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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문제 잊혀서는 안 돼

『우리 균도』 북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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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를 균(均), 길 도(道). 『우리 균도』의 저자 이진섭 씨는 아들 균도와 함께 세상을 걸었다. 총 다섯 차례, 3천 킬로미터의 거리였다. 그는 “힘차게 함께 싸우자”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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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동생은 서울 시내버스 노선을 모두 외운다. 2004년 버스 개편이 크게 있었으니 몇 번 버스가 몇 번으로 바뀌었는지도 완벽하게 업데이트했다. 그리고 부지런히 버스를 타고 돌아다닌다. 또 사촌 동생은 종종 문자를 보낸다. 뜬금없고, 맥락도 없다. ‘우정의무대’라든가 ‘우리연선이누나’하는 식이다. 아마 주변 많은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낼 것이다. 답장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아, 이 글을 쓰는 순간에 문자가 왔다. ‘연선이누나 스승의날 축하드립니다’. 스승도 아니고, 축하할 스승도 딱히 없지만 이 녀석 덕분에 스승의 날을 기억하게 됐다. 열심히 답장을 한다. 대화가 잘 되지 않지만 이것은 세상과 조금 다른 사촌 동생이 던지는 최선의 손짓이라 생각하므로 오늘도 열심히 답장을 한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세상을 걸을 수 없는 균도.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균도는 걸으면서도 세상의 꽃들과 구름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즐거워했다. 이제는 나의 균도뿐만 아니라 천진난만한 이 세상의 모든 균도들이 다함께 어깨 걸고 뛰어 다닐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238쪽)

 

『우리 균도』의 북토크를 꼭 가겠다고 마음먹은 건 이런 개인적 사연 때문이 있기도 했지만 ‘균도 아버지’ 이진섭 씨가 들려주는 ‘균도와 함께 하는 삶’이란 상상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현실적이고 치열한 이야기여서 오히려 고민과 반성이 커질 뿐이었다.


이진섭 씨는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 균도와 2011년 발달장애인법 제정을 촉구하며 세상 걷기를 시작한 후 2013년까지 총 다섯 차례 3천 킬로미터를 걸었다. 이진섭 씨의 삶, 아들 균도 씨의 삶, 아내와 균도의 동생 균정이 살아온 이야기가 한 권의 책에 담겼다. ‘느리게 자라는 아이’ 『우리 균도』에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브이(V)자를 그리는 천진난만 자체인 이균도 씨가 있었고, 아버지 이진섭 씨가 “눈으로 키”(174쪽)운 균도 씨 동생 균정이 있었고, 두 아들을 키워내는 슈퍼맘 엄마가 있었다. 이들 주변에 가득한 세상 사람들까지.

 

‘장애’라는 것을 신체장애를 벗어나지 않는 개념으로 인식하던 시절부터, 드라마 <굿닥터>의 주인공 주원을 통해 ‘서번트 증후군’을 이해하게 된 때까지, 세상은 훌쩍 변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발달장애인들이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이들의 지능은 어린 아이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학교에 머무를 수 없다. 그 순간 이들은 온전히 가족들의 몫이 된다. 전국 발달장애인이 20만 명이라는데, 이들이 주간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정도로 터무니없이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균도 씨가 발달장애인법 제정을 촉구하며 걷기를 시작한 이유다. 그리고 지금, 그는 “부양의무제 폐지 안 하면 우리 아이들, 발달장애인법 100개 있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난 4월 22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는 『우리 균도』의 저자 이진섭 씨와 주인공 이균도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펼쳐졌다. 행사에 앞서 이균도 씨가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장’을 받게 되어 수여식이 진행되었다. 수여를 대신한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김재형 부회장은 “책을 받자마자 들었던 생각이 ‘균도야, 고생 많이 했다, 고맙고, 네가 자랑스럽다’ 는 것이었다. 균도의 까만 얼굴을 보면서 우리 발달장애인들의 모습을 본 것처럼 짠했다”고 먼저 말하며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균도 씨와 균도 아버지 이진섭 씨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균도 씨에게 수여된 표창장은 ‘전국을 걸으며 발달장애인과 가족들의 삶을 알려낸 공적을 인정받’은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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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균도 씨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보았다.

