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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명, 북한은 깡패국가가 아니라 자폐국가

영화화된다면, 길모 역에는 원빈이 어울린다 『천국의 소년』은 수학을 향한 애정을 표현한 책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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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의 원작자 이정명. 그의 작품은 역사적 사실에 이야기를 절묘하게 결합했다는 평을 받으며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았다. 이번에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다. 최근 출간된 『천국의 소년』은 21세기 북한의 현재가 배경이며, 자폐아이자 수학 천재인 한 소년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북한 뿐만 아니라 중국, 대한민국, 미국을 횡단하며 벌어지는 스펙타클한 서사는 마치 한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방불케 한다.



2008년에 채널예스와 인터뷰를 했다. 당시에는 사진 공개를 꺼렸다. 5년 전 인터뷰는 어땠나.

채널예스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터뷰를 하고 나면 며칠 동안 고민에 빠진다.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해버린 말과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 말이 오래오래 생각나더라. 기사를 보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고. 하지만 그런 방식을 통해서 독자와 내 생각의 작은 조각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커다란 축복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컴퓨터 모니터에서 내 사진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진을 보면 화들짝 놀라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근황이 궁금하다.

내 생활은 아주 단조롭다. 아침에 일어나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작업실로 나가 하루 종일 머문다. 내내 글을 쓰는 것은 아니고 빈둥거리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딴짓을 하기도 한다. 퇴근시간이 되면 퇴근을 하고 가끔 저녁 운동을 하기도 한다.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 대부분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활이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별을 스치는 바람』이 과거의 이야기였다면, 『천국의 소년』은 현재 이야기다. 현재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

다른 작품들을 과거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해서 쓴 것이 아닌 것과 같이 현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해서 『천국의 소년』을 쓴 것은 아니었다. 다른 소설들처럼 『천국의 소년』 또한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이야기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의 씨앗을 가슴 한구석에 심어 두고 적당한 물과 양분(지속적인 관심과 꾸준한 자료 조사)을 주면 어느 순간 스스로 자라나 꽃이 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 마음의 이야기 정원에는 지금도 싹을 틔우지 못한 씨앗들과 막 움트는 새싹들과 약한 대궁이로 자라나는 이야기들이 있다.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말라 죽어버리는 씨앗과 새싹들도 많고.


자료 조사를 탄탄하게 한 뒤 집필하기로 유명하다. 『천국의 소년』은 북한이 전면에 등장하는 소설이다. 북한에 관한 정보에 접근하기 쉽지 않았을 듯하다. 집필 과정은 어땠나.

북한이란 체제와 그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체제를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꽤 오래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우리시대에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모르는 장소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치 조선시대나, 더 멀리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혹은 로마시대의 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다. 상상의 재료는 결국 탄탄한 사실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팩트에 뿌리내리지 않은 상상은 허황할 뿐이니까. 10여년 이상 북한의 실상과 탈북인 관련 서적과, 신문기사는 물론 다양한 탈북자들의 수기 등 거의 1,000점에 이르는 길고 짧은 자료들을 탐독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몇몇 탈북인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사전 작업이 길어졌지만 그 때문에 집필 과정은 오히려 큰 어려움 없이 진행했다.




주인공인 길모가 수학 천재다. 이야기에 자연스레 수학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정명 작가 전공은 국문학이다. 수학을 이야기에 녹이는 게 북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만큼 쉽지 않았을 듯하다. 원래 수학에 관심이 많았나.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수학은 공포의 과목이었고 수학 시간은 지옥 같았다. 시험을 볼 때마다 전 과목 평균 성적을 20점씩 깎아먹고, 반평균을 떨어뜨리는 골칫거리였다. 직장 생활을 한참 하고 있던 30대 중반 쯤, 우연히 EBS 수능 강좌를 보게 되었는데 마침 수학 강의시간이었다. 학창 시절 그렇게 골탕 먹이던 수학의 정체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해 계속 봤다. 묘한 흥미가 생기더라. 그때부터 EBS 수능강좌의 수학 문제 풀이를 보기 시작했고 수학과 관련된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수학이 이렇게 아름답고 놀라운 학문인가’ 하는 늦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요즈음도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면 교육방송의 수학 문제 풀이를 보기도 한다. 수학이 결코 골치 아프고 지겨운 과목이 아니라 아름다운 학문이며 숫자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청소년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긴박한 전개, 반전 등 ‘천국의 소년’은 마치 영화 시나리오 같았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흥미로울 듯한데. 혹시 영화화 한다면 길모나 영애, 날치, 윤소장 역에 어떤 배우가 어울릴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천국의 소년』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구체적인 배역을 생각해보지는 않았는데 원빈씨의 순수한 눈동자가 기억에 남아 있다. 날치 역을 생각하니 조정석씨의 장난스런 표정이 떠오르고 윤소장을 생각하면 김윤석씨의 능글거리는 얼굴이 떠오른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당사자들께는 죄송하다. (웃음)


