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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슬램덩크>의 강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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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호는 어떤 의미에서 현실 속 평범한 젊은 남자들의 꿈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 몸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는 애벌레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눈부신 나비가 되어 저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리라는 꿈. 지금은 비록 머리 나쁘고 공부 못하고 껄렁껄렁하게 살지만, 자신이 잘 하고 정말로 좋아하는 바로 그 분야를 찾아내는 순간, 잠재되어 있던 괴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언젠가 ‘약간의 과장이 가능하다면 나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슬램덩크』 에서 배웠다’라는 문장을 쓴 적 있다. 슬램덩크를 비롯한 각종 일본 만화들을 탐독하던 시절, 적어도 학교에서 받은 가르침보다 만화대여점에서 얻은 가르침이 내겐 훨씬 유용했다. 반납일이 하루 지체될 때마다 꼬박꼬박 연체금이 불어난다는 뼈아픈 교훈을 체득할 수 있는 강의실은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이노우에 다케히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남자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 만화에 대한 나의 애정에는 특별한 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생(生)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가졌던 것 같다. 『슬램덩크』 속 인물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농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즐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개수의 사랑의 방식이 있듯 농구라는 대상을 앞에 둔 이들의 사랑법도 각자 다 다르다.


강백호 vs. 서태웅. 둘은 전혀 다른 캐릭터다. 서태웅이 모범 농구 소년의 전형이라면 강백호는 그 반대쪽에 있다. 만화가 시작될 때 강백호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농구공을 제대로 잡아 본 적도 없다. 열일곱 살 소년 강백호가 농구부에 가입하게 된 이유는 오직 여자 때문이다. 첫눈에 반한 소녀와 가까이 지낼 수 있다면 농구부든 배구부든 야구부든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순하고 해맑고 철없는 꼴통. 처음에 백호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러나 그는 빠른 속도로 변해간다. 타고난 체력, 뜨거운 열정과 투지, 악착같은 승부 근성으로 농구 코트를 휘어잡기 시작한다.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주야장천 본인 입으로만 주장해서 주위를 코웃음 치게 하던) 숨겨진 천재성이 마침내 발현되는 것이다.

물론 다디단 열매가 거저 얻어지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소년은 죽을힘을 다해 특별훈련에 임한다. 언제나 말이 앞서 나가던 소년이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알게 되는 거다. 그는 어느새 그럴 듯한 진짜 농구선수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마침내 농구를 정말로, 사랑하게 된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라는 그의 고백은 코끝이 찡해질 만큼 순수하다. 전에 아무것도 ‘정말’ 좋아해 본 적 없는 아이의 고백이라 감동이 더 크다.

강백호는 어떤 의미에서 현실 속 평범한 젊은 남자들의 꿈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 몸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는 애벌레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눈부신 나비가 되어 저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리라는 꿈. 지금은 비록 머리 나쁘고 공부 못하고 껄렁껄렁하게 살지만, 자신이 잘 하고 정말로 좋아하는 바로 그 분야를 찾아내는 순간, 잠재되어 있던 괴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강백호를 바라보며 현실 속 청년들은 주먹을 꼭 쥔다. ‘그래. 나는 아직 내 재능과 열정을 온전히 쏟아부을 곳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야. 기다려라. 언젠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다.’

정규교육의 시스템 안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 당하는 척도는 학과 공부뿐이다. 공부를 못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구만리처럼 남은 인생 전체를 무시당해온 아이들, 그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강백호의 사례는 하나의 환상적인 표상이다. ‘아무 것도 아닌 소년들’은 은밀하고 간절하게 의심한다. 어쩌면 나는 천재 농구선수일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천재 뮤지션일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천재 사업가일지도 몰라. 환상과 다른 일상을 견디기 위하여 청년들은 제 팔뚝에 마취 주사를 놓는다. 2010년대 방송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수만 명씩 몰려드는 현상도 그것과 무관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삶은 만화가 아니다. 소년들은 곧 강백호의 재능이 상위 1퍼센트였음을 알게 될 운명이다. 슈퍼스타K의 톱텐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고, 나머지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99퍼센트의 그들은 어떤 분야에서도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 나지 못했다. 그들 앞에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만이 예정되어 있다. 그들은 어쩌면 농구선수나 뮤지션이나 청년 사업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천재 농구선수나 천재 뮤지션, 천재 사업가의 모습으로 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백호처럼 죽도록 노력하여 부상 투혼을 발휘한대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1퍼센트가 아닌 청년들’로 남겨질 가능성이 더 크다. 미래의 강백호를 꿈꾸던 청년이, 나의 능력이 그저 고만고만한 평범치일뿐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 자신이 결코 ‘강백호’가 아님을 인정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단념을 배우고, 세상은 급격히 쓸쓸해진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도 되고 고등학교에서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온 셈이다.’
-서정인 「강」 중에서
p.s. 『슬램덩크 2』 가 나온다는 소문은 십 년째 실현되지 않고 있다. 나로 말하자면, 속편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기다리지 않는 마음이 더 크다. 제힘으로 1퍼센트가 되었던 강백호가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 더욱더 먼 곳, 더욱더 위험한 곳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조마조마할 것 같아서다. 강백호라도 거기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1990년대에 박제되어 뜨거운 희망의 이름으로 남아 주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앞으로 매주 화요일, 정이현 작가의 칼럼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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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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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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