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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스승의 가르침”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조훈현 국수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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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 같은 바둑판 위를 한 발 한 발 걷고 있다. 생각의 위대한 힘으로 최선을 다해 자기만의 바둑을 두자. 자신의 영토를 최대로 넓히자. 신중하게 포석(布石)하고 거침없이 공격하되 치열하게 방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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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을 여는 대국, 그 대국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지 않았을까. 세계 바둑의 변방이었던 한국이 세계 바둑의 중심, 최정상에 서게 된 잉창치배 결승 대국 말이다. 주인공은 한국의 조훈현과 중국의 녜웨이핑이었다. 중국 최고의 인물이었던 녜웨이핑을 꺾은 조훈현은 귀국해 꽃다발을 목에 걸고 카퍼레이드를 하고, 은관문화훈장까지 받았다. 세계 최다승(1935승), 세계 최다 우승(160회)이라는 기록은 더욱 범상치 않다. 그 조훈현이 독자 앞에 섰다.


지난 8월 13일 정동의 한 카페는 조훈현을 보기 위해 찾아온 바둑 팬들과 독자들로 가득 찼다. 한미화 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조훈현은 털털하고 호쾌하게 자신의 삶과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최초 세계 바둑 대회 잉창치배 우승


가장 먼저 독자와 만나는 이 자리에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왔다며 상기된 마음을 감추지 않은 조훈현은 책 『고수의 생각법』의 가장 첫 장면을 장식하고 있는 1989년 잉창치배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최초로 열린 세계 바둑 대회 잉창치배의 첫 회를 우승한 조훈현에게도, 한국 바둑에도 이 의미는 남달랐다. 2승 2패, 마지막 대국에서 불리한 상황을 뛰어넘어 마침내 승리한 장면에 대해 물었다. 조훈현 국수의 바둑 인생에 이 대국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바둑은 머리싸움이죠. 중국, 일본 사이에 한국은 주목받지 못하는 변방의 작은 나라였어요. 잉창치배는 국제 대회지만 지명된 선수만 나가는 식이었고요. 주로 일본 선수와 중국 선수로만 이루어졌고 한국 선수로 제가 지명되었죠. 한국 선수가 한 명이 뭐냐고 했더니 조치훈도 한국 선수가 아니냐고 해요. 거의 일본에서 지낸 선수지만 국적은 한국이니까 그렇게 한 거예요. 준결승에서 임해봉(린하이펑) 구단과 제가 만나게 됐고, 저쪽에서는 섭위평(녜웨이핑) 구단과 후지사와가 만났어요. 제가 운 좋게 이겨 올라가서 섭위평 구단과 만났죠. 결국 어쩌다가 운 좋게 이겼는데요. 그 친구가 어느 정도 인기냐면 그 나라에서 금메달리스트, 영화배우, 가수 모두 합쳐서 톱이었어요. 바둑계의 1인자, 음악계의 1인자가 아니라 전 분야의 톱.”

 

그런 거목 앞에서 한국의 청년 기사 조훈현은 놀라운 집중으로 대국을 진행한다. 2대2. 결국 조훈현이 마지막 대국을 승리로 장식한다. 그 자신뿐 아니라 전 세계가 놀란 순간이었다.

 

조바심도 초조함도, 심지어 이기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사라졌다. 바둑과 나, 단 둘만 남았다. 그 절대적인 고요의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바로 여기구나! (중략) 145번째 수를 힘차게 놓자 녜웨이핑이 고개를 떨구며 돌을 던졌다.
“이겼다!”(21쪽)

 

어떻게 그런 수를 두었느냐는 질문이 많았다. 조훈현은 웃으며 말한다.

 

“행운이 따랐어요. 꼭 저렇게 바둑을 두고 싶어서 둔 게 아니니까요. 이 바둑은 바둑계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저 바둑 한 판으로 해서 한국 바둑이 세계 1등이 된 것이 처음이었고. 한 판이 아니라 바둑 역사의 한 페이지죠.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기억이 나지만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생각을 해요. 미생에도 나오고 한국 바둑의 유명한 일화로도 나오는 이유겠죠.”

 

다름 아닌 잉창치배 결승 대국을 책의 첫 장면으로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였다. 그 외에 이 장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는지 물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했던 건 아니지만요. 한국 바둑을 세계에 알려야 하고 한 번쯤은 우승을 해줘야 한다는 부담이 상당히 많았어요. 이기고 방에 들어와서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고 생각했어요. 이기는 순간에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홀가분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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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의 바둑 인생


그가 처음 바둑을 시작한 것은 4살 때였다.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원으로 간 것이 5살. 첫 돌을 놓던 순간을 기억할까?

