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빙하처럼 차곡차곡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새로운 계획과 굳은 각오가 필요 없다. 단단하게 지켜 온 지금의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2017.11. 14)

빙하를 걷다

 

남녀,-여행사정-34-01@엘칼라파테.jpg

       수억 년의 시간이 내 발 아래 흐르고 있었다.

 

빙하 위를 걸었다. 태고의 신비가 숨겨져 있는 얼음 동굴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던가 얼음 안에 잠들어 있는 매머드를 찾아내어 수렵시대의 식사를 하는 굉장한 경험을 하길 내심 기대했다. 지구의 남쪽 끝자락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까지 갔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웬걸 빙하를 여행한다는 것은 반나절 동안 아이젠을 끼고 거대한 얼음 평야 위를 힘들게 걷다가 밥때가 되면 준비해 간 샌드위치 조각을 먹고 걸었던 것만큼 되돌아오는 것이 전부다. 정말이지 그뿐이다. ‘빙하 탐험’이 아닌 ‘빙하 투어’인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게지.

 

투어 마지막 순간, 빙하에서 살아 돌아온 기념으로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빙하 조각을 넣은 ‘온 더 락’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악플러가 되었을 거다. 그들이 투어 끝에서야 술을 주는 것은 어쩌면 영하의 추위에 종일 떨었으니 술 한잔하고 그 순간의 행복만 기억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영악한 사람들!

 

페리노 모레노 빙하는 누구 말대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만큼 멋진 여행지이다. 나처럼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빙하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일생일대의 경험이 될 것이 분명하다. 얼음 강줄기를 따라 수억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수억 년을 가늠하려고 해도 이내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많다. 거대하고 눈부신 빙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고 있다. 나이테로 나무가 자란 시간을 가늠하듯 끝도 없이 펼쳐진 너른 얼음 평야를 보고 있으면 시간과 시간이 벽으로 부딪치는 영화 <인터스텔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거대한 감동도 잠깐이고 얼음 위를 반나절 동안 걸었더니 춥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다. 빙하란 애초에 나란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자 공간인가 보다.

 

그 거대한 시간 위를 걸으면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한없이 투명한 푸른빛의 계곡, 크레바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린 푸르름에 넋을 잃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크레바스에 빠지면 누구도 구해줄래야 구할 수 없단다. 그야말로 ‘벽장’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가이드는 투어 내내 일행에게 주의를 주며 그 단절된 틈을 앞장서서 걸으며 안전한 길을 찾는다. 가이드가 깎아서 만든 디딤판에 올라서서 들여다보니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짙고 푸른 어둠의 골짜기가 보였다. 크레바스와 냇물이 만나서 생긴 웅덩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감을 풀어 만든 것 같다.

 

균열이 없는 얼음 땅이 그 너머에 보여도 함부로 뛰어넘지 못한다. 작은 크레바스처럼 보여도 큰 균열이 숨어 있을 수 있어 뛰어넘다가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성실하게 쌓아 올린 시간이 만들어낸 이 틈이야말로 우리네 삶 같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일상을 살다

 

남녀,-여행사정-34-02@엘칼라파테.jpg

       크레바스에 한 번 빠지면 살아 나올 수 없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연말을 특별하게 만들 계획으로 마음이 들썩인다. 언제 한 번 만나야지 했던 인사를 해가 넘어가기 전에 지키려고 끝없는 약속들을 이어나간다. 연말이 다가오고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 주변의 일상이 모두 새롭게 시작될 것처럼 행동한다. 시간은 그저 겹겹이 쌓인 일상이 모여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간을 만들 뿐인데 말이다. 들뜬 마음으로 계획을 세우지만 우리의 인생은 지금도 자라고 있는 빙하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연속이다. 단지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또 하나의 일상.

 

새해가 찾아오지만 그 남자와 나는 그저 또 하루의 일상을 사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꽉 찬 하루를 보낸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새로운 계획과 굳은 각오가 필요 없다. 단단하게 지켜 온 지금의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 남자와 나는 꽤 규칙적이고 엄격하게 일상을 살고 있다. 지켜낸다는 의미가 정확할 것이다. 일상이 모여 ‘그 사람은 어떠했노라’라는 일생이 만들어진다.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충실히 사는 사람의 일상과 ‘뭐 하루쯤인데 어때’라는 마음을 매일같이 품어 온 사람의 일상이 어떤 일생으로 기록될지 눈을 감아도 알 수 있다. 그저 평생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인생을 한탄하듯 산 사람의 일생이 어떤 식으로 망가질는지 우리는 그 끝을 그려 볼 수 있다.

 

새해가 되면 자기계발서가 불티나게 팔리고 외국어 학원 수강생이 늘어나며 체육관에 회원들이 바글거린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일 뿐인데 사람들의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더 나은 ‘나’를 위해 시간을, 돈을 투자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이 고달픈 우리의 ‘인내’와 ‘끈기’는 작심삼일 만에 소멸된다. 결심을 방해하는 다른 방해물들이 다가올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매해 겪는 일이라 낯설지도 않다.

 

짙푸른 빙하 위에서 느끼는 영겁의 세월과 그 시간만큼 축적된 한기를 느꼈다. 발자국마다 전해지던 사각거리는 얼음의 낯선 감촉이 또렷하다. 그리고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던 갈라진 틈의 푸른 빛까지. ‘빙하 위의 함정’이라고 불리는 크레바스야말로 성실한 시간을 위협하는 균열이었다.

빙하가 녹은 물을 마셔 봤다. 심장을 도려낼 것 같은 차가움이다. 물에 손이 닿자마자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얼해졌다. 컵으로 한 잔 떠서 뜨거운 물을 식히는 것처럼 잠시 두었더니 적당히 차가워졌다. 몸 끝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연말이라고 새해라고 특별할 것 없이 그저 맑은 기분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싶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오늘의 책

생명에 관한 완벽한 안내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폴 너스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제시한다. 세포, 유전자, 진화, 화학, 정보라는 생물학의 5가지 원대한 개념을 통해 생명의 비밀을 밝힌다. 모든 생물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 되는 법

코로나 블루를 넘어 레드로. 피할 수 없는 불안과 분노 속에서 살아가는 요즘 나를 지키기 위한 전문가의 '지혜'라는 처방은 참 뜻밖이다. 미지의 보물 같은 지혜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 오늘을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의 능력을 길러주는 현실적인 책.

고고학으로 접근하는 기록 너머 역사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개념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기자조선은 실재했을까?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첨예한 입장이 대립하는 고대사에 관해 고고학 자료를 활용하여 강인욱 교수가 설명한다. 지배와 폭력이 아니라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는 매혹적인 고대사 여행.

수상한 시리즈 박현숙 작가의 그림책

탐정이 꿈인 소녀 ‘나여우’가 방학을 맞아 고모와 잠깐 지내게 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담은 책. 서로와 인사도 하지 않고 벽만 보고 있는 삭막한 아파트! 주인공 소녀가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귀신을 보게 되고, 정체를 파악하고자 문도 열어주지 않는 이웃들을 탐방하며 겪는 미스터리 모험담.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KALIOP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