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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책 속 밑줄 긋기

「알마덴」 부터 「사랑의 예감」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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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해 보이는 하루. 어제와 같아 보이는 오늘. 하지만 여기에는 강렬한 희망과 예감이들끓고 있다. 어쩌면 당신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단지 아름답고 희망찬 무엇이리라 생각한다면, 지금 김지원을 만나라.

그저 평범해 보이는 하루. 어제와 같아 보이는 오늘. 하지만 여기에는 강렬한 희망과 예감이들끓고 있다. 어쩌면 당신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단지 아름답고 희망찬 무엇이리라 생각한다면, 지금 김지원을 만나라. 한밤중에 누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옮기는 발걸음처럼, 사뿐히 놓인 문장 사이로 흐르는 것은 현실에 대한 처연한 감상이고 불같은 희망이다. 그리고 무표정해 보이는 단어들 아래로 읽히는 것은 다가가고 싶다는 절박함이다.

김지원 소설 선집 3권 『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에는 초기작인 「사랑의 기쁨」 부터 1997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사랑의 예감」 까지 총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김지원은 미국 뉴욕으로 이민한 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래선지 이야기들은 자연스레 뉴욕, 그것도 맨해튼의 한 한국인 가정에서 시작된다. 집이 없음, 떠돌아다닌다는 불안, 두고 온 사람들과 장소에 대한 그리움은 21세기의 독자들에게 널리 공유되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하나가 더해진다. 늘 가족에 속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의 눈 밖에 나지 않는 동양 여자로서의 삶. 자유와 속박 사이의 줄타기는 언제나 위태롭지만, 김지원은 덤덤한 문장으로 부려놓는다. 아찔함을 즐기는 것은, 이쪽의 몫이다.


「알마덴」-위태로운 아찔함, 자유와 속박 사이의 줄타기

“가끔 여자는 다정한 남자와 나뭇잎이 거칠게 설레는 숲속을 걸어가는 공상을 했다. 아름다운 풍경 사진 속의 한 장면과 같이 공상 속에 나타난 숲길은 짧았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으며 그 길의 입구는 어떠했던가, 여자는 그것이 자기 머릿속에서 지어낸 공상임에도 생각해볼 수가 없었다. 어떤 남자와 오로지 그 장면에 나타나 있는 그 길 위에 서보는 것이었다.”-「알마덴」 중에서
남자는 매일 저녁 가게에 들러 알마덴 샤브리를 한 병씩 사간다. 여자는, 김지원 자신이 그랬듯 맨해튼의 주류 가게 여주인이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다. 그녀의 묘사에 의하면 “나이 차이가 많이 지고 감자 같은 용모의 남자”다. 그런데 얼굴과 몸이 탄탄하고, 완강히 뻗은 코와 힘찬 윤곽의 입술을 지녔으며, 떡 벌어진 가슴에 난 부얼부얼한 털이 잘 보이게 단추를 풀어 헤친 남자가 매일 저녁 찾아와 술을 사간다. 여자가 남편에게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재밌는 얘기를 좀 해보려 해도 남편은 집에 가서 찌개나 좀 끓여놓지, 하고 말을 끊는다. 여자는 젊은 남자를 상대로 공상에 빠진다. 대단한 것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로지 그 장면에 나타나 있는 그 길 위에 서보는 것”이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공상에 필요한 재료는 하나씩 더해진다. 어느 날인가는 젊은 남자가 계산을 하면서 남편에게 “참 좋은 누이동생을 두었습니다.”라고 말을 건넨다. 이것은 둘의 관계가 (부부가 아니라) 남매임을 확인하려는 행동이 아닐까. 돈이 넉넉지 않으며 혼자 사는 남자, 아름다운 여자들이 그의 집에 드나들겠지. 여자의 살을 쓰다듬는 남자의 손가락……. 이런 공상의 순간에서조차 그녀가 애참하게 보이는 까닭은 “공상의 사이사이에 돈 걱정, 날쌘 도둑들, 남편의 냉대 같은 것이 여자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침이면 여자는 자신에게 성을 내며 일어나 또 하루를 시작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보다 한 옥타브는 높아 보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젊은 남자가 묻는다. “날 믿을 수 있습니까?”