 

“기억은 안 나고, 아버님에게 들은 얘기예요. 4살 때 할아버지가 바둑 두는 걸 곁에서 본 모양이에요.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바둑의 개념을 알고 있는 거예요.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백돌 하나를 두고 이걸 잡아보라고 했더니 잡았대요. 그래서 바둑을 가르쳐주셨어요. 어린 아이가 바둑을 둔다니 얼마나 귀여워요. 바둑 두는 어르신들이 다 한 번 씩 둬보자고 한 거예요. 어려서 집중력이 떨어져서 자리에 앉아있질 못하니까 용돈, 사탕으로 꼬드겨서 바둑을 더 두게 하기도 하고요. 결국 서울까지 와서 바둑을 배우게 됐어요. 9살에 입단을 해서 10살 때 유학을 가게 됩니다.”

 

놀라운 바둑 실력으로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어린 조훈현은 10살에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당시 바둑은 일본에서 꽃을 피운 때였다. 그 중에서도 조훈현은 세고에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유명하다. 알려진 대로 세고에 겐사쿠(1889∼1972)는 단 세 명의 제자만 두었다.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1907∼1994), 중국의 우칭위안(1914~2014), 한국의 조훈현이다. 조훈현을 내제자로 들였을 때 그의 나이는 일흔넷(1963년)이었다. 파격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문하생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이를 둘러싼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원래 기타니 선생님은 웬만한 학생들을 다 받아주세요. 한국에서 간다면 말 안 해도 거의 그쪽으로 갔어요. 근데 저를 데려가신 분이 저울질을 한 거예요. 일본 바둑계에서는 세고에 선생님이 더 위였어요. 그때 세고에 선생님 연세가 74세 정도 됐었죠. 그런 분에게 한국에서 온 어린 아이를 제자 시켜달라고 하니 말이 안 되는 거였어요. 먼 곳에서 왔으니 바둑 한 판 두자고 선생님이 제안하셔서 석 점을 놓고 둔 거예요. 근데 운 좋게 제가 이겼어요. 선생님이 두 점을 놓고 다시 바둑을 두자고 하셨어요. 얘기했죠? 운이 좋다고요.(웃음) 또 이겼어요. 그 자리에서 입문하라고 허락하셨어요.”

 

그러나 세고에 선생님은 바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바둑을 배우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낯선 타지에 온 어린 조훈현에게 세고에 선생님은 “사람이 되라”고 했다. 사람의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태도, 세고에 선생님은 그의 삶을 통해 제자를 가르쳤다.

 

“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거였어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성, 인품,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에서야 조금 깨닫죠.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에요. 사람이 되라는 말은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당시 세고에 문하에는 천재 우칭위안(오청원)이 있었다. 중국 출신의 기사 우칭위안이 세고에 선생 문하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청원 구단은)바둑계의 베토벤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천재인데다가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세고에 선생님이 오청원 선생에게 몸 상하니까 좀 쉬라고 야구장에 보냈어요. 그런데 야구도 안 보고 하늘만 쳐다보더래요. 머리로 바둑 공부를 한 거죠. 그분이 15살에 일본에 오신 건데요. 당시 세고에 선생님이 오청원을 제자로 데려와야 했던 거예요. 혼자 오는 것도 아니고 15~20명 되는 가족이 모두 같이 와야 해요. 당시 상황이 그랬어요. 얼마나 돈이 많이 들겠어요? 이때 선생님이 지인에게 후원을 부탁한 거예요. 지인이 이런 말을 해요. 네 말대로라면 중국 사람이 일본에 와서 바둑을 휩쓸 텐데 어떻게 키우느냐, 말이 안 된다고요. 선생님 말씀이 사람과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셨던 거예요.”

 

세고에 선생님은 나를 9년 동안 데리고 살면서 정말로 당신의 모든 걸 나에게 주셨다. 바둑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 바둑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그 정신세계까지 다 주셨다. 그것은 앞에 앉혀놓고 일일이 가르치고 주입시키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저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생활하면서 당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조금씩 스며들게 하신 것이다.


무슨 정신세계를 배웠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자로 잴 수도 없고,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60~61쪽)

 

조훈현은 세고에 문하에서 9년을 수련한다. 이후 조훈현은 병역 문제로 1972년 3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세고에는 조훈현이 한국으로 귀국한 지 네 달 뒤인 7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두 통의 유서를 남겼고, 한 통은 가족에게 “노구로 더 이상 신세 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자 한다”는 내용을, 또 한 통은 친구, 후배들에게 “조훈현을 꼭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는 부탁을 담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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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왕


한국으로 돌아온 조훈현은 한국의 바둑 풍경이 낯설었다. 일본은 철저히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바둑 문화였던 반면, 한국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3살 꼬마였는데도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조 선생,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라고 했어요. 그 분들도 모두 대단한 분들이었는데 말이죠. 한국에 오니까 딱 어깨를 두드리면서 ‘어이, 조 군 한 수 하세’하는 거죠.(웃음) 완전 다르잖아요. 또 한국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기면 되는 곳이었어요. 안 하면 1등을 못하니까 1등을 하려면 나도 그래야 했죠. 근데 배운 게 있으니까 그건 못하고요. 완전히 별 세계에 온 거죠. 거기에서 오는 혼란이 많았어요.”

