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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놈만 죽인다!

가끔 영화에서 건진 한마디가 두고두고 기억나는 일이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에 ‘무대포’라는 이름의 껄렁패가 한다는 말이 “나는 한 놈만 죽인다, 한 놈만….” 하며 이를 득득 가는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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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놈하고 맞장 붙을 때 한 놈만 골라 죽도록 패면 떼거리가 다 달아난다는 지론이었다. 맞는 말이다. 요즘 추세가 멀티형 인간을 요구한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이것저것 집적거려봐야 죄다 얼치기 아마추어로 서성대다 말 뿐이다. 내 인생, 온갖 것이 후회투성이지만 그래도 잘했다 싶은 단 한 가지는 이제껏 한 놈만 죽이는 방식으로 살아온 일이다.

가끔 영화에서 건진 한마디가 두고두고 기억나는 일이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에 ‘무대포’라는 이름의 껄렁패가 한다는 말이 “나는 한 놈만 죽인다, 한 놈만….” 하며 이를 득득 가는 대목이 있다. 여러 놈하고 맞장 붙을 때 한 놈만 골라 죽도록 패면 떼거리가 다 달아난다는 지론이었다. 맞는 말이다. 요즘 추세가 멀티형 인간을 요구한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이것저것 집적거려봐야 죄다 얼치기 아마추어로 서성대다 말 뿐이다. 내 인생, 온갖 것이 후회투성이지만 그래도 잘했다 싶은 단 한 가지는 이제껏 한 놈만 죽이는 방식으로 살아온 일이다.

우선 먹고사는 방법도 첫 직장의 한 부서에서만 14년을 초지일관했다. 그 직장의 일을 사랑해서였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나은 다른 조건을 찾아본들 무어가 크게 달라지랴 하는 생각이 앞서서였다. 그 후 프리랜서를 결심하고 나와서 한동안은 정말 금단 증상에 시달려야 할 정도였다. 여하튼 그러한 직장 체험은 생각할수록 행운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전문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회사 내부에서는 일종의 기득권까지 향유할 수 있었다. 아울러 조직이 무언지, 확대해서 사회가 무언지를 제법 아는 성인이 된 셈이다.

사랑도 한 년만 죽이는 방식으로 했다. 연애의 총 횟수는 따져보면 전후로 여러 차례 되겠지만 소위 진짜 사랑이란 건 한 사람과 13년여를 중단 없이 지속했다. 그러다 그게 깨지면서 심히 멍들기는 했어도 어쨌든 그것도 행운처럼 여겨진다. 덕분에 환희와 환멸, 애정과 증오, 충만감과 고독, 그 모든 인생극장을 총천연색 입체 버라이어티쇼로 겪어본 셈이니. 에이, 그 얘긴 그만.

한 놈만 죽이는 삶의 결정본은 역시 나의 취미생활이다. 중학교 때 이래 30년 이상 음악만 듣고 있다. 나는 남자들의 문화를 거의 모른다. 흔히들 가는 당구장 한번 가보지 않았고, 운동 경기장 한번 찾은 일이 없다. 88 서울올림픽이 한창일 때 자취방에 텔레비전이 없기도 했지만 단 한 게임도 본 게 없어 대화에 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남들하고 어울려 노는 일을 해보지 못한 대신 언제 어느 때나 음반을 사고 오디오를 바꾸느라 혼자서 늘 바빴다. 음악을 듣는 데는 시간과 돈이 든다. 다른 일에 관심을 둘 시간이 없었고 오직 음반과 오디오만을 목적으로 돈을 벌다 보니 재테크나 환락 같은 걸로 인생을 낭비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늙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40세가 훌쩍 넘어가는 거였다. 현재 보유한 3만 장의 음반만 속속들이 듣는다 해도 앞으로 몇십 년은 쉽사리 흘러갈 것이다. 음악 감상에는 정년이 없으니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있는 셈 아닌가.

한 놈만 죽이는 삶을 말하면 자칫 심지가 굳고 흔들림 없는 인간형으로 오해받을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변덕이 심하고 싫증을 잘 내는 타입이다. 나이가 들어 많이 다듬어지기 전까지는 꽤 경박스러운 타입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 한 놈만 죽이는 취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한 놈만 죽인다는 건 깊이 들어간다는 의미다. 어떤 분야에 깊이 들어가본다는 건 혼미와 경이를 체험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사이비는 아는 게 많고 전문가는 모르는 게 더 많은 것이 이치다. 한 놈만 들입다 죽이다 보면 가도 가도 알 수 없는 심연에 빠져들게 되고 그래서 더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뉴턴의 법칙 세계에서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 음악이라는 놈은 장르와 범위가 그야말로 무한대라는 게 특징이다. 대체 누가 음악의 끝을 보았는가.

