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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경지를 보여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의 작가, 故 최성일

그의 잔소리가 그리워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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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책을 그저 상찬하지 않는다. 칭찬 일색인 리뷰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아홉을 칭찬해도 한 가지 지적 정도는 잊지 않는다.

최성일은 기술자다. 그가 미장기술이 있거나 도배기술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로 말하자면 웬만하면 몸을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 스포츠도 직접 하기보다 관람을 즐기는 책상물림이다.

그럼에도 기술자 운운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는 세상에 글 쓰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 했다. 예술가와 기술자. 글을 쓴다 해도 둘의 차이는 뚜렷하다. 예술가는 쓰고 싶은 글을 쓴다. 기술자는 청탁받은 글만 쓴다. 예술가는 마감을 절대 안 지키고 기술자는 마감을 칼 같이 지킨다. 그의 지론에 따르자면 그는 기술자다.


최성일은 기술자다

그는 ‘지방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저널> 기자를 시작하며 북 리뷰와 시평을 쓰는 출판평론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자신을 평론가라기보다는 서평가로 생각했다. 엄밀하게 말해 자신이 하는 일은 ‘정보가공업’에 가깝다고 했다. 책에 관한 글을 쓰는 출판평론가는 출판의 영역에서는 전문가일지 몰라도, 책의 영역에서는 전문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 예술, 인문 등 해당 분야에는 전문가들이 존재하고 책이란 그런 전문가들이 쓴다. 출판평론가가 모든 분야의 책을 아우르는 르네상스인이 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출판평론가는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최성일은 ‘책에 투항하느냐 투항하지 않느냐, 곧 비판적인 독서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 짓는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책을 그저 상찬하지 않는다. 칭찬 일색인 리뷰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아홉을 칭찬해도 한 가지 지적 정도는 잊지 않는다. 호시노 미치오의 『여행하는 나무』가 솔직하고 담백하며 대자연에 대한 경외를 보여준다고 해놓고 책 속에 담긴 경어체를 꼬집는다. ‘나는 서간문체의 상투성과 뭔가를 감추는 듯한 경어체 문장의 겉치레가 싫다.’ 예병일의 『내 몸 안의 과학』의 리뷰는 첫 문장부터가 심상치 않다. ‘첫 페이지에 오탈자가 있는 책의 첫인상이 좋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숱한 필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레닌』처럼 그가 작심하고 ‘조진’ 책은 논란이 컷다.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은 그의 이런 장점과 단점, 장기와 한계가 모두 담긴 역작이다. 그의 표현대로 기술자가 주어진 주제 안에서 마감을 지키고 성실하게 글을 쓰다 보면 예술가는 못 되더라도 장인의 경지에는 오를 수 있음을 보여준 작업이다. 『책만사』의 시작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서신문>을 시작으로 <반갑다 논장>을 거쳐 예스24 웹진 <북키앙>과 <채널예스>를 거치며 2010년까지 12년 동안 200여 명의 사상가들 이야기를 연재했다. 연재 원고가 쌓이면 책으로 출간했다. 그동안 총 다섯 권으로 나온 책이 800페이지 분량의 한 권으로 묶여 이번에 다시 출간되었다. 사전식으로 편집해 가독성도 높였다.『책만사』는 내로라하는 사상가들이 쓴 책을 최성일식으로 풀이하고 도서목록을 덧붙인 책이다. 인물사전이나 지식의 계보 풀이를 목적으로 삼았다기보다는 에세이로 풀어쓴 사상가들의 책 이야기에 가깝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고전적인 사상가들 중심이었다. 연재가 진행되며 커트 보네커트 같은 소설가, 후지와라 신야 같은 여행가, 대니얼 고틀립 처럼 자기계발서를 쓰는 심리학자 등 대중적인 저자들도 포함되었다. 또한 가수이자 작곡가인 김민기,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고종석, ‘C급 경제학자’ 우석훈 등 국내 저자들에게도 자리를 할애했다.

최성일은 인천의 인문주의자다

출판평론가 변정수가 최성일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흡족해 한 호칭이다. 『책만사』에서 그가 소개하고 해제를 한 수많은 사상가들의 면면을 생각할 때 그가 인문주의자인 것은 당연지사. 흥미로운 건 그 앞에 붙은 수식어다. 인천이란 그가 태어나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살았던 그의 고향이다. 산청이나 경산 쯤 되는 먼 곳도 아니면서 그에게 고향은 추억이다. 그래서 그의 글 속에는 고향과 유년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는 소년 최성일의 독서편력을 엿보게 한다. 이미 어릴 때부터 책은 그에게 강하게 각인된 대상이었던 듯, 중학시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탐독하고, 아버지를 졸라 ‘소년소녀발명발견과학전집’을 산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최성일의 한풀이로 시작되었다. <한겨레신문>에 책 리뷰를 연재하던 필진 중 과학자인 정재승 박사가 있었다. 소년시절부터 과학책을 탐독했던 최성일은 과학책의 리뷰를 쓸 수 없다는 편집진의 암묵적 견제를 받았고 그 한풀이가 연재되었다. 그는 책에서 칼 세이건 말고도, 스티븐 제이 굴드, 올리버 섹스, 에드워드 윌슨, 프리모 레비, 리처드 파인만, 나탈리 앤지어 등 그에게 과학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 내로라하는 국내외 학자들이 쓴 책을 소개한다.

