를 보게 되었다. 너 아기 생각하는구나, 그러면 영순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서 울곤 했다.


그날 박선옥은 조영춘과 다른 독서회 모임에 가있었고 신금이 손영순은 이이철 등과 함께 모임에 참석했다. 회원이 많아지면서 원래의 박선옥이네 떡집 모임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면서 이이철이네 버드나무집에서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 회원은 여섯 명이었다. 그들이 돌아가며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얘기하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며 툇마루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게 보였다. 이이철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말했다. 


  “방문 닫아.”


그는 금속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목까지 금속단추를 잠근 검정색 학생복을 입었다. 모자챙을 깊숙이 눌러 써서 얼굴의 반쯤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철의 간단한 말에 그는 말없이 방문을 닫았다. 손영순이 이철에게 소리를 죽여 가만히 물었다. 


 “누구예요?”


 “형이오.”


신금이는 그때 방문 옆에 앉아 있어서 그를 정면으로 보지는 못했고 고개를 돌리면서 힐끗 손에 감긴 붕대만 보았다고 그랬다. 나중에 일철은 실습 중에 다쳤다고 간단히 얘기했는데 금이가 사실은 그 붕대가 인상적이었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 마치 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돌아온 전사 같지 않으냔 것이었다. 또는 몸을 다칠 정도의 격렬한 사연을 숨기고 나타난 남자 같았다고 그랬다. 고보생들 가운데 축구나 유도 검도 같은 운동반의 학생들이 목이나 손이나 팔뚝에 공연히 붕대를 감고 다니는 유행이 오래 간 것도 그런 이유가 있을 법했다. 여드름에 별표 모양으로 작은 반창고를 붙이거나 목에다 붕대를 감는 여고보생들 경우에는 좀 논다는 표시이기도 했을 것이다. 모임이 끝나고 일어나서 나오려는데 이철이 금이에게 말했다.


 “오늘 공일날이잖아요, 좀 이따 우리 활동사진이나 보러 갑시다.” 


 “머 좋은 영화 들어왔대여?”


 “조선영환데 입소문이 났습디다.”


금이는 영순에게 그럴까 하는 시늉으로 눈짓을 했고 영순이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세 사람이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건너편 이백만의 공방에서 이일철이 나서면서 아우에게 말했다. 


 “머 영화구경 간다고?” 

 

 “형두 갈테면 따라 와.”


아우의 말에 일철은 툇마루에서 구두를 신으면서 어딘가 서두르는 기색을 보였다. 


 “실은 나두 보구싶었던 영환데 여기 들어왔더라.”


그들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집을 나서 시장 사거리로 걸어 내려갔다. 집을 나서자 이철이 형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먼저 금이를 소개했는데 당연히 식구들은 바로 그 순간에 일철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런 그림도 떠오르지 않았더냐고 여러 차례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돌아온 대답은 정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친한 사람 심지어는 전혀 모르는 사람도 척 보면 그가 겪는 사정을 짐작할 정도로 신기한 감각을 가진 신금이가 일철에게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는 건 오히려 이상한 조짐이 아니던가. 나중에 두 사람이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뭔가 장면과 그림을 보게 되었고, 온양 철도여관에 갔던 첫날밤에 지산이의 모습을 본 게 식구들에게 가장 유명한 일화였다. 그것도 생생한 대낮에 짐을 들고 방에 들어섰는데 다다미 방 위에 펴 놓은 이부자리 위에 지산이가 발가숭이로 누워서 사지를 버둥거리면서 깔깔 웃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지산의 배꼽 옆에 큰할아버지 이백만의 것을 닮은 검은 물사마귀가 있는 것까지 보았다고 하였다. 이백만의 검은 사마귀는 물론 등의 죽지뼈 위에 있었지만.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 아들의 모습을 볼 정도로 대단한 지감을 가졌던 신금이가 장차 자기의 남편이 될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에 아무 것도 못 보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아들인 이지산은 물론이고 며느리 윤복례나 손자 이진오가 그런 일에 대하여 물으면 신금이는 언제나 준비된 대답이 있었다. 

 

 “그건 그이가 내 남편으로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보여줄 필요가 없었던 게야.”


신금이는 일철을 보면서 아무런 그림도 떠오르지 않자 그제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철이도 그녀의 이마와 영리하게 반짝이는 눈이 너무 귀여웠다고 더듬거리며 말했던 적이 있었다. 


 “무슨 영화 보러가는 거예요?”