그러니까 평생 음악만 들었다 해도 거대한 숲에서 나무 몇 그루 건드려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약간의 이해와 견식이 생긴 것은 역시 전문서적을 읽어본 덕이 컸다.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대체로 기질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터라 지식의 양에 크게 좌우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클래식 분야만은 그 컨텍스트가 수백 년 전의 것이라 뭘 알아야 파악이 되고 감흥도 배가된다. 유용한 음악 전문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의 모든 음악책을 사겠다고 다녀본 적이 있다. 오, 놀라워라! 그렇게 책이 없다니. 국산 책, 원서, 신간, 구간, 대중음악, 클래식 분야 가리지 않고 휩쓸어 와도 벽 하나를 채우지 못했다. 음악 지식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적다는 의미다. 혹은 음악이란 역시 책으로 읽어서 아는 장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책이 아주 소용없기야 하겠는가. 내게는 오래전 구입해 지금까지 반복해 즐겨 읽는 보물 같은 클래식 입문서가 하나 있다. 조셉 매클리스라는 미국의 음악사가가 쓴 세 권짜리 책 『음악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뜻밖에 이화여대 출판부에서 펴냈다. 뉴욕에 있는 퀸즈 칼리지 음악 강좌의 교재였다는 책이기에 주요 곡 동기 부분에는 악보가 나오는 등 비전공자를 질리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대충 건너뛰면 읽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이 책의 미덕은 음악만을 덩그러니 떨어뜨려 놓은 게 아니라 당대의 문학, 건축, 조각, 회화 등의 인접 장르와 사회적 배경을 결합시켜 놓았다는 데 있다. 설사 해당 음악을 듣지 않아도 독자적인 독서물로서도 훌륭하고 군데군데 삽지에 담긴 회화를 통해 문화사적인 체험까지도 하게 된다. 각 챕터는 중요 인물이 남긴 말의 인용으로 시작하는데, 그 한마디들은 꽤나 울림이 있는 상징성을 지닌다.

“나의 인생…… 그것은 시작은 없이 슬픈 끝만 있는 하나의 삽화이다.” ─ 쇼팽
“나의 음악의 주요한 특성들은 정열적인 표현, 강렬한 열의, 생동적인 리듬, 그리고 기대하지 않은 전환 등이다. 나의 작품을 적절히 표현하려면 극도의 정확성과 억누를 수 없는 담력, 조절된 열정, 꿈과 같은 부드러움, 그리고 병적인 침울이 요구된다.” ─ 베를리오즈
“하나의 교향곡을 쓴다는 일은 내게, 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 말러
“내가 사랑을 노래하려 할 때 그것은 슬픔으로 변했다. 그리고 내가 슬픔을 노래하기를 원했을 때 그것은 내게 사랑으로 변모되었다.” ─ 슈베르트

조셉 매클리스의 『음악의 즐거움』은 음악의 요소, 사조, 그리고 음악가의 일대기들을 종횡으로 엮어놓아 감상을 풍요롭게 하는, 책 제목처럼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이다. 가끔 음악 칼럼을 쓸 때 이 책의 내용을 무단 인용하는 적이 많다는 비밀을 고백해야겠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음악 자체의 전문적인 식견이 더 필요하다면 D. J.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를 읽는 게 좋다.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제목 그대로 통사류로서 정통적인 권위를 보여주며 인덱스를 통해 사전적인 기능도 충실히 한다. 구입한 지 7년이 넘었지만 필요할 때만 부분부분 찾아 읽은 터라 아직도 완독을 못 한 책이다.

그러나 가장 많은 정보가 담긴 것은 역시 음반의 해설지다. 해설은 사전을 뒤져서라도 될수록 원문을 읽되, 뮤지션 명단은 물론 레코딩 엔지니어라든가 녹음 일자라든가 하는 자잘한 사항까지 샅샅이 읽어두는 게 좋다. 의외로 각기 다른 음반들의 정보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큰 틀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서점에 들렀다가 『음악의 즐거움』이 어여쁘고 세련된 장정의 두 권짜리 책으로 환골탈태해 재발행된 것을 보았다. 내가 갖고 있는 1985년 판본은 그야말로 석기시대의 야성미를 간직한 좀 무식한 활판 인쇄본인데 기분이 묘했다. 남몰래 혼자 감춰놓고 먹던 사탕을 백화점 진열창에서 발견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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