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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그 고비만 넘기면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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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는 처음 열 몇 장을 넘길 때까지는 목구멍이 칼칼하다. 프랑스어가 한국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자갈이 많은 오솔길을 슴벙슴벙 건너뛰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번역이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딱 그 고비만 넘기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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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으로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에서 가을학기를 보낸 적이 있다. 30여 개 국에서 시인과 소설가들이 모여 학교 안 호텔에서 지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아이오와대학교의 학생들과 시민들을 위한 낭독회를 열었고 각종 세미나와 강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밤이 되면 호텔의 커먼룸에서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열리는 이유는 숱했다. 뉴질랜드의 위티가 새 소설을 출간해서, 핀란드의 티무가 문학상을 받아서, 파나마의 릴리가 춤을 추고 싶어해서. 그리고 이집트의 니보가 심심해할 때에도 우리는 가차없이 커먼룸에 모였다. 필리핀의 마크는 파티에 끼는 걸 좋아했지만 그보다는 방에서 한국드라마를 보는 일이 더 재미있어서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시안마켓에서 산 노래방새우깡이나 맛동산 같은 과자를 들고 갔다.

 

아이오와의 교수 나타샤가 전화를 걸어왔다. 문예창작대학원에 재학 중인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와 내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함께 해보라는 거였다. 반짝 눈이 뜨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래서 스물일곱 살 청년 제임스를 처음 만났다. 커피숍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제임스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헤이! 김씨!”
제임스가 미스 김, 이라고 불렀더라도 아마 나는 난감했을 것이다.

그는 예의를 다해 나를 불렀을 뿐이었다.

 

“김씨, 나 코리안 랭귀지 잘 못해요. 쏘뤼.”
나는 괜찮다며 웃어 보였고 제임스는 나를 위해 커피를 주문했다.

 

“김씨, 우리 영어로 말할까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라고, 그냥 한국말로 하자고 대답했다. 나는 아이오와 생활 내내 영어에 지레 질려 있었다. 제임스를 만나는 일이 기뻤던 것도 한국말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였는데. 어쨌거나 ‘김씨’라고 불리는 일은 좀 우스워서 내 이름 연습을 좀 시켜주었다. 쒸우리웅, 쒸뤼엉…… 힘든 일이었지만 대충 비슷한 발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령, 나 반말해도 돼요? 존댓말 이즈 투 디피컬트해요.”

“응응, 그래요. 반말해요.”


“땡큐. 존댓말 이즈 쏘 머치 헷깍헷깍해.”
헷깍헷깍? 나는 볼을 긁었다. 무슨 말일까.

 

“헷갈린다고?”
제임스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웃음이 터졌다.

 

“그래, 나도 영어가 너무 헷갈려.”
편하게 말을 놓게 된 제임스는 기분이 좋아져서 분위기 괜찮은 펍에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슈드 츙슈하고 비어를 마시러 가자.”
“뭘 하고?”


“슈드 츙슈.”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제임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청소를 하고난 다음에 맥주를 마시러 가자는 말이었다.

 

“포우이트뤼 하는 피플들 가는 바가 있고 픽션 하는 피플들 가는 바가 있어. 우리는 픽션 피플 바로 가자.”
“그래, 청소부터 하고 가자.”
제임스가 헤벌쭉 웃었다.


“서령, 코리안 랭귀지 발음 엑설런트 해.”
나도 한 마디 해줬다.
“너도 영어 발음 엑설런트 해.”

 

말도 안 되게 해맑은 이 청년과 함께 내 소설을 번역하고 그걸 번역 워크샵 수업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한숨도 나고 웃음도 났다. 결론만 말하자면 내 소설 고작 두 페이지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 자그마치 6주가 걸렸다. 제임스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왔고 이런 질문들을 했다.

 

“주인공이 멸치 똥을 왜 먹어? 멸치가 똥을 싸면 그걸 먹어?” 라거나 “한 이불을 덮는다는 게 무슨 말이야? 이불이 모자랐어?” 그런 것들이었다. 그래도 번역 워크샵 수업은 무사히 끝났고 콜라보를 마쳤음에도 제임스와 나는 자주 만났다. 픽션 하는 피플들이 가는 바에도 종종 갔지만 막상 소설 쓰는 사람들은 만난 적이 없었다. 졸린 표정의 나이 든 주인이 뚱하게 앉아 있었을 뿐.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는 처음 열 몇 장을 넘길 때까지는 목구멍이 칼칼하다. 프랑스어가 한국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자갈이 많은 오솔길을 슴벙슴벙 건너뛰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번역이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딱 그 고비만 넘기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루어지는 사랑도 아름답겠지만 깨어지는 사랑도 아름답다. 깨어지는 것에도 말릴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뻣뻣한 번역 따위 금세 잊게 되는, 고요하면서도 격정적인 서사이다. 불어를 배워 『레이스 뜨는 여자』를 제대로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지만 나는 영어도 제대로 못 배운 여자인 걸. 그런 건 포기하고, 그저 부들부들 읽기 쉬운 번역본을 다시 만나보았으면 하는 생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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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저/이재형 역 | 부키
공쿠르 수상작이자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레이스 짜는 여인」의 원작 소설. 얀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은, 한 여자와 남자의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흔해 빠진 이야기를 통해 가면 뒤에 숨겨진 현실 세계의 맨 얼굴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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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저/<이재형> 역8,820원(10% + 5%)

공쿠르 수상작이자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레이스 짜는 여인」의 원작 소설. 얀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은, 한 여자와 남자의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흔해 빠진 이야기를 통해 가면 뒤에 숨겨진 현실 세계의 맨 얼굴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지금까지 프랑스에서만 150만 부가 넘게 팔렸으며,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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