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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책 속 밑줄 긋기

사랑과 운명의 이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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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중편소설 「폭설」에서 진주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흐르는 시간 위에서 끝과 시작들을 품은 사랑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김지원의 세계는 이성의 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음(陰)의 세계다. 빛의 강제 속에서는 어떤 비밀도 숨김도 머무름도 허락되지 않는다. 빛이 현현(顯現)하는 벌거벗은 적나라함 속에서 모든 사물은 즉각적으로 드러나고 밝혀진다. 반면에 어둠을 머금은 음의 세계 속에서는 어느 정도 불투명성과 비밀과 수수께끼들이 온전하게 보존된다. 음의 세계에서 비밀과 어둠은 한 짝이다. 일반적으로 운명과 사랑은 비밀과 어둠을 자양분 삼아 자라난다. 빛의 세계 속에서 이성의 질서가 확립되고 역사와 노동이 이루어진다면 어둠의 불가해함 속에서는 신화가 탄생한다. 음의 세계를 물들이는 중요한 정조는 슬픔과 연민이다. 김지원의 소설은 차라리 노래다. 「겨울나무 사이」의 한 작중인물이 냉장고에 써 붙인 시의 한 구절, “너는 들어? 괴롭게 온몸으로 타오르는 내 노래/재로 다 타버리는 내 노래”, 그런 노래가 김지원의 소설들이다. 아마도 그것은 안으로 삭인 울음이고, 운명에 내재된 이별과 갑작스러운 생의 몰락들에서 비롯한 비가(悲歌)일 것이다. 



김지원의 소설들은 주로 여성의 실존을 그리는데, 여성의 자아 찾기가 그 핵이다. 여성으로서의 자각은 대부분 남자와의 만남을 계기적 기회로 삼는다. 그것이 행복한 것이든 쓰라린 것이든 만남은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우연이 고정되는” 경험이다. 어느 한쪽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사랑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르는 이행의 과정”으로 바뀐다. 김지원의 소설에서 여성 화자는 남자를 만나면서 제 운명 안에 다양한 굴곡과 주름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사랑이 만남과 헤어짐들, 즉 수많은 끝과 시작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무늬들, 그리고 상처를 품고 있는 까닭이다. 달이 찼다 기울고 다시 찼다 기울기를 반복하듯이 사랑 역시 만남과 헤어짐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여기에 미국을 배경으로 이민자의 스산한 삶이 겹쳐진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이민 체험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대목이 아닐까. 작가는 중편소설 『폭설』에서 진주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흐르는 시간 위에서 끝과 시작들을 품은 사랑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작가는 소설의 앞부분에서 무심히 한 문장을 쓴다. 너무 무심해서 지나칠 수도 있는 이 문장은 작중인물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습기 찬 차창으로 세상으로 눈물인 듯 번져 보였다. 진주는 문득 뻗어 있는 이 길 끝까지 달려가 대륙의 저쪽 끝에 파도치는 바다까지 가볼까 생각했다.” 


바로 내가 밑줄을 그은 대목인데, 주요 화자인 진주가 겪을 운명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다. “습기 찬 차창”으로 바라본 바깥 풍경은 불투명하다.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빛의 세계와 대척하는 자리임을 암시한다. “눈물”로 젖고 번져 불투명함을 머금은 풍경이 암시하는 것은 불길하고 슬픈 운명일 것이다. 음의 세계가 가진 본질적인 수동성에도 불구하고 진주는 “대륙의 저쪽” “파도치는 바다”까지, 그 운명의 끝을 바라보며 거기까지 가볼까 생각한다. 김지원의 다른 여성 화자들과 마찬가지로 진주는 그 비극의 레이스를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결심을 보여준다. 진주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파국과 상처들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그 고통을 내면으로 감수하며 견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진주는 유학 시절 정섭이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가 그와 이혼한 뒤 고혈압 환자인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간다. 진주의 인생은 어머니의 볼모로 잡혀 있는 꼴이다. 그러다가 진주는 기(起)라는 자유분방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기는 진주에게 “키가 자라고 나이 먹는 게 성장이 아니오. 당신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게 성장이오.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가정과 가족을 떠나는 것뿐 아니라 당신 자신 안에서 가족을 몰아내는 것이오.”라고 말하며, 병든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독려한다. 결국 진주는 어머니를 떠나 기의 거처로 들어가 살림을 합친다.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진주와 기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된다. 진주가 기에게 매력을 느낀 것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나갈 만큼 자유분방하고 독립적이다. 반면에 진주는 나약하고 의존적이며 인생에 대해 소심한 태도를 갖고 있다. 진주는 기에게서 자유의 활달함과 거침없음을, 기는 진주에게서 영원한 여성성 안에 있는 부드러움과 온전함을 보았을 것이다. 기가 사랑에 관한 한 방랑자라면 진주는 한번 닻을 내린 곳을 떠나지 않고 머무는 정주자일 것이다. 진주가 그랬듯이 기 역시도 서로가 가진 이런 상반된 특성 자체에 매혹되어 사랑에 빠진 것이다.


