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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의 업데이트 – 좋은 감각과 취향을 갖는 것에 대하여

남들 다 어쩌고 살더라는 소리는 남 얘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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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로 일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그러니까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때 문득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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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취향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갖고 싶어!'라는 마음속 외침이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리는 것은 싫다. 타고난 듯 자연스레 좋은 취향이 몸에 밴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안달복달했다. 그 때문에 처음 보는 것을 처음 본다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때 이마에 '허세'라는 글자를 드르르 오바로크 쳐놓고 다니던 인간입니다.

 

특히 20대 초중반, 그러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라는 곳에 갓 나왔을 무렵 그 증상이 아주 심했다. 예를 들어 음악이라면 재즈, 특히 리듬이 복잡하고 시끄러워 정신 사나운 곡을 좋아한다고 남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박박 우겼다. PC통신의 재즈 동호회에 가입하는 건 기본이다. 정기 음악감상 모임에 나가선 눈을 지그시 감고 리듬을 타(는 척하)며 고개를 까딱까딱,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린다. 눈치껏 손뼉도 치고 휘파람도 불어본다(실은 불 줄 모르지만 일단 입술을 내밀어 봅니다). 누군가 오늘 감상한 곡에 대해 의견을 이야기하면 그렇죠오, 그런 느낌이죠오 라며 슬쩍 얹혀간다. 영혼이 실린 연주네요, 그렇죠오.

 

영화는 아트무비다. 나름 미술 전공자인데 '아트' 자 들어간 영화 정도는 봐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확히 뭘 콕 집어 아트무비라고 하는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잘 모르겠지만, 일단 감독의 이름이 길고 발음하기 어려우면 호감이 간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slowski)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ский)가 이름 어렵기로는 투톱이다. 아트무비란 걸 보러 가면 거의 항상 중반 이후쯤 푹 잠들게 되어 영영 결말을 알지 못한 채 극장 밖으로 기어 나오곤 했지만 그래도 본 것으로 친다. 누군가 감상을 물으면 '생각이 복잡해지네요'라던가 '단순한 말로는 설명이 어려워요'라고 두루뭉술한 방어막을 펼친다. 이런 영화를 볼 땐 역시 코아아트홀이나 동숭아트센터처럼 이름에 '아트'가 들어간 곳이 좋다.

 

그 와중에 남들 다 본다는 인기 있는 영화는 보기도 전에 깎아내려야 제맛인데, 대학교 1학년 때 개봉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도 그중 하나. 함께 보러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를 도도새처럼 도도하게 거절했다. 어머, 미안. 난 그런 건 잘 안 봐. 코아아트홀에서 아키 카우리스메키(Aki Kaurismaki)의 작품을 상영한다던데, 거기에 가려고 해... 라는 당시의 대화를 떠올려 보니 이렇게 재수 없는 소릴 하는 것도 재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이 지금까지 나를 상대해주는 것은 기적이다(그나저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나중에 슬쩍 혼자 서울극장에 가서 보고는 멕 라이언에 푹 빠져 세 번이나 다시 보았습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허세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왜 이런 짓을 했는가? 글쎄요. 사회인이라곤 하지만 경험도 뭣도 모두 부족한 시기, 가장 연약하고 불안한 시기라 고슴도치의 가시 같은 허세로 나를 무장하려 했던 게 아닐까. 뭐니 뭐니 해도, 어른으로 보이고 싶었다. 어른이라면 무엇에든 익숙할 것이고, 무슨 일에든 당황하지 않을 테니까. 어른이라면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크게 고민하지 않을 것이고, 무엇이 가장 좋은지도 알 테니까.