프로필 사진이나, TV에 출연한 모습을 보면 검정 계통의 어두운 색을 선호하는 듯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꼭 검은 옷을 입으려 한 것은 아니다. 편한 옷차림을 좋아하다보니 정장이라고는 봄, 가을, 겨울 공용의 검은 정장 한 벌이 전부였다. 15년 쯤 전에 어떤 면접을 위해 샀는데 정장임에도 편해서 행사나 중요한 자리에 입고 나가다 보니 특별히 검은색을 선호하는 것처럼 비취진 것 같다.


소설이 북한에 관한 이야기다. 현재 남북 관계나 동북아시아 정세를 어떻게 보나.

길모와 그의 행로는 북한이라는 나라의 폐쇄성과 고립성을 드러내는 설정이다. 하나의 국가, 혹은 체제와 한 개인을 비유하는 것이 온당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국제사회에서 흔히 북한을 ‘떼쓰는 아이’나 ‘깡패국가’로 비유하는 것처럼 ‘자폐국가’라는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해보고 싶었다. 주인공 길모는 일반인들이 느끼는 인간 본연의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북한은 국제 사회와의 교류를 거부하거나 서툴고, 대화를 하더라도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폐적 성격을 지닌 체제다. 상하이, 마카오, 서울, 뉴욕에 이르는 길모의 여정은 자폐의 공화국인 북한이 다양한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하며 인생과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길들여야 할 깡패국가’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할 버릇없는 아이’라는 시선 대신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북한과 대화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다음 작품은 어떤 이야기인가. 다음 작품이 아니더라도 꼭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덤으로 독자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도 함께 얘기해 달라.

앞서 밝혔듯 나의 생각의 정원에는 수많은 이야기의 씨앗들이 뿌려져 있다. 온도와 습도, 햇빛의 양에 따라 어떤 씨앗이 먼저 싹을 틔우고 열매 맺을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 씨앗들과 새싹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과 양분을 제공하고 지켜보고 있는 일뿐이다. 그러다 보면 꽃을 피우려는 씨앗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 꽃을 독자들보다 조금 먼저 바라보고 그 꽃의 향기와 냄새와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정원사이고 싶다. “주인님! 오래 전에 정원 모퉁이에 심어 두었던 씨앗이 오늘 꽃을 피웠습니다. 그 꽃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채널예스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소개 부탁한다.

훌륭한 책들이 너무도 많지만 몇 권만 소개하자면.
1. 아홉번째집 두 번째 대문(임영태)은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상처와 치유가 함께하는 삶의 단면을 보고 말았다.
2. 화첩기행(김병종)은 그림을 통해 글의 싹이 돋아나고 글이 다시 그림을 부르는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3. 왕의 하루(이한우)-역사의 책갈피에 잠자고 있던 한 순간을 날카로운 통찰과 박력있는 문장으로 단칼에 잘라 선연하게 보여주었다.
4. 나의 안토니아(윌라 캐더)-황량한 불모지에서 펼쳐지는 거친 과거의 삶속으로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5. 도구와 기계의 원리(데이비드 맥컬레이)-바퀴와 도르래와 나사와 스프링과 파동과 전자로 이루어진 모든 기계와 도구의 작동원리를 설명한 책. 생각이 복잡할 때 이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해진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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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소년 이정명 저 | 열림원
조용한 주택가에서 일어난 한밤의 살인사건, 현장에서 체포된 단 한 명의 용의자, 묵비권을 행사하는 용의자와 조사관들의 치열한 두뇌싸움. 그는 과연 냉혹한 살인자인가? 순수한 수학 천재인가? 오로지 수를 통해서만 세상을 해석하고, 수식을 통해서만 인간을 이해하고, 수학 퍼즐을 통해서만 타인과 교류하는 자폐증 수학 천재.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그가 왜 냉혹한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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