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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찾아서

차마 세상을 버리지 못한 내가 찾을 감정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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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워서 버리고 싶은 이깟 세상 따위일지라도, 정말로 세상을 버려버리면 퇴색되어버릴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을 버리지 못한 채 아름다운 마음들을 좇아만 간다. 영영 잃어버린 채로. (2018.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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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때로 뜻하지 않은 길목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그리곤 이내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 

 

버스 정류장에서 ‘10분 후 도착’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10분도 기다릴 줄 모르는 성미가 급한 요즘의 나는 그리움이나 기다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여유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다. 잠시라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지하철 앱에서 ‘빠른 환승’을 들여다 보고 있을 우리는, 여유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아름다움’도 잃어버렸다.

 

무언가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한 게 언제이던지 생각하면, 여행을 갔을 때라거나 며칠 간의 휴가가 주어졌을 때뿐이다. 내게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내 일상을 파고들어 올 아름다움이란 그래서 찾기 힘든 것이다.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이란 늘 동경의 대상이고, 낭만을 노래할 대상이 되며, 현실을 도피해 낼 거처가 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고, 시를 읽고 쓴다. 미술관을 찾아 잘 모르는 그림 앞에 서성이고, 공연장에 홀로 앉아 무대를 향해 시선을 꽂는다. 현실의 나는 메말라만 가기에, 목을 축일 어느 감정 하나를 부여잡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다독을 한다거나, 다작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계절마다, 달마다 떠오르는 작품 하나쯤 있을 만큼의 소소한 취향을 가지려 노력할 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가 기차에 멈춰 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대학교 1학년의 3월의 어느 날에는 이 구절을 보고 한동안 헤어나올 수 없었다. 시를 쓰겠다고 국문과에 왔건만, 내겐 모르는 작가와 소설들 투성이였다. 굳이 ‘긴 터널’이라고 표현한 게 압권이라던 교수님의 말에 가만히 상상했던 어느 겨울의 설국은, 해마다 겨울이 찾아오면 내 머릿속을 떠돌아 다니는 잔상이 되었다. 겨울만이 지닌 눈의 아름다움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감정이나 사랑 같은 보이지 않거나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쓰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그의 소설 『설국』 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헛수고’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자연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자꾸만 그려낸다. 이렇듯 헛수고로 기억될 아름다움들이지만, 우리는 결국 감정이나 사랑,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을 동경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건 온 몸에 스쳐갈 촉각적인 아름다움이건 간에.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며칠 전 오랫동안 보고 싶던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보고 왔다. 영하 18도라는 차디 찬 바람을 뚫고 찾아간 무대는 너무나도 단조로웠다. 오로지 피아노 한 대로 꾸며진 음악과, 단상 하나와 대나무가 배경의 장치로 이어지는 이야기. 지루할 것 같은 이 무대는 백석과 자야의 낭만적인 속삭임이 입혀져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견고한 사랑이 되어 다가온다.


눈이 내려 그를 사랑함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푹푹 눈이 나리는 설국. 헛소리인 것을 알면서도,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는 말은 마음에 푹푹 내려앉는다. 그 마음이 ‘더러워 버릴’ 우리의 세상을 살아가게 만든다. 더러워서 버리고 싶은 이깟 세상 따위일지라도, 정말로 세상을 버려버리면 퇴색되어버릴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을 버리지 못한 채 아름다운 마음들을 좇아만 간다. 영영 잃어버린 채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설국』 의 시마무라가 기차를 타고 도착한 ‘설국’과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가고 싶던 ‘마가리’는 분명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게다. 별 다를 것 없지만 순수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지닌 곳. 이 두 곳에서 사랑이란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을 것들이지만, 할수록 괴로운 것이지만, 없는 편이 낫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찾으려고 손에 움켜쥐면 빠져나가는 이 아름다운 마음과 사랑들은 세상을 붙들고 살아가려면 영영 잃어버린 채 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붙들어 맬 힘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써야 할 테니.

 

꽤나 감상적인 사람이 되었던 어느 겨울 밤, 동경할 것을 찾아내어 굳이 글을 쓴 것은 때때로 내게 찾아왔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갑자기 스쳐서였다. 베갯잇에 흘러 다니는 나만의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잠드는 시간 조차 아깝게 만들었던 겨울 밤. 내 앞에 나타날 세상에서 늘 하나씩 상실된 채로 아름다운 것들을 좇아가겠다. 누군가에겐 헛수고라고 일컬어질 낭만일지라도.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저 | 민음사
인물과 배경 묘사가 치밀한 데 반해, 그 안의 두드러진 줄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 행위의 유한함을 자연의 무한함에 비교하려고 했던 저자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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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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