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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강연회] 정글에서 보노보로 살아남으려면… - 『보노보 찬가』 조국 교수

아시나요, 보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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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성균관대에서 책 출간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정글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더 많은 보노보를 위하여’라는 부제로 이뤄진 이날의 강연, 살짝 엿보는 것도 좋겠다. 혹시 아는가. 당신과 내 안의 보노보가 꿈틀댈는지. 침팬지의 기승을 억제할 수 있을지.

#1. 최근 출간된 『정글』(업튼 싱클레어 저/채광석 역 | 페이퍼로드)이라는 책이 있다. 아직 읽지 못했으니, 한 서평(씨네21 안현진 기자)의 일부를 잠깐 인용하자.

“역겹다. <정글>을 읽는 동안 치밀어 오르는 한 가지는 메스꺼움이다. <정글>의 주인공, 리투아니아 출신의 이민자 유르기스는 행복을 꿈꾸며 미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시카고의 식육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다. 하루에 버는 돈이래야 고작 1달러 75센트. 열악한 조건에도 경쟁이 치열해, 하루라도 결근하면 그 자리는 또 다른 ‘유르기스’에게 빼앗기고 만다. 처음에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믿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것이 덫이라는 걸 알게 된다. 자본주의가 들이미는 교활한 낯짝은 노동과 가난의 악순환을 구르는 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각종 공장들을 전전하는 동안 유르기스는 중고품으로 전락한다.”

아니, 1906년의 이야기라는데 이 무슨 기시감이란 말인가. 미국을 한국으로, 유르기스를 ‘블랑카’로 바꾸고, 화폐 단위만 조금 바꿔주면 이건 지금-여기의 현실이다. 또한 그것은 비정규직이라는 화폐자본의 희한한 고용 방식과도 통한다.

#2. 최근 개봉한 <반두비>라는 영화. 여고생 민서와 방글라데시 남성 이주노동자 카림의 이야기다. 청소년과 이주노동자의 만남이 있고, 이들을 통해 우리 사회 기성의 권위에 대한 허구를 까발린다. 그렇다. 예상하듯 이 둘의 만남은 하나의 상징이다. 정글 같은 우리 사회에서 기본권 혹은 인권을 박탈당한 두 존재의 어떤 동행. 두 약자가 이해와 연대를 통해 서로에게 번지는 과정이 영화 속에서 그려진다.


아시나요, 보노보


보노보. 생소한 동물 이름이자 ‘파니스쿠스(paniscus)’라는 종명을 가진 영장류다. 침팬지의 사촌, 그러니까 인간의 사촌쯤 되는데, 이들은 특별한 행동 양식을 갖고 있다. 다른 동물과 달리 ‘프렌치 키스’를 하며, 암컷끼리의 연대가 매우 강하고, 수컷이 암컷을 지배하지 못하는 암컷 중심의 사회를 이루며, 엄격한 수직적 서열을 만들지 않아 상당히 평등한 문화를 유지한단다. 특히 무리 내 병자나 약자를 소외시키거나 구박하지 않고 그들을 보살피고 끌어안는다. 이들의 성은 일방적 지배나 욕망 해소의 수단이 아니라 상호적 기쁨과 유대를 위한 놀이다.

『보노보 찬가』(조국 저 | 생각의나무)에 나온 설명이다. 좀더 인용하자면, “이러한 보노보의 형태와 문화는 전 세계 영장류학계는 물론, 인류학계, 사회학계, 여성학계에 크나큰 충격파를 던졌다. 인류가 ‘자연법칙’으로 수용하는 침팬지식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보노보식 삶의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의 유전자에는 침팬지만이 아니라 보노보의 속성도 들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p.14)

그러니까 지금-여기의 우리 사회는 수컷 중심의 수직적 서열 구조와 폭력을 수반하는 내부의 치열한 권력투쟁, 다른 집단과의 잔혹한 전쟁 등의 속성을 지닌 침팬지가 지배하는 사회다. ‘내 안에 침팬지 있다’는 말, 거짓이 아니다. 많은 우리는 그런 율법에 의해 길들여진 존재다.