진주와 기 사이에 아이린이라는 여자가 나타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아이린은 “이제는 여자도 뭔가 원하는 것을 가질 때예요.”라고 말하는 여자다. 기는 여성을 억압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당당한 여성으로서 주체적 삶을 추구하는 아이린에게 빠져든다. 기는 진주를 사랑하면서도 아이린에 매혹되고, 아이린 역시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이런 관계에서는 윤리적 갈등이 야기되고야 만다. 알랭 바디우가 말한바 “자아가 사랑 고유의 투명성을 거쳐 자아를 상정한 그 힘 안으로 빠져들게 될 때” 진주는 기와 아이린에 대하여, 아이린은 진주에 대하여, 불가피하게 윤리적 채무감이 발생한다. 사랑은 만남과 지속성의 문제다. 그것에 의해 사랑은 촉발되고 아울러 그것 속에서 소진되고 사라져버린다. 만남은 “기적의 범주에 속하는 어떤 것, 즉 존재의 강렬함, 완전히 녹아버린” 경험이다. 모든 만남들은 우연의 속성을 띤다. 그것이 사랑의 계기가 될 때 만남은 운명이라는 외양으로 바뀐다. 두 사람은 사랑을 선언한다. 그것은 “‘만남-사건’에서 진리 구축의 시작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고, “만남의 우연을 시작이라는 형식 안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선언은 “그토록 위태로운 것”이고, “일종의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선언이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길고 산만하며, 혼동스럽고 복잡하며, 선언되고 또다시 선언되며, 그런 후에조차 다시 선언되도록 예정된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토록 여러 번에 걸쳐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할 사랑의 선언이 더 이상 그쳐버렸을 때 그 사랑은 속절없이 시들고 이내 끝을 향해 달려간다.  


이 세 사람 사이에 등장한 윤리적 딜레마를 풀기 위해 아이린이 낸 해결책은 진주의 허락 아래 이들의 관계를 음지에 두지 않고 양성화하는 것이다. 진주는 기와의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 기와 아이린의 대담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진주와 기가 아이린 부부와 함께 휴가를 보내던 어느 날 새벽, 진주는 아이린의 남편과 관계를 맺는다. 이로써 세 사람의 사랑은 일부일처제라는 틀의 엄격성을 해체하고 그 느슨함 속에서 서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진주가 발작을 일으켜 정신병원으로 실려 가고, 퇴원 후 기의 집에서 짐을 싸가지고 나오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그 뒤 기가 옆집 남자의 어이없는 총기 오발 사고로 죽으면서 진주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맺는다. “오늘 아침 진주는 길을 가다가 ‘진주’하고 부르는 그 특별한 억양의 기의 목소리를 듣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그가 이 세상에는 아무 데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비극인 것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이 부재하는 공간 속에 혼자 남겨진 자의 슬픔만이 자욱하기 때문이다.     


폭설은 작가 김지원이 집요하게 추구했던 여성으로서의 삶과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잘 드러낸 수작이다. 진주는 수동적이면서도 한없이 여릿한 존재 같지만, 한편으로는 해일처럼 자신을 덮치는 불행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불안의 압력을 담담하게 관조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강인한 여성이다. 반면에 기는 강인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남성 같지만, 불행을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을 끊임없이 회피하고, 결국에는 제 삶마저 유기(遺棄)한 채 달아난다. 진주가 음의 세계 속에 머무르며 예민함과 용기로 제 앞으로 달려오는 불행들에 맞서 영혼을 끝없이 단련하는 존재라면, 기는 머무름을 회피하며 불을 쫓는 불나방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좇는다. 기에게 사랑은 운명의 닻을 내려 그 자리에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한없이 가벼운 향락의 추구처럼 보인다. 그 사랑은 애초에 머무름을 배제함으로써 영혼을 강하게 단련할 기회도 함께 배제한다. 폭설은 그토록 다른 두 사람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사랑과 운명의 이중주(二重奏)를 들려주는 셈이다.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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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소설 선집 세트 김지원 저 | 작가정신
고(故) 김지원 작가는 맑고 섬세한 감수성과 아름답지만 절제된 문체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해온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가지고 있다. 김지원 작가는 미국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에서 타자이자 이방인이었던 여성으로서의 삶과 정체성을 탐구했으며, 남녀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의 본질을 파고드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김지원 소설 선집』 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김지원의 40여 년에 걸친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고 보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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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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