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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왜곡은 한국을 무시하는 것” - 『인정투쟁』 문성훈

왜 우리는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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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가 터졌다. 금권으로, 권력으로 억지 눌렀던 사회적 부조리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장애인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이 사건의 액면이지만...


‘도가니’가 터졌다. 금권으로, 권력으로 억지 눌렀던 사회적 부조리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장애인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이 사건의 액면이지만, 그 속엔 지금 이 사회가 품고 있는 제도적 폭력과 무시의 문제가 있다. 무시가 일상화된 사회였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장애인 학생들에 대한 신체적 훼손은 물론, 무시(모욕?멸시), 인권 침해는 ‘무시의 그물망’이 빚은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댄다.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몸짓이다. 하물며 구체적 인간이 지닌 존엄을 그물망으로 가둔 현실에 숨죽여 있을 수만은 없다. 반드시 반응해야 한다. 도가니를 고발하고 알려, 또 다른 도가니 현장을 막기 위해서다. 지금 필요한 건 뭐? ‘인정투쟁’이다.

지난 22일, 서울 서교동 한국출판인회의 강당. 번역자인 문성훈 교수와 함께하는 ‘『인정투쟁』 읽기, 한국사회 읽기’ 강연회가 열렸다. 인정투쟁의 개념과 지금의 한국사회를 ‘인정투쟁’의 열쇠말로 읽는 시간을 중계한다.


저자, 악셀 호네트는 누구인가?


악셀 호네트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레떼르는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 대표자’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0년대 태동한 독일의 학자집단이다. 생산, 문화, 개성 등을 연구 분야로 설정하고 철학 중심의 학제 연구를 하는 지적 전통을 가졌다. 특히, 비판이론을 연구, 명망을 얻었다. 비판이론은 말 그대로, 사회를 비판하는 연구다. 사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연구할 뿐 아니라, 운영에 정당성이 있는지 규범적으로 질문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초기, 호르크하이머의 논문 『전통이론과 비판이론』(1937년)이 선언문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이성과 자유가 실현된 대안적 사회를 이론적으로 모색했고, 이를 방해하는 사회현상을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연구가 이뤄졌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를 1세대로 본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히틀러의 박해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미국을 좋게 봤기 때문은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미국을 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했고, 나치즘의 위험성을 설파했다. 이 시기에 나온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1947)은 고도문명사회에서 나치즘, 독점자본주의, 소련의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등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파고들었다. 문명의 기원을 따지고 계몽의 시대를 연구했다.

“1세대는 한계가 있었다. 도구적 합리성이 고도로 발휘되는 사회라고 봤지만, 대안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이론적 염세주의로 빠져들었다. 현대사회를 비판하되, 대안적 방향에 대해선 얘기를 못했다. 그래서 2세대는 1세대가 남겨둔 숙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1981)이 2세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재활성화를 통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극복을 꾀했다. 그러나 3세대는 달랐다. 악셀 호네트는 하버마스와 다른 관점을 가졌다. 그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의해 현실이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다. 이를 부정한 것은 아니나, 언어적 상호작용으로 포섭될 수 없는 사회적 상호작용이 있다고 봤다. 인정과 무시를 둘러싼 사람 간의 상호작용이 그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세대별 특징을 요약하자면, 1세대는 도구적 합리성, 2세대는 의사소통적 합리성, 3세대는 인정과 무시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문 교수는 인정과 무시를 둘러싼 개념에 관심을 가진 악셀 호네트의 개인적인 배경을 언급했다.

호네트는 공업단지이자 탄광이 있던 에센지역에서 자랐다. 이곳에서 이주민 노동자를 경험했다. 노동력이 부족해서 초청한 ‘손님노동자’였다. 그럼에도 손님을 환대하지 않았다. 이른바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그들은 문화적 편견, 출신지역에 대한 무시나 평가절하로 냉대를 받았다. 호네트는 그런 것과 더불어 이주노동자의 울분을 봤다.


