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몸이 동안이다 보니 어린 역할을 많이 했어요(웃음). 그런데 데뷔한 지는 10년이 넘었죠. 성격이 급하고 열정이 일찍 샘솟다보니 대학 들어가자마자 오디션을 봐서 작품 활동과 학교생활을 병행했어요. 어느 순간부터 작품 수를 세는 것도 놓게 됐는데, 꽤 많은 작품을 했죠. 지금까지 저를 믿고 캐스팅해준 제작진이나 함께하는 배우들에게 정말 감사해요.”
계원예고를 졸업하고 지난 2001년 단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면서 바로 뮤지컬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한 그녀. 그동안 <맘마미아> <아이다> <젊음의 행진> <내 마음의 풍금> <달콤한 나의 도시> 등으로 꾸준히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10년이면 그 열정도 좀 사그라질 때가 아닐까?
“재작년에는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좀 힘들었어요. 공연을 하다 보면 관객이 적은 작품도 있잖아요. 저희끼리는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는데, 관객의 가슴을 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괴리감이 들더라고요. 또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연예인 캐스팅이 많아지면서 뮤지컬 배우들은 한 칸씩 밀리는 느낌이 드니까, ‘내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무대가 장사가 잘돼야 좋게 평가받는 곳인가’라는 생각에 힘들었어요. 그래서 6개월 정도 쉬었는데, 오래 쉬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안 하면 죽을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할 줄 아는 것도 없고요(웃음).”
새침떼기일 것 같던 그녀는 목소리도 걸걸하고 막힘없이 말하는 모습이 딱 왈가닥이다.
“굉장히 털털하고 거의 남자죠(웃음). 대부분 깍쟁이나 새침데기로 생각하시는데, 실제로 만나면 깜짝 놀라요. 무대에서 드러나는 모습이 가짜라기보다는 제 내면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제 안에 10가지의 성향이 있다면 공연 때마다 어떤 성향을 극대화하는 것이겠죠.”
그녀는 지난 4월부터 PMC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뮤직인마이하트>에 참여하고 있다. 그녀의 배역은 29살 노처녀(?) 작가 이민아. 내숭백단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이정미의 내면에서 끌어내고 있다.
“그렇죠? 29살이 노처녀라는 건 말이 안 되죠? 오래 전에 작품이 만들어져서 그런 것 같은데, 저도 노처녀라는 설정은 머리에서 지우고 생각했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말을 못하는 작가예요. 작가님의 설명을 빌리자면, 실생활에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못할 때가 있고, 들리지만 안 들리는 척할 때도 있잖아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언어장애를 갖고 있고, 말하지 않은 것들이 더 솔직하고 진실할 수 있다는 걸 표현하려고 해요.”
뮤지컬 <뮤직 인 마이 하트>는 지난 2005년 초연 후 줄곧 무대를 지켜온 롱런 작품. 강렬하지는 않지만, 유쾌하면서도 항상 새롭게 단장되는 무대가 많은 관객들에게 폭넓게 각인됐다.
“텍스트와 무대 세트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배우가 바뀔 때마다 매력이 있겠지만, 항상 최선을 보였던 공연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더 강해졌다고 봐야죠(웃음). 사실 제작사에서 좋은 배우들을 새롭게 무대에 세워 퀄리티를 유지하려는 노력도 하고요. 그만큼 배우들도 즐겁게 참여하고, 배우들이 재밌어하면 보는 사람들도 재밌어 하시더라고요.”
얼마나 재밌으면 공연이 시작된 지 한 달 반이 지났는데 그녀는 쌩쌩하다.
“지금이 한창 무르익을 때거든요. 4개월 공연이라서 매일 무대에 서는 배우들은 쎽간이 지나면 체력적으로 힘들고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는데, 지금이 제일 재밌고 좋을 때에요. 배우들도 모두 경력이 많고 서로를 믿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있고요.”
29살의 작가 이민아로 변신한 그녀는 한결 여성스러워 보인다. 무대 10년. 그간 절대 동안 외모로 기회를 놓쳤던, 이른바 여배우들이 손에 꼽는 배역들도 탐?지 않을까.
“정말이지 배역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저는 ‘이 역할은 이정미가 딱이야’ 이런 게 좋아요. 다른 면에서는 제 직감이나 의견을 중시하는 편인데, 역할은 저와 맞는 캐릭터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여배우들은 특히 본래 이미지와 다른 역할을 하다 반감을 사는 경우가 있거든요. 저는 ‘이정미가 하는 누구’를 좋아해요. 어떻게 생각하면 편한 길을 고집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연기력은 나이와 비례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욕심내지 않고 시간이 흐르는 대로 가고 싶어요.”
‘이 역할은 이정미가 딱이야’ 베스트를 꼽는다면?
“공연하면서 편했던 건 <젊음의 행진>의 영심이, <맘마미아>의 소피도 그 나이 때 저와 성향이 비슷했고요. 사실 지금 이민아도 29세, 제 나이와 같아요. 그러고 보면 제가 운이 좋아서 나이 때에 맞는 역할들을 많이 만났어요. 사실 그게 힘들거든요. 최근 1년 사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주변에서도 많이 자랐다, 철이 들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더 철이 들어서 무거워지면 또 다른 역할로 변신할 수도 있겠죠.”
지난 10년간 시간이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잘 흘러왔다. 앞으로는 어떻게 흘러가고 싶은가?
“누구나 그렇겠지만 제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질지 몰랐어요. 안타깝지만, 그때그때 나이에 맞게 살아가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한두 살 정도만 어려보이면 좋겠죠? 몸도 마음도 항상 한두 살 정도만 젊게 살아갈게요(웃음).”
참, 실제 생활에서의 청춘사업은 어떤가?
“남자친구는 있어요.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잘 만나고 있고, 제가 워낙 애교가 없는데 그런 면을 좋게 봐줘서 다행이죠. 때가 되면 가정을 꾸리고도 싶은데, 유명한 연예인은 아니지만 여배우가 결혼을 하자면 생각할 게 많더라고요. 신중하게 생각하고 싶어요.”
공연에 임박한 그녀는 쾌활하게 인사를 나누고 씩씩하게 달려 나갔다. 무대에서 봤던 모습과는 정말 천지차이다. 혹시 남자친구하고 있을 때 속에 있는 말을 제대로 못해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전혀 없단다. 있는 그대로 말하고, 돌려 말하면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역시 시원시원하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거침없는 이정미가 쏟아낼 ‘내숭백단 작가 이민아’의 사랑 공략법말이다.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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