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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아무도 끝을 모르는 오래달리기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톰 행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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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과 구별되는 오래달리기의 세계, 포레스트 검프의 세계에는 기록이 없다. 골인점이 없으니 당연하다. 남을 이길 필요는 전혀 없고, 반드시 자신을 이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달리다 힘겨우면 걸어도 되고, 걷다 힘들면 멈춰도 되고, 길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도 된다. 달리다 말고 버스 정류장이 나오면 벤치에 앉아 모르는 사람과 수다를 떨며 초콜릿을 나눠 먹으면서 버스를 기다리면 되고, 버스가 오면 냉큼 올라타 이웃 도시로 가면 되는 거다.

어떤 말들은, 아주 오래되었고 그래서 지당하기 그지없는 것처럼 들린다. 가령, ‘인생은 마라톤이다’ 같은 격언이 그렇다. 고백하자면, 힘들었을 때 그 말이 큰 위로가 됐다. 그 말 덕분에 나는 지금 30km 지점, 가장 힘들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지나고 있을 뿐이라고, 이제 곧 내리막길이 나오고 결승점이 보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달려도 결승점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 고통의 정점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진 상태였다. 힘들 때 도와준 대상에겐 원래 더 각별히 고마운 법.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왜 결승점이 나타나지 않는 거냐고, 내가 지나온 게 러너스 하이가 맞기는 한 거냐고 따지기엔 ‘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경구에 빚을 진 기분이었다.

며칠 전 우연히, 일본에서 제작된 CF 한 편을 봤다. 화면은 마라톤 대회의 스타트라인을 비추는 데에서 시작한다. 수천 명의 마라토너들이 출발점에 서 있다.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삐 달려 나가는 발과 발들. 그 위로 한 남성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누구라도 달리기 선수다. 시계는 멈출 수 없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밖에 흐르지 않는다. 되돌아올 수 없는 마라톤 코스. 라이벌과 경쟁해가며 시간의 흐름이라는 하나의 길을 우리는 계속 달린다.’
그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수천 명의 마라토너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레인 없는 레인 위를 열심히 달려간다. 끝을 향해, 어딘가 있을 목적지를 향해. 성우가 말한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하마터면, 그래 나도 알아, 라고 중얼거릴 뻔 했다. 그런데, 잠깐의 암전 뒤에 예기치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앞사람을 따라 열심히 달리다 말고 천천히 멈추어 서는 한 남자, 헉헉대는 숨을 고르다가 돌연 카메라를 바라본다. 그때 화면과 겹쳐지는 목소리는 이렇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같은 방향을 향해 가던 마라토너들이 제각각 코스를 이탈하여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다. 아니다. 뛴다기보다, 달린다기보다, 마치 그들은 도망치는 것 같다. 이 세상 밖으로. 각자의 모든 방향들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아니야.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야! 누가 정한 코스야? 누가 정한 결승점이야? (……) 실패해도 좋아. 돌아가도 좋아. (……) 길은 하나가 아니야. 그건 인간의 수만큼 있는 거야.’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광고는 이런 의문문으로 끝이 났다.
‘모든 인생은 훌륭하다. 누가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했나?’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잘 뛰는’ 남자를 하나 알고 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거래요. 어떤 걸 집어 들게 될지 모르니까.”

맞다. 바로 이 유명한 대사를 남긴 사람. ‘포레스트 검프’다. 동명의 영화는 IQ 75의 남자 검프의 인생역전기인 동시에 첫사랑을 향한 애절한 순애보이다. 늘 무언가 두 끗 부족해보이던 소년 검프. 스쿨버스에서 모두가 그를 외면할 때 선뜻 옆자리를 내주었던 소녀가 제니다. 왕따 소년의 유일한 친구 제니는 검프가 평생에 걸쳐 애타게 갈구하는 구원의 여신이 된다.

어른이 된 제니는 신기루 같은 욕망을 좇아 세상을 떠돌고, 검프는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제니를 따라 뛰고 또 뛴다. 왜 뛰어야 하는지 고뇌하지 않으며 나중에 얼마나 숨 가쁠지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탁구 챔피언, 전쟁 영웅, 성공한 사업가, 달리기 정신 운동(?)의 창시자라는 직함을 두루 갖추게 된 검프가 끝내 원하는 것은 제니를 되찾는 것뿐이다. 제니가 클럽에서 취객에게 희롱당할 때, 반전 운동을 하는 애인에게 구타당할 때도 검프는 상대를 응징하고 여자를 적극적으로 ‘지켜주려’ 한다. 첫사랑으로 상징되는 제니는 결코 잃어버려서도 안 되고 타락시켜서도 안 되는 어떤 이상향의 이름이다. 즉 현대인이 잃어버린 양심의 가치 같은 것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남자들이 왜 첫사랑에 집착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재미있는 힌트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제니의 삶이 계속 피폐해져갈수록 오로지 제니만 바라보며 묵묵히 달린 검프의 삶은 점점 발전해간다. 영화는 운명을 잘못 타고났다고 투덜대는 이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음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검프처럼 인생에 닥친 모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뛴다면, 당신도 다 이룰 거라고 일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건,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 성공하지 못한 건 부정적인 시각과 게으름 탓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기에 위험하다.) 그러므로 포레스트 검프가 ‘무한 긍정이론’의 살아있는 신화라며 비웃음 당하거나, 아메리칸 드림의 현현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긴 세월 타지를 떠돈 제니가 죽을병에 걸려서야 검프를 찾아온다.

“사실 네 아들이야.”

그 한마디와 함께 제니는 아이를 깜짝 선물처럼 내민다. 과거의 순정한 가치는 소멸해도 미래의 희망만은 아직 남아있다는 의미일까. 검프는 아이를 받아든다. 물론 친자 확인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는 제니가 죽은 뒤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보듬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는 다시 달릴까? 아마 그럴 것이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점점 나이가 들수록 속도는 점점 느려질 것이다. 그의 목적지는? 본인도 모를 것이다. 아마도,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마라톤은 무척 아름다운 스포츠다. 42.195km를 무사히 마치고 결승점에 들어서는 선수들이 숭고한 건, 자신을 이긴 인간은 다 숭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라톤은 필연적으로 기록경기다. 가장 빠른 기록으로 골인점을 통과한 사람이 이긴다. 가장 빨리 도착한 순서대로 금, 은, 동메달리스트가 된다.

마라톤과 구별되는 오래달리기의 세계, 포레스트 검프의 세계에는 기록이 없다. 골인점이 없으니 당연하다. 남을 이길 필요는 전혀 없고, 반드시 자신을 이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달리다 힘겨우면 걸어도 되고, 걷다 힘들면 멈춰도 되고, 길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도 된다. 달리다 말고 버스 정류장이 나오면 벤치에 앉아 모르는 사람과 수다를 떨며 초콜릿을 나눠 먹으면서 버스를 기다리면 되고, 버스가 오면 냉큼 올라타 이웃 도시로 가면 되는 거다.

인생은 아무도 끝을 모르는 오래달리기임을, 빨리 뛴다고 오래 살아남는다고 승자가 아님을 어쩌면 오래 전 포레스트 검프에게 배우고도 나는 또 잊고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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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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