인정투쟁에 나선 노동자들


“요즘 이주노동자를 둘러싼 저항이 유럽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영국에서도 있었고. 이들은 이주노동자 2세대인데, 1세대와 경험이 다르다. 사회적 무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동일하나, 1세대는 생계유지엔 큰 문제가 없었다. 열심히 일하면 고국에 사는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는 살만 했다. 그러나 2세대는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무시에서 더 나아가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됐다. 경쟁 상대는 본국의 사람들이었고. 일자리를 빼앗고 생계까지 위협받아서 폭발의 가능성까지 가지게 됐다.”

문 교수는 다만, 이것을 사회적 무시 때문에 촉발된 사태나 폭발이라고 말할 순 있어도, 인정투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 폭동이 사회적 인정 관계를 재편하거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목적의식을 가진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를 살펴보자. 우리에게도 인정과 무시를 둘러싼 이야기가 많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와 같은 말이 귀에 익었다. 술집에서 싸울 때 흔히 터져 나오는 말도 있다. 날 뭘로 보는 거야?

“사람들이 사회적 유대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기대를 한다. 누구나 사람은 자기 이해를 갖고 있다. 난 어떤 사람이야, 라는 자기의식을 갖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 그런데, 날 나쁘게 대우하면 울분이 생긴다. 날 부정하는 거니까. 그래서 사소한 말다툼에서도 나의 의식을 건드리면 싸움이 커진다. 싸움은 사소한 데서 발생하는데, 개인의 자기의식을 건드릴 때 싸움이 커진다.”

문 교수가 대표적인 인정투쟁의 사례로 든 것은, 1970년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 당시 전 열사가 언급했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외에 또 하나인, “나는(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사용자는 노동자를) 기계처럼 취급하느냐는 의미였다. 노동자들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당하는 현실을 겪었다. 전태일, 즉 노동자는 자기의식을 침해당한 거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것,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어 1987년, 노동자대투쟁. 노동자들이 다시 폭발했다. 역시 인정투쟁이었다. 한 노조 지도자에게 왜 투쟁에 나섰는가 물었더니, 이런 답이 나왔다고 한다. “노동자들을 발가락에 낀 때만큼 대우하지 않아서 분노했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 인간적 무시와 멸시에서 생활했던 노동자들이었다. 분노는 당연했고, 투쟁은 나름 성과를 거뒀다.


비정규직이여 분노하라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문 교수의 진단에 의하면, 노조들은 성장했으나, 노동계 내부의 세력분열이나 계급분열이 일어났다. 비정규직은 똑같은 일을 하나 동일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비정규직에 대한 무시다. 문 교수는 인정투쟁의 양상으로 표출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촛불시위 때를 떠올려보자. 이때 가장 많이 나온 얘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였다. 이런 말이 나온 배경은 간단하다. 국민은 대한민국 주권자로서, 주권자의 뜻에 따라 대한민국이 운영돼야 함에도, 위정자들은 이에 반했다. 국민들은 주권자로서의 자기의식을 부정당했다. 촛불시위가 인정투쟁의 양상을 보인 이유다.

문 교수는 안철수 신드롬에 대한 언급도 꺼냈다. “안철수 신드롬은 일종의 제도권 정치에 대한 염증이다. 왜 염증을 느꼈겠나. 촛불시위와 같은 맥락이다. 한국은 대의민주주의인데, 제도권 정치가 민의에 따라 정치를 하지 않는다. 이합집산 등을 하면서 정치가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복종하라고 강요한다. 안철수 신드롬은 사회적 무시가 내포돼 있는 현상이다.”

문 교수가 인식하고 있는 한국사회는 무시가 팽배한 사회고,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무시하고 무시당하는, 무시의 그물망으로 덮인 사회다. 돈 없다고, 못생겼다고, 명문대 못 갔다고, 동성애자라고, 강남 안 산다고, 시골 산다고… 수도 없이 많다. 누구도 무시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시가 팽배한 사회다.