「먼 집」-길을 잃어버린 이국의 산책자
“기언은 빨리빨리 걸어갔다. 어쩌면 이렇게 인기척 없이 조용할 수가 있나. 서울에도 이런 골목이 있을까. 기언은 자기가 살던 집, 신혼살림을 꾸미고 운혜를 낳았던 조그만 집을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비 오는 날이더라도 담 밑을 지나는 발소리며 과일 장수나 고물 장수의 외침 소리가 있었던 것 같았다. 혹시 인적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어느 집 창문 너머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나 그릇 소리들도 들렸던 것 같고 집 밖에 나가서 두 발짝 가면 구멍가게, 또 두 발짝 가면 문방구……. 가슴을 치미는 그리움을 느끼며 기언은 빨리빨리 걸어갔다.”-「먼 집」 중에서
이국의 거리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온몸의 촉이 강렬하게 곤두선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등에서는 땀이 나고, 산책의 즐거움은 이미 사라졌다. 닫힌 문은 하나의 두려움, 적요한 거리는 그 자체로 두려움이 된다. 외진 골목길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도 떠오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마저 엄습해온다. 고국에 두고 온 일상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그 모든 것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가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나면, 기다리는 건 퇴근한 남편의 투덜거림이다. 길을 잃고 헤맸기 때문에 아이와 남편이 없는 순간의 두려움을 저릿할 정도의 모험으로 몸도 마음도 인식해버린 것일까.


「어떤 시작」-먼 길을 느리게 달려가는 완행열차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비행기 소리, 지나다니는 차들의 소리, 그것들을 누르고 방 안에 퍼지는 기타 소리. 무엇인가 더위에 썩어가기도 하는 여름밤이었다.”-「어떤 시작」 중에서
같은 소재를 다뤄도 이렇게 다르다. 미국 영주권을 위해 결혼한 남자와 여자. 「깊고 푸른 밤」 이 브레이크 고장 난 기관차처럼 끝을 향해 질주한다면 「어떤 시작」 은 아주 먼 길을 느린 속도로 달리는 완행열차 같다. 밖에서는 안을, 안에서는 밖을 응시하고, 눈이 마주치고, 언제든 내릴 수 있을 것 같지만, 동시에 내리지 않고 이 여정을 끝까지 하고 싶기도 하다.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는 윤자는 영주권이 필요한 남자와 위장결혼을 한다. 상대는 정일이라는 연하의 남자. 학생인 그는 이민국에서 조사를 나올 경우를 대비해 그녀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곤 한다. 윤자는 그가 좋다는 마음과 더불어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에 빠져 있다. 정일은 정일대로 학문에 대한 회의(“나의 학문이 그리도 위대한가. 싫증이 난 애인을 의리상 도덕상 어루만지고 돌봐줘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내처럼 자신이 부끄러웠다.”)와 윤자와의 관계에 대한 친구의 농지거리(“중년 부인은 그런 면으로 한창인데 잘 먹고 서비스 부디 잘해줘라.”)에 괴롭다. 사람들 말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어울리는 것으로만 본다면 제법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공식적으로 끝나는 순간이 오자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정리한다. 정일은 윤자에게 말한다. “제가 결혼을 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랑의 예감」-신비롭고도 아름다운 현실 인식
“파도는 영원히 밀려오겠지. 난 밥을 같이 먹고 잠을 같이 자는 사람보다 영원을 향해 함께 갈 사람을 원해.”-「사랑의 예감」 중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최소한 한 번쯤은 얽혀본 인물들이 주로 등장하는 김지원의 소설에서는 남녀가 제도에 묶여 있다는 현실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랑의 예감」 에서도 아내는 “무슨 문제가 있으면 대화로” 해결하자고 말하고, 남편은 “대화는 피곤합니다. 마음을 억지로 한 방향으로 끌고 가면 스무 살에 했던 말을 서른 살에 후회합니다.”라고 응수한다. 여기에 정답은 없다. 맞지 않는 두 톱니바퀴가 맞물려 덜컹거리며 굴러간다. 김지원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이 소설의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마지막 대목에 대해서는 책 서두에 실린 서영은의 추모글 <지나갈 어느 날>을 함께 읽어보면 좋다. 소설가와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여러 겹으로 겹쳐지며 점점 투명해지는 기묘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으면 남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삶, 더도 덜도 아닌 당신 자신이다.

이다혜(북칼럼니스트ㆍ<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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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소설 선집 세트 김지원 저 | 작가정신
고(故) 김지원 작가는 맑고 섬세한 감수성과 아름답지만 절제된 문체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해온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가지고 있다. 김지원 작가는 미국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에서 타자이자 이방인이었던 여성으로서의 삶과 정체성을 탐구했으며, 남녀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의 본질을 파고드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김지원 소설 선집』 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김지원의 40여 년에 걸친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고 보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관련 기사]

-소설가 이제하가 만난 김지원
-소설가 서영은이 만난 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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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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