(영상 보기: //www.yes24.com/24/goods/16922696?scode=032&OzSrank=1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못 먹는 소주를 마시고 균도를 부산 기장 앞바다로 데려갔어요. 함께 하늘로 가자고요. 그러면 애 엄마랑 동생은 편하게 살 수 있지 않겠어요? 그때 말없이 내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걷던 균도가 갑자기 입을 열었습니다. “아빠 살려주세요.” 균도가 처음으로 문장을 말한 날이었습니다. 아! 내 인생이 아니었구나. 균도는 균도 인생이 있는 거구나. 그 순간을 기억하며 지금도 살아갑니다.”

 

 

균도 덕분에 달라진 사람


‘균도와 나는 왜 걸었는가’라는 제목으로 균도 씨의 아버지이자 『우리 균도』의 저자 이진섭 씨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자신을 “균도 때문에 달라진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일컬으며 우연한 기회에 걷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다.

 

“물론 학교를 보내면서 균도의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긴 했지만 썩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어요. 균도가 남들보다 키가 한 뼘 씩 더 컸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니까 집사람이 목욕을 시켜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엄마에게는 참 힘든 일이겠다 싶었어요. 목욕을 시키면서 우리 아이의 크는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바깥일을 하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식의 모습을 똑바로 인식하게 되었고, 아내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주말에 한 번이라도 자유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외출한지 한 시간 만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아들 균도는 계속 자랐고 아버지는 균도와 함께 제대로 살기 위해 공부를 다짐하게 되었다.

 

“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편입을 하게 됐습니다. 갈 때 아내와 약속을 했지요. 한 집안의 가장이 야간도 아니고 주간으로 학교를 다닌다고 하면 어느 아내가 좋아하겠습니까? 원서 마감을 앞두고 아내가 울면서 말하더군요. 균도를 대학 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저더러 대학을 가라고요.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웃음) 100명 중 2등인가로 졸업했습니다.”

 

아버지의 대학교 졸업과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은 하루 차이였다. 졸업은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그랬다. 국내 발당장애인 20만 명 중 주간보호시설을 이용하는 인원이 6천 명에 불과하다. 균도 씨 역시 대기상태였다.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이진섭 씨도 취업이 되지 않았다. 이 때 아버지가 생각해낸 묘수가 ‘세상걷기’였다.

 

“도망쳐야겠다 싶어서 한 것이 균도와 세상걷기였습니다.(웃음) 아들 백수, 아빠 백수, 갈 데 있습니까? 없죠. 당시 마음은 아내에게 강제휴가를 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돈도 없었습니다. 누가 저희를 믿고 도와주겠습니까? 일정을 갖고 걷는 것은 저와 균도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모든 분들이 실패한다고 얘기했었어요. 실패하는 게 맞고요.”

 

아빠랑 여행 가자. 졸업하면 서울까지 여행 가자. 균도도 너무 좋아했다. 균도가 좋아하니 간다. 계획을 진행하고 균도와 걷기 연습을 하다 보니, 지원 세력도 생겼다. (중략)그래도 준비한 보도자료를 방송국에 전했다. <부산일보>에 크게 기사가 났다. 이제는 진짜 가야 하는 모양이다. 지방 방송국에서도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왔다. 아, 이제 큰일이다. (36~37쪽)

 

아버지는 걷는 동안 아들의 몸에 끈을 묶어 다녔다. 왜일까? 아들이 도망갈까 걱정이 되어서? 아니었다.

 

“균도는 차 소리를 굉장히 싫어해요. 차가 ‘빵’하면 옆 사람을 밀어버립니다. 하지만 끈을 묶으면 자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아니까 밀지 않습니다. 끈은 그래서 묶었던 겁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 100명이 있으면 100명 모두 다르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그러니 세상이 발달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이란 얼마나 얕고 초보적인 수준인지 모른다.