그런 우리 안에 보노보도 함께 있단다. 다행이다. 조국 교수는 『보노보 찬가』를 통해 우리 안의 보노보를 길어 올릴 것을 권한다. 침팬지를 죽이고, 보노보를 살리기. 기성의 권위는 침팬지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강요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 안의 보노보를 살린다면, 약자에게만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지금-여기의 상황에서 우리는 또 다른 사회를 꿈꿀 수 있음을 그는 주장한다.

지난 22일 성균관대에서 책 출간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정글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더 많은 보노보를 위하여’라는 부제로 이뤄진 이날의 강연, 살짝 엿보는 것도 좋겠다. 혹시 아는가. 당신과 내 안의 보노보가 꿈틀댈는지. 침팬지의 기승을 억제할 수 있을지.


우리 안의 타자, 비정규직 노동자


지금-여기의 노동자는 희한하게 분화돼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놓고 있다. 물론 이것은 당연하게 화폐자본이 획책한 술수다. 같은 노동을 해도 그 갈라진 이름으로 노동자를 쪼개 놓고 임금을 달리하는 아주 희한한 방식으로. 사실 비정규직이라는 타이틀은 그렇지 않단다. 다른 나라에서 쓰이는 의미와 달리 이곳의 자본가들 편의대로 만들어놓은 것.

“국회에서 비정규직 법안을 놓고 격론이 한창인데, 지금 비정규직 숫자가 8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 뭐냐면, 유럽에서도 비정규직 많고 해고도 자유롭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들은 동일 시간(질, 양)이면 임금이 동일하다. 그것도 시민(노동자)이 선택한다. 몸이 아프거나 임신 등의 이유로. 즉, 노동 제공자가 비정규직을 선택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적용하고 노사 양쪽에서도 불만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정규직과는 딴판이다. 처음 고용 계약을 맺을 때부터 화폐자본은 비정규직을 원하고, 실업의 공포가 지배하는 지금, 노동자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저 기라면 기고 따르라면 따를 뿐.

조 교수는 현대자동차의 아주 웃긴 경우를 예로 든다. “현대차 공장에 가보면 안다. 컨베이어벨트를 보면 왼쪽 라인은 청색조끼를 입고 반대 라인은 녹색조끼를 입는다. 같은 시간 같은 노동을 한다. 그런데 한쪽은 정규직, 한쪽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임금이 절반이다. 내 또래의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있다가 퇴사를 하고 비정규직으로 다시 채용이 됐는데, 똑같은 일을 하는데 임금이 반이다. 희한한 비정규직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다. 일한 데 따른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정의라고. 그런데 이건 뭔가요~ 정당한 대가는커녕 100년 전 없어진 신분 차별이 다시 부활한 건가요~ 그렇담 정의는 없는 건가요~ 말이 800만이지, 딸린 식구 등을 감안(?3)하면 2,000만이 넘는 인구가 ‘비정규직’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차별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이 높은 이유,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비정규직은 사용자(자본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직은 노동자 안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통근버스가 운행되는데 정규직-비정규직을 차별한다. 1960년대 미국에서 버스 탑승객의 인종을 차별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비정규직은 정규직 식당에서 밥도 못 먹게 한다. 나가서 먹으라고 한다. 사용자 외에도 노동자 계급에서도 이런 억압과 차별이 일어난다.”

강연장에 온 많은 학생들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는다. 설마 이런 식의 차별이 현실에서 일어나리라 상상도 못하는 눈치다. 이건 반상 차별이 아니고 뭔가. 100년 전 없어진 신분 차별이 부활한 것?


알바 청소년과 이주노동자의 외침,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노동자 내의 차별은 또 다른 형태로도 발현된다. 비정규직의 최하층은 이른바 ‘알바 청소년(들)’. 패스트푸드점, 동대문의 옷가게, 분식점 등에서 일하는 이들은 많은 수가 청소년이다. “80~90년대 대학생이 주로 했으나 지금은 10대들이 많이 일한다. 이들에겐 법정 최저임금인 3,770원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가 노동임금이 싸고 통제가 용이한 인력을 원하고 있다. 미성년 비정규직은 통제도 쉽고 임금도 싸다. 그래서 점점 밑으로 가고 있다.”

