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강릉. 강릉의 늦가을. 사람들은 그 즈음이면 옷으로 몸을 불리지만, 나무들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 잎과 열매를 떨어트린다. 단순히 온도가 내려가는 것 이상으로 계절은 혹독함을 드러낸다. 그러니 나무들이 자신의 일부를 버리게 만들겠지. 그래서일까. 누군가는 계절이 흔들릴 즈음, 그동안 움켜줬던 것을 놔버리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은 더 움켜쥐려고만 하지만.
시월의 커피향(시월의 강릉에는 커피 축제가 있었다!)이 빠졌을 무렵,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강릉을 찾았다. 계절과 계절 사이 서성이는 쓸쓸함 때문이었을까. 흔들리는 계절에 맞닥뜨린 어떤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술 마시다말고 강릉에 한 달음에 달려가던 한 남자가 떠올랐다. 강릉에 사는 여자와 보고 싶다며 전화를 나눈 직후였다. 택시를 모는 친구를 급히 불렀다. 강릉까지 내달렸다. 가로등이 비치는 어느 밤길. 여자는 기다리고 있었고, 택시에서 내린 남자는 와락 여자를 안고 외친다. “좋다.” ‘보고 싶다’와 ‘좋다’, 사랑은 그것으로 충분했던 기억. <봄날은 간다>의 은수(이영애)와 상우(유지태)의 이야기다.
그들, 강릉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떠올랐다. 허나 내가 만나러 가는 그녀는 지금 세상에 없다. 그런 여자를 만나러 가겠다니, 친구는 한 마디 툭 던진다.
“노총각이 청승 떨고 자빠졌네.” 그래, 청승이면 어떠랴. 날이면 날마다 오는 청승도 아닐 터. 계절도 청승떨고, 나도 청승떨고. 세상은 청승에 관대할 필요가 있다. 청승 없는 세상은 효율과 능률만 따지는 냉랭한 세상이니까. 사랑도 그렇고 관계도 그렇다.
11월 26일의 강릉길, 세상에 없는 여자, 조선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을 만났다. 허난설헌(1563~1589). 스물일곱에 요절하고야 만 당대의 천재 문인. 말도 안 되지만, 그녀는 어쩌면 해외 천재 뮤지션들(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스물일곱 요절 역사의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허균의 누이가 일곱 살에 능히 시를 지었으므로 온 나라에 여신동이라 불렸다. - 중국 <양조평양록> -여덟살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을, 이런 시어를 어떻게 뽑아 올렸는지 세상 사람들은 짐작이나 하겠는가.
하늘이 내린 시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네. (p.41)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난설헌』의 최문희 작가와 독자들이 함께 하는 문학기행. 강릉에서도 아름답다고 알려진 초당마을. 허난설헌의 생가터가 있는 마을이었다.
도착해서 처음 만난 것은 역시나 점심. 허기진 배를 채우고 볼 일이었다. 직접 만든 두부로 선보이는 순두부집, 토담순두부. 두부 맛, 일품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표현을 따르자면,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를 하고 먹는 두부다. 하루키는 브랜드 찍힌 포장두부를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를 하지 않고 두부를 먹는 것이라고 했다.
한 브랜드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지금의 한국 포장두부 시장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두부의 맛보다는 두부의 포장지에 찍힌 브랜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황교익,
『한국음식문화박물지』 p.202)
‘식후경’이 있는 곳, 허난설헌 생가터로 향한다. 어떤 공간이 그녀를 만들었을까. 문화관광해설사가 나섰다. 눈이 왔으면 더 좋았을 풍경, 400여 년 전 허초희(허난설헌의 본디 이름)가 유년 시절 살았던 공간이다. 그러나 허초희의 흔적은 없단다. 생가는 이미 없어졌고, 현재 남은 생가터는 180여 년 전에 복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찾아야 하는 초희의 흔적.
