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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차에 대해 - <러시>

고물 프린스의 조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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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잔뜩 실어서 쓰는 주간 영화칼럼 ‘영사기’를 위해서 개봉영화 7편을 보았건만, 그 무슨 영화를 보든 간에 도무지 가을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 호가 낙엽처럼 생명력을 잃어 보인다면, 그건 모두 필자가 심각한 ‘가을무력증’에 빠져 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지면을 빌어서 고백을 하자면, 나는 지병을 하나 앓고 있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기에 음모가 나기 시작한 학생시절부터 이 기구한 역사가 시작되는데, 대입을 앞둔 수험시절은 물론, 고작 닭다리 하나에 영혼까지 팔았던 졸병시절을 거쳐, 취업을 앞둔 대학 졸업시절까지 어김없이 이 질환은 나의 육체와 영혼을 잠식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 심각하게 ‘가을을 탄다’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도 과묵하기 그지없으나, 가을이 되면 마치 뇌에서 언어를 이해하는 센서가 꺼져버린 것처럼 말수가 줄어들고, 카페에 가서 주문을 할 때에도 “늘 마시던 걸로”라고 주문을 한다(대부분은 “도대체 뭘 마셨던 거죠?”라는 반문이 돌아온다. 가을은 외롭다). 그런 탓에 영혼을 잔뜩 실어서 쓰는 주간 영화칼럼 ‘영사기’를 위해서 개봉영화 7편을 보았건만, 그 무슨 영화를 보든 간에 도무지 가을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 호가 낙엽처럼 생명력을 잃어 보인다면, 그건 모두 필자가 심각한 ‘가을무력증’에 빠져 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이번에 쓰고자 하는 영화는 <러시: 더 라이벌>이라는 영화인데, 전설적인 두 카레이서가 경쟁자이자 동반자로서 함께 삶을 경주한 이야기이다. 영화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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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째서 이렇게 간단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면, 다시 한 번 지금은 가을임을 비겁하게 밝혀둔다(삶에서 낭만을 빼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이대로 빠지면 아쉬우니, 영화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꼭 한 번 보시길. 영사기를 위해 개봉영화 7편을 본 영화광이 감히 추천하는 작품으로, 실제 고증이 완벽하고, 70년대의 정서와 분위기가 멋들어지게 배어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러시>를 보고 난 후, 운전을 하고 오면서 자동차에 얽힌 추억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의 암흑으로 흠뻑 젖은 강변북로에서 나는 쳇 베이커의 <You Can't Go Home Again>을 듣고 있었으니, 2013년 10월 24일의 시계는 속절없이 십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십여 년전 나는 난생처음 내 돈으로 차를 샀다. 이름은 ‘뉴 프린스’였는데, 지금은 단종이 되어 그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는 차다. 당시에도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신 왕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뉴프린스는 거의 ‘신하’나 ‘몸종’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그러고 보니 자동차 회사의 이름도 대우였다), 이 차는 원래 대단한 카사노바였던 내 친구가 타던 차로, 녀석은 내게 ‘단돈 50만원만’ 받을 테니 차를 넘기겠노라 했다. 그러면서 녀석은 쓸 데 없는 말을 많이도 늘어놓았는데, 우선 “여태껏 내게 입은 은혜나 우정을 생각하면 50만원도 도저히 받을 수 없으나, 단지 태생적으로 스피드를 사랑하는 자신이 이곳저곳에서 물게 된 범칙금의 합계가 50만원이니 그것만 처리해달라”고 했다. 나는 녀석의 우정이 눈물 겨울만큼 고마워서 그 차를 덥석 사진, 못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내가 끔찍하게도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녀석은 쓸 데 없는 말을 더욱 덧붙이기 시작했는데, “카 오디오가 차 값보다 더 나가는 것이니 재즈를 틀어놓고 난생 처음 보는 여자와 드라이브라도 한 번 하면, 대부분 하루 만에 자기의 여자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녀석은 쳇 베이커의 <You Can't Go Home Again>을 크게 틀어놓고 약장수처럼 차의 장점을 설명했다. 그 중 가장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차의 이름이 프린스, 즉 왕자이고, 색깔이 흰색이라서 덧붙인 말이었다.


“아, 글쎄 여자들이 자지러지면서 ‘백마 탄 왕자’예요? 한다니까. 깔깔대며 난리도 아니야.”물론 당시의 나는 오로지 논리와 객관적 사실, 과학적 토대만을 신봉하던 대학원생이었으나, 무턱대고 녀석의 말에 차를 사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한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말대로, 차 안에서 울려 퍼지는 쳇 베이커의 <You Can't Go Home Again>은 ‘작업송’으로 최고일 만큼 위력적이었다. 문제는 50만 원짜리 고물 프린스에 탄 사람은 정말 곡 제목처럼 자기 맘대로 ‘집에 다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작가라는 탈을 쓰고 밤마다 도심을 질주하며 납치를 일삼는 현대의 하이드씨, 일리는 없고, 당시의 차는 조수석 문이 안에서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약장수처럼 장점만 늘어놓았지, 그 차의 치명적 맹점, 즉 차문이 안에서 열리지 않는다는 ‘부작용’은 쏙 빼놓았다. 나중에 따지자, 녀석은 넉살좋게 차문을 열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쳐주며 또 말을 덧 붙였다.


“마음에 들면 그대로 달려버리라고. 어, 문이 안 열려서 어쩌지? 하면서 말이야.”
 
그 탓에 내가 홀딱 빠졌던 여자는 언제나 내가 문을 열어줘야 차에 타고, 다시 문을 열어줘야 내릴 수 있었다. 이게 부끄러운 표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사실 말이 조수석이지 50만 원짜리 프린스는 일단 이름이 왕자였으니, 녀석의 논리대로 따지고 보면 옆자리는 조수석이 아니라 공주석이었다. 그런데, 공주석이 문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으니 내 체면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바닥 이리저리 굴러다닐 지경이었다. 그 탓에 나는 언제나 어딘가에 도착하면, 운전석에서 잽싸게 내려 공주석으로 후다닥 이동한 후 숙지한 요령대로 문을 밖에서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자 같으면, “어째서, 이 따위 고물차를 끌고 다니는거죠”라며 타박할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언제나 내가 허둥대며 뛰어서 밖에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50만 원짜리 고물차를 끌고 다니는 내가 무안하지 않게 “오빠가 문을 열어주니, 나는 이 문이 이대로 계속 고장 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때는 그녀도 나도 가난했으니, 나는 그 말이 정말로 전액 장학금보다 고마웠다. 

 

지나간 사랑을 두고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건 신사가 할 일이 못 되므로 자제하려 했으나, 나는 결코 신사가 아니므로 말하자면, 그녀는 내가 만난 여자 중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마음이 잘 맞았고, 가장 사랑했던 여자였다. 우리 모두 세월의 매질을 맞아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그 생각만은 변함없다. 어쩌면 이렇게 여기는 데는 고물 프린스를 대했던 그녀의 태도가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늘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영화 <러시>를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가을이라서 지병이 도진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없다. 하지만 변함없는 사실이 있는데, 그건 정말 이름만 왕자였던 고물 프린스를 기분 좋게 타고 달렸던 시절이 있었단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은 종종 내 가슴 안에서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씩씩하게 달려간다. 오늘밤, 고물 프린스는 기름도 닳지 않고, 고장도 나지 않고 그때 우리들이 가지 못했던 흰 모래사장의 해변까지 달려간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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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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