영상물 등급 심사하는 꼴을 보면 청소년 보호니 뭐니 하면서 생각하는 척하지만 정작 어른들에게 청소년은 부려먹기 좋은 노예다. 참고로 <반두비>는 청소년이 나오는 청소년 영화지만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주노동자의 현실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는 올챙이 적을 기억 못한다. “60~70년대 우리 어버이들은 독일 등지에 간호사나 광부로 가 돈 벌어서 집 사고 땅 사고 그랬다. 마찬가지다. 동남아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친구들이 우리나라에 온다. 옛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나라엔 일자리가 없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산업기술연수생’ 제도와 같은 합법적 틀이 있으나 문제가 있다. 임금이 3분의 1에 불과하고 이동의 자유도 없다. <러브 인 아시아>(TV 프로그램)와 같은 좋은 것도 있지만, 베트남 출신 여성 노동자의 손에 들린 한국어 회화 교재를 보고 쇼크 받았다. 거기에는 ‘때리지 마세요’ ‘남자가 여자를 왜 때려요’ ‘왜 자꾸 욕하세요’와 같은 실용 회화들이 있었다.”

조 교수는 다시 한마디 던진다. “내 이름이 ‘조국’인데 애국심이 왜 없겠나. (웃음) 우리의 낯 뜨거운 속살을 봐야 한다. ‘코리안 드림’이 ‘악몽’으로 현실화하는 비극을 냉정히 보고 이를 어떻게 고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왜 ‘정글’인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지금 여기는 침팬지 혹은 약육강식의 방식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노동자도 침팬지처럼 되고 있다.”

이들은 노예가 아니다. 하인이나 머슴과 같은 신분제가 제도적으로 없어진 지 오래지만 현대판 노예제가 부활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체화하고 있다. “하인스 워드나 버락 오바마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절대 그런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조 교수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인종 차별주의는 더 심화됐다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2008년 1월, 자신의 아내인 후안마이를 살해한 남편에게 내린 판결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21세기 경제 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혼인은 사랑의 결실로 소중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가치를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땅의 아내가 되고자 한국을 찾아온 피해자 후안마이. 그녀의 예쁜 소망을 지켜줄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일까. (…) 이 사건이 피고인에 대한 징벌만으로 끝나서는 아니 되리라는 소망을 해보는 것도 이러한 자기반성적 이유 때문이다.”(p.188)


동성애자와 장애인,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향한 시선


<필라델피아>의 변호사 앤드류, <브로크백 마운틴>의 애니스와 잭.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동성애자들이 당한 고통에 가슴 아파한 적이 있다. 한국 영화 중에도 <로드무비> <왕의 남자> <쌍화점>과 같은 동성애를 주제로 한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옆 사람이 동성애자라면 문제가 생긴다. 동성애자 인권연대 대표로 활동하는 정욜 씨의 경우. 그가 군대에 있을 때, 동성애자로부터 온 연애편지가 드러났다. 그는 “네가 젊은 군인들을 그냥 두겠느냐”는 힐난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용돼 강제 에이즈 검사를 받은 뒤 의병제대 됐다.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증)가 발동된 것이다. 그전까지 샤워도 같이 하고 함께 놀다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널 덮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의 위선.

장애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평소 그들을 동정하고 도와야겠다는 인지와는 달리, 내가 탄 버스에 장애인이 탔다고 가정해보자. 장애인을 버스에 태우려면 버스 기사가 내려서 탑승을 돕는 등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많은 비장애인은 무벽 말과 생각을 할까. 아마 ‘몸도 불편한 사람이 왜 나와서 저럴까’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장애인들도 나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비장애인의 생각이다. 장애의 약 90%는 질환, 사고 등 후천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남이라고 생각하고 비용 투자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조 교수는 자신이 소속된 학교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과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의 입학을 받아들인 과정을 얘기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해서는 모든 교과서를 점자로 해야 하고,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을 위해서는 모든 건물에 엘리베이터 등 장애인 시설을 설치해야 했던 상황. 학내에서 논쟁이 시작됐고, 두 사람을 위해 비용을 써야 하느냐의 문제. 일부는 그 돈으로 다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그들은 사회복지가 잘 된 학교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학생을 받아들였다. 이 가운데 눈이 보이지 않는 학생은 재작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올해 말 사법연수원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한다.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든다. 그러나 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가, 즉 다수가 양보를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보노보가 될 수 있는 길.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고통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교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다. “보수 기독교는 이를 ‘이단’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이단들이 고생하는 것은 내 알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매년 500~600명이 감옥에 가는데, 이들이 병역기피를 위해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일제 때부터 ‘총 잡지 마라’는 교리에 따르기 위해 병역을 거부했다.”

