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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가 못 돼

박상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숙녀의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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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시집이 다소 외설적이고 비윤리적인 구석이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그 외설성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기묘한 형식적 아크로바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숙녀의 기분』이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킬 시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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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상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숙녀의 기분』이 처음 등장했을 때 나는 매우 열광했다. 본 적 없는, 정말 이상하고 새로운 시집이었으니까. 나는 이 시집이 비평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이 시집은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숙녀의 기분』은 이상한 즐거움을 주는 시집이다.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분홍 빛 표지를 펼치면 20대 여성들의 온갖 정념들이 다 펼쳐진다. 웃기고 슬픈 상황 속에 던져진 인물들이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기분이 되어버렸을 때, 그것을 읽는 이들은 함께 뭔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럼 그냥 거기 갈까?

 

거기가 어딘데, 니 거기가 어딘데, 아까 니가 설렁탕이나 먹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때부터 눈물이 났다 오늘쯤은 교외로 나갈 줄 알았어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서빙을 받고 싶었지 세상 모든 걸 내 눈에 담고 싶었다, 힐까지 신고서, 그래도 참고 설렁탕을 먹었는데……

 

(중략)

 

일어서서 그대로 나와버렸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어, 니가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길을 내려갔다 너는 계속 내 이름을 부르며 따라왔지 나는 살짝 더 빨리 달리며 울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니가 외치면 외칠수록 낭만적인 이 기분.
- 「기대」 부분

 

욕망이 어긋나는 순간을 그리는 한편, 다시 그 욕망이 다른 곳으로 미끄러져가는 순간을 재미있게 그린 시다.  『숙녀의 기분』은 이런 미묘한 정서적 순간을 아주 예리하게 포착하는 시편들이 많고, 그렇기에 이 시집은 읽고 있으면 이 절묘한 포착의 순간을 공유하는 데서 매우 독특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그런데 정말 독특한 점은 저 절묘한 포착이 젊은 여성들에게만 향해 있다는 점이다.

 

이 시집에는 20대 여성들만이 존재한다. 시험에 합격한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 억지로 웃다가 뒤에서 몰래 운다거나(「합격 수기」), 선생과 학생 간의 지루하고 멸렬한 성적 긴장을 그리는 한편 그 선생의 추함을 비웃는다거나(「쉽게 질리는 스타일」), 권력자이자 남성인 교수를 두고 학생과 조교라는 2등 시민으로서 대립하는 대목이라거나(「친자 확인 검사」),  『숙녀의 기분』에서 그리는 것들은 바로 이와 같은, 20대의 여성 대학생들의 여러 굴욕적 삶의 양태들이다.

 

이 시집에는 인용한 시처럼, 속물적인 욕망들과 그 욕망이 비참하게 무너지는 장면들이 가득 배열되어 있다. 아마 이 시집이 2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자본과 권력의 아래서 아득바득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터이다. 20대 여성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약자 집단이니까.

 

이 시집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 시집이 의도하고 있는 아이러니의 ‘미시정치학’을 위해 ‘20대 여성’이라는 집단을 뭉뚱그려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모종의 ‘여성혐오’를 야기한 것이다.  『숙녀의 기분』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욕망은 아주 익숙한 것으로, 소위 ‘된장녀’ 내지는 ‘김치녀’ 등으로 표상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시집을 처음 읽고 다소 당황했다. 이 작품이 주는 기묘한 쾌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외설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성혐오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게다가 시인은 여성시 연구를 계속 해온 연구자이기도 한 것이다. 2013년에 발간된 이 시집에 대한 고민은 2016년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단의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숙녀의 기분』에서 나타나는 ‘여성혐오’적 유형화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자고 말하고 싶다. 아니, 그러한 판단 유보를 이 시집이 의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숙녀의 기분』이 모종의 ‘드랙’을 수행하고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한다. 지면상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숙녀의 기분』은 ‘여성-되기’를 과잉수행하는 ‘드랙’의 문법을 활용함으로써 이뤄진 시집인 것이다. ‘숙녀’라는 말이 함의하는 다소 과잉된 여성성도, 시인의 말과 표지를 비롯한 시집 전체의 구성이 만들고 있는 과장된 소녀스러움도, 동시에 작품이 그리고 있는 납작하게 유형화된 20대 여성상도 모두 이 ‘드랙’이라는 문법을 통해 설명하지 않고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란 본디 1인칭의 예술이고, 시적 주체라는 강력한 렌즈를 통해 세계상을 투사하는 정서적이며 관념적인 구조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는 ‘주체’가 없다. 시적 주체라고 불릴 만한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이 과잉되게 활용하는 이 여성성의 기호들은 매우 납작하게 뭉뚱그려진 기호들일 뿐, 모종의 ‘주체’를 성립시키지 못한다. 그 반대급부로, 시집에서 줄곧 조롱하고 있는 ‘선생’들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40대 남성인 시인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그것이 시에서 주변화 되어 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이 또한 내게는 일종의 전도로, 말하자면 뒤집힌 ‘드랙’으로 읽히는 것이다.(여성성을 과잉시키는 대신, 남성성을 약화시키는)  『숙녀의 기분』은 묘한 방식으로 중심을 비우고 있다. ‘주체’가 정서를 투사하는 대신, 기묘하게 욕망을 일그러트리며 주체를 감추는 방식으로, 어떤 주체를 도출해내는 프로세싱을 거치는 대신, 아이러니와 알레고리로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시의 자리를 비틀어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숙녀의 기분』은 문제적인 시집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 시집은 시적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한국 시문학사에서 존재해본 적 없는 매우 기묘한 형태를 달성해내고 있다.

 

나는 이 시집이 다소 외설적이고 비윤리적인 구석이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그 외설성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기묘한 형식적 아크로바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숙녀의 기분』이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킬 시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충분히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에 더 넓은 지면에서 다시 논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아울러 더 많은 이들이 이 문제적인 작품을 읽고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주기를 바라며, 이 글은 여기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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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의 기분 박상수 저 | 문학동네
이 시집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아이도,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중년도 아니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툰 아이와 어른 사이, 소외 계층도 특권 계층도 아닌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야 하는 안락과 혼란 사이, 거기에 ‘숙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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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인찬(시인)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숙녀의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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