 

좌절감이 심했던 조훈현은 그렇게 방황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용돈을 타려 하자 어머니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이웃에서 돈을 빌리셨다. 그때부터 정신을 차린다.

 

“프로 기사가 돈을 버는 방법은 이기는 수밖에 없거든요. 프로라는 게 그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열심히 바둑을 두게 되고요. 한 판 두 판 이기며 돈도 생기게 되죠. 그렇게 이기면서 타이틀을 따게 되니까 주위에 팬들도 많아지고, 기왕이면 휩쓸어라 하는 말도 듣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전관왕이 되었죠.”

 

전관왕 타이틀을 거머쥔 후 그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내제자를 받아들인다. 바로 이창호다. 스승과 기풍이 너무나도 달랐던 이창호는 성실함과 과묵함으로 바둑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왜 같이 살고, 같이 생활해야 하느냐면 선생님의 행동, 말을 보고, 느끼고,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저도 세고에 선생님께 배운 것처럼 창호에게 바둑 공부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창호는 8, 9살 때 저녁 먹고 나면 그 나이에 12시까지 바둑 공부를 했어요. 우리집을 나갈 때까지 그렇게 공부했어요. 다들 창호를 천재라고 하지만 천재는 아니었어요.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죠. 한 번은 복기를 하는데요. 얘가 후퇴를 하더라고요. 이럴 때는 치고 나가야 하는데 말이에요. 기세라고 하잖아요. 왜 이렇게 안 뒀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 말씀처럼 하면 열 번 두었을 때 한 번 쯤은 역전패를 당한다는 거예요. 싸움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자기가 좀 물러서면 백전백승 한다는 거예요. 안 진다는 계산이 되어 있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저보다 낫더라고요. 그렇잖아요. 9승 1패보다는 10승 무패가 옳은 거죠.”

 

조훈현은 이후 이창호에게 하나씩 타이틀을 잃는다. 그리고 또 8년 만에 타이틀을 되찾아온다. 한미화 평론가는 “정상에 오르는 것도 힘들지만 절정에서 내려왔을 때 그것으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조훈현 국수님은 늦은 나이에 다시 한 번 정상에 오릅니다. 이것은 처음 정상에 오른 것보다 더 대단한 게 아닌가 싶어요.”라고 말했다.

 

“아픈 데를 찌르시네요.(웃음) 진검승부를 한 적은 극히 드물어요. 제자와 스승이 싸우는 경우도 그렇죠. 거의 전례가 없던 경우였는데요. 저는 너무 일찍 제자를 받아들였고, 창호는 너무 일찍 커버린 거예요. 그래서 정상을 놓고 싸우게 된 거죠. 초장엔 이겼지만 갈수록 제가 모든 게 부족해서 지게 됐어요. 타이틀도 제자에게 다 뺐기고요. 그나마 제자에게 뺏겨서 덜 마음이 상했죠. 그 후 산에도 다니고 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된다, 가진 게 있다고 떨어지기 싫어 발버둥치는 게 잘못이지 밑바닥에서는 올라가는 길 밖에 더 있겠느냐, 생각하게 됐어요. 이제 한 번이라도 이기면 그걸로 만족이고, 그러다가 또 두 번 되고, 또 이길 수도 있는 거니까요. 마음이 편해지니까 바둑이 점점 편해졌어요. 그게 좋은 쪽으로 작용을 해서 다시 싸움이 됐던 것 같아요.”

 

흔히 바둑을 인생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바둑의 최정상에서 삶을 산 고수, 조훈현에게서 인생을 배울 수도 있으리라. ‘자기만의 바둑’을 ‘생각의 위대한 힘’으로 해나가자는 조훈현의 말을 오래 곱씹어볼 일이다.

 

생각을 바꾸는 건 그저 마음만 고쳐먹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심지어 결과까지 달라진다. 개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바로 생각인 것이다.


비록 바둑판에서 얻은 깨달음이지만 나는 어느 인생이나 근본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 같은 바둑판 위를 한 발 한 발 걷고 있다. 생각의 위대한 힘으로 최선을 다해 자기만의 바둑을 두자. 자신의 영토를 최대로 넓히자. 신중하게 포석(布石)하고 거침없이 공격하되 치열하게 방어하자.(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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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조훈현 저 | 인플루엔셜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는 바둑의 고수이자 승부의 고수로 오랜 시간 살아온 조훈현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직접 복기’하는 첫 에세이로, 그가 깨달은 ‘생각의 힘’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인생에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조언을 건네는 책이다. 조훈현은 말한다. “세상엔 풀지 못할 문제란 없다.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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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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