알다시피 다른 선진국들은 대체복무제가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선진국을 따르고자 애를 쓰면서도, 정작 소수자 인권 보호를 위해 필요한 이런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건 또 뭔가. “지난 정권 때, 대체 복무자는 36개월 동안 한센병 환자들이 있는 소록도에 보내자고 얘기가 됐다. 생각해 보라. ‘22개월 군대 갈래, 36개월 소록도 갈래’라고 했을 때 어느 선택을 하겠는가. 군대 가기 싫다고 36개월 동안 소록도에 가겠다고 여호와의 증인이 되겠다고 하겠는가.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아니지 않나. 그러나 이번 정권에는 다시 회귀했다. 이제 다 감옥 가게 생겼다.”


새로운 ‘가치 전쟁’이 필요한 시기


인권은 한 사회를 평가하고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다. 다수자에게 인권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들은 인권 없이도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인권은 그 사회의 소수자나 약자의 상태가 어떤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사회의 약자나 하위층이 어떤가를 보고 인권 수준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외면하면 침팬지가 된다. 그래서 다수자의 성찰이 필요하다.”

중국 상인의 모토에 이런 것이 있단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 우리는 어떤가. 과거나 예전,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불이익은 감수하고 불의는 못 참는’ 게 정의이자 도덕이라고 봤다. 물론 이익에 목을 맨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다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중국 상인들의 모토가 곧 우리의 모토처럼 됐다. 이의를 제기할 사람 많지 않을 것이다.

“이익과 효율의 문제로만 모든 것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고 있다. 이제는 ‘가치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근본적인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먼저 ‘꿈의 나라’처럼 여겨온 미국식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무한 경쟁과 약육강식이 아닌 다른 사회적 원리에 기초한 사회 운영 모델을 탐구하고 제시해야 한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빅 볼’ 외에 ‘스몰 볼’도 보여줘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명분만 내세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 교수의 일갈이다. “사람들은 큰 이야기만 갖고 살 수는 없다. 비정규직 철폐만 외치지 말고, 비전을 제시하고 실현 가능한 계획을 내놔야 한다. 친구들이 ‘힘들다. 앞으로 4년을 어떻게 버티냐’고 얘기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체력 관리를 더하자. 9년을 버텨야 한다’고. 시니컬하게 얘기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대안 있는 진보, 능력 있는 진보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를 어떻게 바꾸면 될까. 조 교수가 내놓은 답은 “불이익은 나누고 불의는 참지 말자!” 한때 그도 아이들을 세 군데의 학원까지 보내 봤단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불안심리가 작동하면서 그렇게 됐단다. 그러다 “나도 아이도 이상해지더라. 결국 때려 쳤다.” 그는 이것을 ‘나쁜’ 부모여서라기보다 제도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보노보적 제도를 만들어야 우리 안의 보노보적 심성이 발동한다. 분명 다른 세상이 있다. 비용이 덜 들고 고통이 덜한 제도가 있다. 유권자가 바꾸고, 대표자가 바꿀 수 있다. 침팬지를 뽑으면 보노보는 계속 치인다.”

아마도 각자가 자신의 일상과 제도를 바꾸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1987년 이전만 해도 대통령 직선제가 없었다. (직선제는) 무리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떤가.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실이다. ‘설마 되겠냐’고 했지만 결국엔 이뤘다. 이미 (보노보적 사회가) 이뤄진 나라가 있다. 우리도 노력하면 된다.”


어디에도 없다는 뜻의 ‘nowhere’. 그것은 ‘now here’로 읽힐 수 있다. 지금 여기. “새로운 실천을 시작하면 세상은 바뀌기 마련이다. 설사 그 결실을 당대에 따먹지 못하더라도 그 또한 어떠랴!”(p.19) 조 교수는 ‘번짐’을 희망했다. 연대나 단결하자는 말보다 번짐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당신과 나,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 보노보적 심성이 번진다면 이보다 좋은 건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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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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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진보적 법학자 조국이 던지는 따끔한 성찰의 메시지. 저자는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1년 반을 진단하면서, 승자독식의 침팬지 사회인 대한민국에 평화와 조화를 상징하는 보노보의 행동양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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