 

 

일이 커졌다


처음부터 전국을 돌기 위해 떠난 것은 아니었다. 언론의 관심이 크니 가야겠다, 생각했다. 부산에서 대구까지 가면 잘 간 것이라 생각하고 걸었다. 이진섭 씨에게도 이것은 새로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좀 달랐던 것은, 간만큼이 성공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목표가 있으되, 목표는 작으면 작을수록 좋아요. 우리의 목표는 아이의 상태가 있으니까요.”

 

서울까지 걷게 된 것도 역시 방송 때문이었다.

 

“방송에서 하도 어디까지 가냐고 묻기에 서울까지 간다 했지, 서울까지 갈 생각 없었어요.(웃음)”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준비도 없었다. 등산화를 신고 나왔다. 물집이 터졌다. 이들의 걷기는 그저 백수 아버지와 백수 아들이 집을 뛰쳐나온 것뿐이었다. 가다보면, 쉬다보면, 끝이 나겠지 생각했다. 비장한 각오, 사회적 의식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응원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세상의 관심을 받으면서 일이 점점 ‘커졌다.’

 

“발달장애인들의 부모님이 나오시는 거예요. 부담스러웠습니다. 걸어야 하잖아요.(웃음) 내일은 안 나오겠지 싶었는데, 또 나오시는 거예요. 그러다 대구까지 갔는데 분위기가 수상해요. 신흥 종교 교주도 아닌데 자꾸 ‘고맙다’면서 회사도 안 가고 따라오시고 하는 거예요. ‘이건 가야겠다’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들 부자의 1차 걷기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28일이 걸렸다. 당시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은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부모들의 제안은 그 전에도 꾸준히 있어왔지만 특별한 이슈를 가지지 못했다. 이진섭 씨는 이왕 걷는 김에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을 제정하라고 써서 달았다. 균도 씨가 발달장애인이었으니 당연히 ‘발달장애인법’도 제정하라고 썼다. 운이 좋았다. 2011년 5월,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이 통과되었다. 1차 걷기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1차로 걷다보니 느낀 게 한 가지 있어요. 우리의 문제가 잊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잊히지 않으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균도는 발달장애 문제를 잊지 않도록 계속 소재제공을 합니다.”

 

다시 걸었다. 1차 걷고 나니 전라도 사는 분이 불렀다. 왜 서울만 가느냐고, 우리 동네도 와달라고 했다. 그 한마디에 그리로 갔다. 이렇게 연락 오는 대로 여기저기 갔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를 찾아주었다. 이들을 응원하고 도움을 주려 했다. 이진섭 씨도 느낀 것이 많았다. 3차를 걸을 때, 이진섭 씨는 생각했다. 발달장애 문제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제가 부산 기장에 삽니다. 저는 암 환자입니다. 아내도 암입니다. 1차 걷기 당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있었습니다. 3월 11일이죠. 균도와 제가 걷기 시작한 것이 3월 13일이었어요. 걷다보니 <조선일보>에서 기사를 냈습니다. 암환자인 아빠와 발달장애 아들, 방사능 비 맞아도 문제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황당했죠. 그때 제가 후쿠시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사고를 치기 시작합니다. 발달장애의 문제를 원전 문제로 파고들었습니다. 3차 걷기 후 ‘균도와 세상 걷기, 법원으로 가다’를 진행했습니다.”

 

균도 씨가 태어난 곳이 원전에서 불과 3km 떨어진 곳이었고, 이진섭 씨와 아내 모두 암이었다. 이야기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운동을 폭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발달장애인 문제와 원전문제의 접점을 찾아낸 것이다.

 

이들이 한국수력원자력을 상대로 낸 소송 결과는 승리였다.