“한국사회 구성원이 느낄 수 있는 울분이 있다면, 무시 때문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하도 무시해서 그 무시가 내면화한 것 같다. 식민지 통치를 경험한 나라는 사회적 무시를 경험한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건, 한국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거다. 열등감을 갖게 하고, 긍정적인 인식을 못 갖도록 하는 거지. 식민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은 자꾸 무시당하면 결국 자신을 무시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인정,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


문 교수가 이어 살펴본 것은 인정과 무시의 일상적 의미다. 현존과 관련한 인정과 무시의 경우를 보자. 첫째, 있는데 없는 취급을 하는 것. 그게 무시다.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 무시의 전형이다.

둘째는 동등성과 관련된 것이다. 여러 가지가 달라도, 똑같이 인간임을 전제로 한다. 셋째는 차이다. 인간은 개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데, 차이로 우열을 가르는 것이 무시의 경험이다. 반대로 상대방의 차이도 나의 차이만큼 가치 있다고 얘?하는 것이 인정이다. 호네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여기까지다.

거기서 끝은 아니다. 넷째가 있다. 우월. 우월성과 관련해 인정과 무시를 사용하는데, 가령 자신이 남보다 낫거나 잘났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함은 인정투쟁이론이 포섭하는 인정 현상이 아니다. 우열은 능력의 문제로, 공정한 경쟁의 룰을 설정하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

문 교수는 진리의 문제를 꺼내들었다. “어떤 사안을 맞다고 주장하면, 옳고 그름을 따져볼 수 있다. 이것은 진위판단의 문제지, 인정의 문제는 아니다. 근거를 통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인정과 무관하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말했을 때, 아무 반응도 않는 건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다.” 진리의 문제에도 인정과 무시가 끼어들 수 있는 경우다.

인정과 무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사회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기본적인 태도는 인정 관계다. 문 교수는 단정한다. 인정관계가 없으면 사회가 형성, 유지될 수 없다.

왜냐. “여자와 남자가 있다. 남편이나 아내로 인정하지 않으면 부부관계가 형성 안 된다. 학생으로,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사제관계가 아니다. 실질적인 인간관계는 서로 인정해야 사회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다. 인정이 토대가 돼야 한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산다는 건, 그냥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호인정 관계에서 자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한 자기의식, 상대방으로 인정받은 정체성을 실현하는 과정이 삶이다.” 말인즉슨,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삶.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삶이 자아실현이다.

“인간의 삶은 생물학적인 생명의 보전만으론 파악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사는 것이고, 생명유지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지 못하면 사회적 죽음이고, 사회적 죽음은 곧 심리적 죽음이다. 이렇게 삶을 이해한다면 인정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인정의 도덕적 의미다. 이걸 얘기하기 위해서 도덕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도덕이 왜 필요한가.”


인정투쟁의 이유


사회질서는 왜 유지되어야 할까? 무질서하면 안 될까?

문 교수는 그 이유를, 사회질서가 유지하지 못하면 나의 삶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의 삶이 타인으로부터 침해받을 수 있다는 이유. 곧, 도덕의 기능적 의미는 개인의 삶을 외부의 침해로부터 보호하는 장치다. 어떤 규범내지 의무, 행동이 타인의 삶을 외부의 침해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 규범, 의무, 행동은 도덕적이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을 인정하는 것은 도덕적일까?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침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경험한다. 나의 특징, 속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광범위한 인정을 경험하면 스스로도 귀하고 가치 있게 여긴다. 스스로도 인정한다. 타인의 인정을 누적적으로 경험하면,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 타인의 인정은 무엇을 만드나. 긍정적 자기의식을 만들 수 있다.”

인정의 도덕적 효과다. 타인의 인정을 경험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자기의식을 갖게 됨은 물론 적극적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타인의 인정은 다시 말해, 긍정적인 자기실현의 조건이다. 행복 또한 마찬가지다. 인정은 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다.