 

20대엔 서른서너 살쯤 되면 그런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나이엔 어지간해선 흔들릴 일이 없을 것이고, 인생의 고민은 다 끝났을 것이며, 조용하고 잠잠하고 우아하고 차분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지금의 우왕좌왕, 허둥지둥한 서툰 짓들 따위는 다 끝내버리고 확신에 가득 차게 될 거야. 하지만 서른서넛은 개뿔, 마흔이 지났지만 나는 항상 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 마흔다섯이 되어도, 마흔아홉을 지나 쉰이 되어도 나는 나,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운 과거의 허세는 오늘의 나에게 좋은 선물을 남겨주었다. 다양한 음악과 영화, 어려운 전시회와 책, 수많은 대화. 모두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은 욕심으로 헐떡헐떡 무리하며 받아들인 것이지만 그걸 통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갔다. 아무리 급한 상황에서도 수혈은 함부로 할 수 없다. 혈액형을 비롯해 여러 상황과 조건을 거듭 확인한 후 이루어진다. 당연한 소리죠? 생명이 달린 문제니까요. 나에게 맞는 삶을 찾는 것, 그리고 그 길을 가는 것도 그만치 당연합니다. 남들 다 어쩌고 살더라는 소리는 남 얘기일 뿐이다. 남들 다 회사 취직해서 잘 다니는데 넌 왜 혼자 일하니. 남들 다 시집장가 가서 애 낳고 잘 사는데 넌 왜 안 하니. 아, 그야 나랑 안 맞으니까 안 하는 거죠.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아니까요. 생명이 달린 문제니까요.

 

나에게 맞는 것을 때론 오랜 시간에 걸쳐, 때론 순간의 직관을 통해 찾았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한다.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어떤 건 유효기간이 짧았고, 어떤 건 지금까지 내 안에 들어 있다. 꾸준한 업데이트는 무척 중요하다. '젊게 살아요'라는 건 업데이트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야가 좁다면 결국 우물 안의 개구리로 끝날 뿐이다. 요 동네에서 취향 좋고 안목 좋은 개구리, 그걸로 땡.

 

프리랜서로 일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그러니까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때 문득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것은 이제 몽땅 낡아 버린 게 아닐까, 낡은 내 안에서 새로운 게 계속 나올 수 있을까. 한번 이런 생각을 시작하면 겁이 덜컥덜컥 난다. 어쩌면 이제 창작과 관련된 일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어. 나도 곧 마흔이잖아.

 

그런데 그즈음, 한 디자인 업체의 대표와 미팅을 했다. 오랜 클라이언트이자 열 살 남짓 위의 언니 같은 분이라 커피를 마시며 일 이야기를 마친 후에도 팥빙수를 아작아작 씹으며 속에 든 고민까지 술술 털어놓았는데 말이죠.

 

나: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걸까요. 서른다섯에 뭘 더 뽑아내겠어요.


그분: 서른다섯이 뭐가 많아.


나: 대표님은 회사가 잘 되잖아요. 근데, 언제 창업하신 거예요?


그분: 서른다섯 살 때.

 

나는 이날의 대화를 종종 떠올린다. 팥빙수를 먹기 전, 함께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새로운 것, 좋은 것을 많이 봐야 한다며 독특한 설치미술 전시회에 나를 데려갔고 커피 한 잔, 빙수 한 그릇도 새로 생긴 좋은 곳에서 먹어야 한다며 아름다운 카페로 이끌었다. 지금도 흥미로운 전시 소식이며 주목 받는 디자이너의 작품, 새로 나온 책 이야기를 끊임없이 카카오톡으로 공유해준다. 바로 지금 어떤 스타일이 가장 주목 받는지, 그리고 그걸 제일 잘 구현하는 작가가 누구인지에 눈과 귀를 예민하게 열어두는 사람이다. 자신보다 나이도, 경력도 어린 창작자를 만나는 데 주저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양한 투자를 한다. 업데이트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옆에서 보며 배운다.

 

지갑을 열 때마다 가성비를 따지는 시대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일에, 문화를 누리는 일에 돈을 쓰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인풋이 넉넉해야 아웃풋도 풍성해진다. 눈으로, 코로, 귀로, 입으로, 온몸 구석구석으로 온갖 좋은 것을 접해야 한다. 그리고 이게 왜 그렇게 좋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더 좋은 것이 튀어나온다.

 

미디어에서 만들어내는 가난한 예술가의 이미지에 동조하지 말자. 허세라며, 허영이라며, 사치라며 문화 소비를 공격하고 비웃는 목소리엔 더 큰 비웃음을 날려주자. 그런 소리를 하는 작자의 몰취향을 깔깔 웃으며 비웃어주자. 힘들수록, 아플수록, 아름답고 좋은 것을 찾아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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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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