그녀의 가문은 고려시대부터 명문가였다. 서경덕에게 사사 받은 그녀의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다. 지금으로 치면 야당의 총재. 대중에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가장 많이 알려졌으나, 허엽과 그의 자제들은 하나같이 명문장가였다. 초동 허엽, 악록 허성,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 그들은 허씨5문장으로 불렸다. 초당마을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허씨5문장 시비’가 세워져 있을 정도다.
“이들은 문장 뿐 아니라 DNA도 좋다. 아들 셋이 대과에 합격했고, 난설헌도 대과를 볼 수 있었으면 장원급제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를 누리다가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폭삭 망했다. 난설헌은 이곳에서 6~7년을 살다가 8살에 서울로 올라갔다.”
저기 백일홍 나무가 보인다. 최문희 작가가
『난설헌』을 쓴 계기. 백일홍의 이미지와 난설헌의 분위기가 엇박자였지만, 긴 시간 작가의 머릿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줄기로 매김질했다.
『난설헌』의 탄생설화(?)를 만든 것이라고나 할까.
몇 해 전, 강릉 초당(草堂)마을에 갔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소박한 기와집은 허난설헌이 어린 날 꿈을 키웠던 생가였다. 고택의 대문을 넘는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백일홍나무였다. 조금 뜻밖이었다. 작약이나 목련나무로 연상되었던 난설헌의 이미지와 동떨어졌기에 그랬을까. (p.376)
백일홍,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다. 꽃말은 인연. 난설헌과 최문희 작가를 이어준 인연. 난설헌과 우리를 이어진 인연. 껍질이 늘어진 백일홍 나무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나무껍질이 없는 것은 백일홍만이 가지는 결곡함, 깨끗함, 감싸지 않는 남루함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 아니겠는지요. (p.304)
난설헌의 詩는 213수가 남아 있다. 그것을 통해 스물일곱의 삶을 추적하고 추정할 뿐이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음에도 조선시대 여자가 처한 한계 때문에 피어나지 못한 백일홍. 처마 끝에 걸린 하늘도 그 슬픔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녀의 시를 보면 유교사회에 대한 저항의식도 볼 수 있다. 여성으로서 가진 자주의식이나 평등의식과 같은 것도 있고. 동생인 허균도 개혁주의자였다. 양명학, 불교, 천주교를 섭렵하고. 이들에겐 시대사주가 맞지 않았던 것 같다.”그들은 아마도 세상을 뒤엎고 싶었을 것이다. 나름 기득권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더 큰 꿈이 있었음이리라. “이 나라 주인이 어떻게 왕이냐, 백성이지!”라던 허균의 일갈을 보면 그들은 개혁보다는 혁명주의자가 아녔을까. 그러나 이 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혁명다운 혁명을 허락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들이 품은 혁명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어쨌든 제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들을 낳아도, 역적으로 몰린 집안은 복원되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서야 복원 움직임이 일었고, 강릉시도 별장지였던 허난설헌 생가터를 사들여 그녀의 생각과 이상을 떠올리고 있다.
여자들이 사는 안채를 둘러보면, 난설헌의 영정이 있다. 그 정확한 모습은 없다고 한다. 서구적이며 아름다웠다는 기록만 있을 뿐.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잣대는 다르지만 단순히 예쁘다, 귀엽다는 차원이 아닌 총체적인 미(美)를 아우르는 표현이 아름다움이 아닐까. 정갈하게 다듬어진 외모와 빛의 알갱이처럼 영롱한 영혼의 소유자, 세속에 때묻지 않은 순수, 원망이나 미움, 화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당겨, 시라는 문자를 통해 여과시켰던 난설헌이야말로 아름다움의 표상이었다. (p.375)
허나, 그 모습을 상상해서 그렸을 영정은 다소 생뚱맞다. 스물일곱에 요절한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라 보기엔, 늙고 지나치게 정숙해 뵌다. 저건 스물일곱, 한참 물이 오르고 있을 농익은 여인이라기보다 신사임당급의 자애로운 어머니상에 가깝다.
최문희 작가도 한 말 거둔다.