(관련 기사 보기: //www.lawissu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665)

 

 

세상의 문제들


발달장애인에 대한 이슈를 사회적으로 알리고자 했던 이진섭 씨의 노력에 세상이 서서히 답을 보내왔다. 환경운동과 반핵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발달장애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이진섭 씨는 아들 균도를 데리고 어디든 갔다. 아무리 말해도 ‘균도와 함께 해야’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전엔 몰랐습니다. 관심 없었습니다. 지금은 균도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분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균도는 나를 부를 때 꼭 “균도 아빠”라고 부른다. 누가 뭐라 해도 자기 아버지인데 꼭 옆집 아저씨 부르는 것처럼 한다. 그때마다 나는 균도 아버지임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어찌 보면 균도는 나의 스승이다. 이 아이를 만나면서 사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균도와 같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불혹을 넘기고 사회복지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중략)난 확신한다. 이 길이 너와 비슷한 아이들의 세상살이를 좀 더 살 만한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 될 거라고. (48~49쪽)

 

“저는요. 균도가 없었으면 이 운동 안 했습니다. 발달장애 운동 안 했습니다. 원전 소송 안 했습니다. 균도 문제를 사회문제화 시키기 위해서 이 운동을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사회복지사입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발달장애인을 위한 운동가가 아닙니다. 저는 기초부양의무제 폐지하자고 하는 운동가입니다.”

 

그가 아들 균도를 스승이라 생각하는 이유다.

 

이진섭 씨는 부양의무제 폐지에 대해 강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부양의무제란 수급자의 배우자, 직계존비속 등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부양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가족이 책임지고 노동능력이 없는 가족을 맡아야 하는 제도이다. 가족과 사실상 관계를 끊고 살아도 호적상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 자격을 박탈하는 제도가 부양의무제다. 이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012년 10월 26일 활동보조인이 없는 새벽에 일어난 화재에 대피하지 못해 목숨을 잃은 故김주영 장애인권운동 활동가와 2012년 10월 29일 파주에서 난 화재로 목숨을 잃은 박지우, 박지훈 남매의 이야기는 크게 뉴스가 되기도 했다. 

 

“기초부양의무제 폐지 안 하면 우리 아이들, 발달장애인법 100개 있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저 이 운동 안 해도 제가 기초생활수급자이기 때문에 균도는 발달장애인법 안에서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이 운동을 하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아무리 내 자식이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내가 얼마 이상 벌면 온전히 부모 책임입니다.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줍니다. 다 자부담이잖아요. 저는 운동도 그렇고 이 책도 마찬가지로 제가 아니라 다른 발달장애 가족들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진섭 씨는 아들 균도를 더 정확히 알기 위해 뒤늦게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사회복지사가 되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균도와 세상을 걷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세상에 알리고 발달장애인이 세상과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세상에 외친다. 부양의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우리 사회에서 부모는 다 똑같은 부모가 아니다. 돈이 많은 부모, 적당히 부족한 부모, 터무니없이 부족한 부모, 부모는 모두 다르다.

 

“우리나라는 돈이 굉장히 많으면 진짜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저는 돈이 없는 부모, 중간 소득 정도의 부모를 위해서 운동합니다. 그 사람들이 갈 곳이 없기 때문이에요.”

 

“같이 힘차게 싸우는 길만이 우리가 살아갈 길이다.” 이진섭 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는 균도 씨에게 노래를 요청했다. 쑥스러운지 북토크 내내 강연장 뒷자리에 앉아있던 균도 씨는 사람들의 부탁에 씩씩하게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욕심 버리면 그 모든 것이 즐거워 걱정과 근심 떨쳐버려요’하며 힘차게 노래 부르던 균도 씨는 사람들의 앵콜 요청에 이어 안치환의 <내가 만일>을 불러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였다. 그리고 균도 씨는 노래를 마치고 아빠에게로 가 기쁘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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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균도이진섭 저 | 후마니타스
지적 장애인과 그 가족의 문제를 알리고 발달장애인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아버지와 아들이 느린 시선으로 세상을 걸으며 몸으로 쓴 국토대장정기다. 아들보다 하루 더 살기만을 소원하는 장애인 부모가 아니라 사회에 그 책임을 묻는 장애인 활동가로서, 그는 오늘도 균도의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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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신연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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