“타인을 인정하는 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아본 적이 없고 무시당했다면,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 없다. 끊임없이 자신을 비하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적극적인 자아실현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행복한 삶은 가능할까. 타인을 무시하는 행동은 당사자에게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없게 하고 그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

다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인정과 무시를 도덕적 차원에서 본다면, 어떤 사회가 도덕적으로 발전한 사회일까? “많은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사회다.” 우리 사회는, 문 교수의 지적처럼 사회적 무시가 팽배한 사회, 구성원들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6년째 자살률 1위의 비극이 그것을 방증한다. 건강한 사회는 구성원들이 긍정적 마인드로 스스로를 실현하려는 사회나, 한국사회는 그렇지 않다.

호네트는 도덕적 발전의 방향에 대해 인정이 확대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동등함을 향유하는 사회, 개성이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는 사회, 보편성과 특수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확대된 사회. 인정투쟁은 그런 사회를 요구한다.

“인정투쟁은 사회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정질서를 만들기 위한 투쟁이다. 나를 무시한 사람을 없애기 위한 게 아니라 새로운 인정관계를 만들기 위함이다. 사회적 무시를 경험하면 울분을 가지게 되는데, 무시당해도 싸다고 여기면 저항이 없다.”

문 교수는 주격 나와 목적격 나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인간은 도덕적 울분을 겪으면, 주격 나와 목적격 나의 대립이 일어난다. 사회적으로 나에 대해 생각하는 상이 있다면 목적격 나고, 사회적 무시에 대해 울분을 느끼는 나는 주격 나다. “주격 나와 목적격 나는 다르다.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모습과 그것을 거부하는 나는 다른 존재다. 인정투쟁은 내가 발전된 자기의식이고, 인정받고자 하는 바를 알아내고 표현할 수 있다면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지금은 무시당하지만 미래의 새롭고 발전된 사회를 그리고 확신할 수 있다면, 인정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미래의 사회적 인정을 선취하는 것이다. 인정투쟁이 성공하면 제도화된다.”

사회운동의 새로운 동력, 인정 투쟁


전통적 의미의 사회운동은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독재 등이 대상이었다. 새로운 사회운동은 달랐다. 집단적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여성 권익 등 사회적 소수자가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했다. 문 교수는 이것이 신사회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사회적 무시는 경제적 배경이 있을 수 있다. 분리된 게 아니다. 정치적인 문제와 분리된 것도 아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직장 등에서 낮은 대우를 받는 이유는 뭘까. 여성의 정체성을 폄하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경제적 질서와 무관하냐. 아니다. 여성노동자는 이중 착취를 당한다. 인정과 분배는 결부돼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특정한 인정질서를 전제하고 있다.”

문 교수는 이어 한국사회는 새로운 인정투쟁이 이뤄지고 있으며, 5대 인정과제를 덧붙였다. 가장 먼저, 친밀성 영역. 남녀관계는 1990년대부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문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과거 역할분담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이혼율이 급격히 높아졌는데, 이유는 애정이 식었기 때문이다. 앞선 시대, 역할분담 관계를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맺어졌으나 시대가 변했다.

여성이 직장을 갖게 되고 전통적 역할분담 관계가 깨지고, 사랑이 중요해졌다. 이혼율의 증가는 이것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 문 교수의 분석이다. 지금은 결혼 따로, 애정 따로의 과도기적인 과정이라는 것. “서로를 어떤 존재로 인정해야 하는지 중요한 변화가 있다. 여성으로서 역할을 잘 하느냐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존재로 인정받고 인정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인정할 수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정치적 영역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참여 민주주의로의 요구가 강화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촛불시위 등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경제적 영역에서는, 산업자본주의에서 노동시장이 유연화 되는 유연성 자본주의로 넘어가고 있다. 정규직이 줄고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시기로, 자동화 때문에 노동자가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되고 있다.

문화적 영역에서는 동질성으로 이질성의 포용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사회적 소수자의 등장이 주된 요인인데, 이들이 인정받기 위한 욕구를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세계적 영역에서는 세계화가 열쇠말로, 국가 관계에서 세계 공동체로 변하고 있다. 개인은 국적을 가진 구성원이라기보다 탈국적적 존재로 대우받기를 원하고 있다.

“키워드만 ?기했는데, 이걸 유념해서 생각하면 뭔가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각 시대마다 인정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새로운 인정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회적 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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