“27살에 돌아가셨는데, 너무 늙어보이고 옷도 촌스럽다.” 살아서도 억압받던 난설헌은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은 건가. 왜 그녀를 가두려고 하는가. 그녀는 날고 싶은 자유로운 영혼이었을 텐데…
그미는 가슴으로, 머리로 시를 쓰고 읊조렸다. 아이를 안은 채 오색구름 위를 날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자유자재로 영혼의 나들이를 한다. (p.232)
난설헌의 자유로운 영혼은, 집안 가풍과 큰 관련이 있으리라.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아버지 허엽은 인간의 자유로운 심성을 강조하는 도가를 연구한 서경덕의 제자였다. 허엽은 부인이었던 청주 한씨와 사별하고 허난설헌 남매의 어머니와 혼인을 맺었다. 그리고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낳았다. 이들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난설헌의 오빠 봉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문장에서 큰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늘 “넌 두보를 능가할 시인이 될 것”이라며 그녀를 독려하고 아꼈다. 조선시대는 딸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시대였다. 그러나 봉은 그것을 무시했다. 친구인 손곡 이달에게 부탁해 난설헌이 시를 배우게 했다.
난설헌은 이달을 통해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를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 여성으로선 체험할 수 없던 사회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키웠다. ‘난설헌’이라는 호도 그러니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미모와 문장이 뛰어난 사람에게만 붙여준 것이다.
그러나 난설헌 스물여섯, 그토록 자신을 아끼던 오빠 봉이, 그전에 아버지가 객사했다. 상심이야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었으리오. 그녀에게 닥친 고통과 상심이 그녀의 삶을 깎아먹었을 것이다. 출세 못한 남편과 그녀는 불화했고, 그녀가 낳은 아들과 딸은 어린 나이에 어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이십대의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고통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했던 오라버니다. 높은 기개와 재기가 하늘을 찔렀고, 한 시대를 뛰어넘는 진취적 사고가 주변 사람들에게 껄끄럽게 보였던 모양인가. (p.226)
난설헌의 시비를 보았고 난설헌의 동상을 보았다. 여자의 재주가 넘친 것도 죄가 된 세상이라니.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마냥 좌절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녀가 남긴 詩가 그것을 증명한다. 깊어진 시심과 단단해진 시어로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승화했다.
헌데, 동상 역시 영정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제대로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것 같다. 2년 전 공모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데, 작가는 한 마디 또 거든다.
“미인이며, 의식도 깬 사람이었는데, 왜 저리 고전적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나이도 들어보이고 처음엔 신사임당인 줄 알았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작가와 독자가 한데 모여 이야기를 풀었다. 작가가 왜 400여 년 전에 떠난 난설헌을 지금 꺼냈는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었는지를 말했다.
작가가 난설헌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지난 2006년이었다. 그 전에 여행을 하면서 난설헌의 詩를 읽고 난설헌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난설헌과 그녀의 詩를 연구한 문헌을 찾아 읽었고, 그녀가 대단히 어려운 삶을 살았음을 알았다.
“집안은 몰락했고, 남편은 외도를 일삼았으며 시어머니의 정신적 압력도 상당했다. 자식들도 먼저 보내야했다. 그런데 원망하는 詩를 쓰지 않았다. 그녀 詩의 모티브는 자연, 자유였다. 궁극적으로 원한 건 영혼의 자유가 아니었을까. 고통, 고독, 통증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시인도 있었는데, 내가 높게 본 것은 난설헌이 추구한 영혼의 자유와 균열을 리모델링한 점이다.”조선여인은 한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남성중심사회, 여성은 모든 면에서 억압 받았다. 이전 모계사회의 방만한 기질을 유교와 도덕성의 덫으로 억압했다. 영혼의 ‘전족’과도 같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건, 예외적으로 기방에서나 허용된 일이었다. 좋은 부모님이나 문화적 기반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선택지는 무척 좁았다. 그런 면에서 허난설헌은 운을 타고 났다. 재능과 노력도 그만큼 따랐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남존여비의 금기와 제재가 여자들이 입에 재갈을 물렸다. 여자가 글을 밝히면 팔자가 드세다는 속설 또한 여자들의 지적인 갈망에 족쇄를 채웠다. (p.58)
“당부하고 싶은 건, 시간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시간의 흐름에 우릴 방치해선 안 된다. 책을 많이 읽고, 어떻게 하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인생을 위해 살아 주십사 하는 거다.”