‘잘 쓴 과학책은 인문적’이라는 신념을 지닌 그는 과학책 리뷰 역시 인문서 리뷰 하듯 했다. 과학책을 읽되 ‘투항하지 않는 자’로서의 자의식이 여전하다. 과학자들의 과학적 주장에 관한 일목요연한 전달 대신 이 책 이전에 나온 책에 빚진 것은 없는지, 저자의 과학적 세계관이 올바른지 따질 것이 많다. 그래서 책은 말 그대로 따지기 좋아하는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가 되었다.

성일은 쓰기 위해 읽고, 읽기 위해 쓴다

출판평론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괴롭다. 책을 읽는 물리적 시간을 마련하기 어려워서다. 뮤지컬은 2시간, 영화는 1시간 반이면 끝나지만 책 한 권을 읽는 데는 평균 8시간이 걸린다. ‘대학교수는 강의만 안 하면 편하고, 신문기자는 기사만 안 쓰면 편하고, 가정주부는 밥만 안 해도 살 것 같다’는데 출판평론가도 책만 안 읽으면 할 만하다. 최성일은 이 직업적 딜레마를 이렇게 해결했다. ‘원고를 쓰기 위한 책 말고 청탁 받은 원고와 무관한 책을 읽을 짬은 좀처럼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여지가 있는 기획 연재를 선호한다. 내 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쓰기 위해 읽고, 읽기 위해 쓴다.’

『테마가 있는 책 읽기』『베스트셀러 죽이기』는 이렇게 독서가로서 최성일과 평론가로서 최성일의 합의가 만들어낸 책이다.

『테마가 있는 책 읽기』는 그가 관심 있는 책을 읽고 연재한 결과물이다. 의료현실, 군중, 팔레스타인, SOFA, 녹색정치, 아나키즘, 이슬람, 인디언 등의 테마를 잡고 관련 책들을 이야기 들려주듯 리뷰한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바르게 알고 생각해야 할 것들에 대한 그의 철학이 깃든 테마 리뷰 책이다.

『베스트셀러 죽이기』는 그의 첫 책이다. <책과 인생>에 연재되었던 글을 모았으며, 베스트셀러 ‘죽이기’라는 제목과 달리 베스트셀러를 옹호하는 책이다(이문열, 김하인, 김진명의 책을 제외하고).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비판의 대상이 된 책들을 모아 그 논란의 정체를 규명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정리했다. 심각하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으며 다분히 논쟁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그 특유의 글쓰기를 만날 수 있다.

최성일은 사람을 보면 늘 먼저 웃는다. 심각한 이야기도 대부분 웃으며 들려준다. 책 읽지 않는 세태를 두고도 “이 재미난 걸 왜 안 읽는지 몰라”하고 웃는다. 읽고 쓰기의 지난함을 이야기하다가도 “이틀 읽고, 이틀 생각하고, 이틀 쓰면 가장 좋다”고 웃는다. 핸드폰이나 자가용 같은 일상적 이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책을 선택했고, 읽고 쓰는 것을 천직으로 삼았지만 2011년판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이후 그의 책을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 2004년 뇌종양 판정을 받고도 다시 건강을 찾아 열심히 읽고 쓰고 책을 펴냈던 그는 2010년 병이 재발되어 2011년 7월 2일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오탈자를 시비 걸고, 번역문의 부정확함에 분통을 터트리고, 책의 오류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잡아내고, 사람 사는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 일에 비분강개하던 그의 글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잔소리가 그리워진다.




글 : 한미화

읽은 책에 흔적을 남기는 일을 좋아해 여러 해째 ‘밑줄 긋는 여자’ 겸 출판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오랫동안 ‘한미화의 서점가는 길’을 진행하고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독일문학을 공부했고,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일했다. 그동안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2』 등의 출판 시평과 『책 읽기는 게임이야』 등의 어린이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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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미화

독일문학을 공부했고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일했다. 현재는 책과 출판에 관해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출판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한미화의 서점가는 길’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에 어린이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2』 등의 출판시평과 『잡스 사용법』, 『책 읽기는 게임이야』,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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