손영순이 물으니 일철 이철 형제가 거의 동시에 말해버렸다.

 

 “임자없는 나룻배.”


 “아리랑 본 사람?”


금이와 영순이 동시에 고개를 흔들자 형이 아우에게 말했다.


 “넌 일은 않구 맨날 활동사진만 보러 다니냐?” 

 

 “그러는 형은?”


 “신문마다 떠들썩하길래.”


형이 네 사람의 표를 끊겠다고 하자 신금이가 반대를 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느냐, 우리는 직장인이니 표는 우리가 끊겠다. 이철은 형이 수십 원의 돈을 받으며 기숙사에서 배우는 총독부 학생이니까 돈 좀 써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결국 각자 표를 사기로 했고 뒤에 저녁을 형이 한턱내기로 정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루터의 늙은 사공이 도끼로 철교공사장 기사를 쳐죽이고 침목과 철교를 부시려고 수없이 도끼질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정면으로 달려들고 노인 사공은 죽고 집에도 불이 나서 딸도 불길 속에 타 죽는다. 강물 위에는 무심하게 빈 나룻배만 출렁이며 떠있다. 극장에서 나오니 금이와 영순이는 울어서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이철이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연신 욕지거리를 했다.


 “왜놈들이 저질러 놓은 세상을 엎어버려야 할 텐데. 쪽발이들을 모두 쳐죽여야 해!”


일철은 말수가 별로 없다가 중국집에 가서 우동을 기다리는 중에 한마디 했다. 


 “나룻배로 철교를 당할 순 없겠지. 우마차가 비행기를 당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죽치구 살아야 하나?”


이철의 말에 일철이 한마디 더했다.


 “나는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 다만 그게 어쨌든 조선사람에게 좋은 쪽으루 쓰였으면 하는 게 내 소망이지.”


그들과 헤어지고 돌아온 다음에 건넌방에 나란히 누운 형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 공작창 그만두고 방직공장 들어갔다면서?”


 “해고당해서 아무 데나 들어간 거야.”


 “아버지 말씀으로는 니가 주의자 활동한다든데?”


이철은 대답하지 않았고 일철이도 더 이상 꼬치꼬치 묻지는 않았다.


 “나는 이번에 학업이 끝나면 철도국 직원이 된다. 운전과니까 장차 기관사가 될 작정이다. 집안은 내가 맡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 대신 네 바깥일은 밖에서 해결했으면 하는구나.”


형제는 그때에 입장을 확인하고 서로를 이해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러한 약속을 둘은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했다. 처음의 약속이 어긋나게 된 것은 해방이 된 이후의 일이었고 그것은 이미 아우 이철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다.


이철은 가까운 시일 안에 파업이 벌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공장 안의 종업원들의 자각이 중요했는데 몇 달 사이에 은밀하게 묶인 십여 명의 독서회원들도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또한 이제 막 연결하기 시작한 다른 섬유분야의 공장들도 아직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터였다. 이철은 신길리 밥집에 들렀고 삼 개월 만에 나왔다는 방우창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가두노동을 하면서 인근 일세방에서 기거하던 중이었다. 이철은 자신이 영등포의 연락책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알리지 않았다. 


 “건강은 어떠세요?”


이철이 아저씨뻘인 방에게 물으니 그는 여윈 뺨과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뭐 기소유예루 석 달 만에 나왔으니 고생이랄 것두 없네.” 


 “안 형은?”


 “고문 많이 당했지. 일 년 육 개월 먹었다데. 건강만 잘 추스르면 단련기간이라구 해야겠지.”


그리고 방씨는 검거 당했을 때에 일자무식꾼처럼 행세했다는 것이다. 글도 못 읽는 시늉을 했고 싹싹 빌면서 모든 것을 안대길에게 미루기만 했다. 그들은 뭔가 찾아내려고 물도 먹이고 발가벗겨 쇠좃매로 기절할 때까지 때리기도 했지만 방씨는 그저 울며 살려달라고 빌기만 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늉은 이번 한번만 통할 것이며 다른 사건에 연루되면 처벌과 징역은 배뜸이 될 거라고 그는 낙천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방씨도 이철에게 모두 다 말해준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구치소에서 누군가를 만났고 그는 상해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는 당분간 가두노동에 종사하면서 조직 일은 쉬겠다고 말했다. 이철은 또한 용산시장 입구의 삼개국밥집에도 월말 날짜를 맞추어 여섯 시에 들어가 앉아 중앙의 접촉을 기다렸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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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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