“시인 난설헌은 성공했다.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에도 읽히고 후세에도 읽힌다. 그러나 여성 난설헌은 3가지 고통이 있었다. 아버지 허엽은 성품이 강직하고 단호하다보니 원수가 많았다. 원수 한 명이 난설헌에게 복수를 했다. 시집가기 직전, 녹의홍상을 뺏어 미신적 저주를 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이 초희에게 되돌아온 셈이다.”두 번째 고통은 존엄성이 무시당한 것이었다. 작가는 행간에 그것을 불어넣고자 했다. 관계를 구축할 때 필요한 것이 존엄성이나 난설헌은 시어머니로부터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꾸중하는 것은 대수요, 며느리에게 콩나물 기르는 물을 끼얹기도 했다. 난설헌으로선 참기 힘든 굴욕이었으리라.
“그러나 난설헌은 자신을 존중했다. 죽기 3개월 전 곡기를 끊고 목욕재개하면서 수의를 입은 것도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자신에게 스스로 질서를 부여함이었다. 그렇게 매순간 자신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마지막으로 친정의 몰락. 아버지 허엽의 객사로 인해, 시부모는 도도한 양반이 객사했다며 비하감을 안겨줬다. 남편 김성립은 아내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고. 자존감의 비하가 난설헌에게 가해진 고통이었다.
여자의 정조가 그처럼 완강하게 보호받고 지켜지기를 바라는 만큼 여자의 심성이나 마음도 소중하게 가꾸어지고 갈무리되는가, 그건 저버리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마음이나 감정보다 더 귀하고 중히 여기는 정절이라는 괴물이 가슴을 물어뜯었다. (p.93)
독자의 질문이 있었다. 실존인물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허구로 꾸며진 것이 무엇인지.
“고증자료가 부족했다. 허엽의 막내딸, 27에 요절한 천재시인, 가족관계, 8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짓고, 15살에 결혼을 했다는 외에 자취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소설세계에서 허구는 허락된 것이다. 역사적 골격은 있으나 캐릭터나 이야기는 허구다.”글쓰기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글쓰기 기초는 바라보기, 말걸기, 정리다. 바라보기는 한 구석에 앉아 관찰해라. 매순간 관찰하고 기록해라. 목표를 세우면 나를 다독거리고 돋아줘야 한다. 나는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되,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독서를 꼭 해야 한다. 글쓰기 100중에 다른 사람의 책 읽는 것이 70이다. 두뇌를 활용해서 독서를 해야 하고, 자신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어머니가 노동하고 있으면 도와야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고. 결혼해서도 부모 그늘에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람이 많이 혹은 세게 부는 초당마을이라고 했다. 희한하게도 그날은 바람이 잦아들었다. 우리의 방문을 알아차린 난설헌의 배려였을까. 그녀는 아직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얼마 전 읽은, ‘봉빈’의 이야기와도 겹쳐졌다. 세종의 며느리였지만, 자신의 사랑과 욕망에 솔직했던, 그래서 사랑 때문에 죽어야했던 여인의 이야기,
『채홍』(김별아 지음).
억압받던 것들의 귀환이다. 반갑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늘이라는 위치를 확보해놓은 지상의 행운아들”이 꾸민 계략에 유폐됐던 여자들. 순종적인 현모양처라는 아름다운 동화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또한 생에서 실종됐던가.
그러니, 우리는, 아니 정확하게는 수컷들은 좀 더 많은 것을 놔버려야 한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야했던 여자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그러면 우리는 오래된 예전의 온화함과 따스함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놓아야 할 시간. 문학적 가치를 떠나, 난설헌과 봉빈의 귀환이 반가운 이유다. 그들을 ‘와락’ 안고 싶다. 은수와 상우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다시, 백일홍이 꽃 필 계절을 나는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