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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 작가와 독자가 함께 오른 소설 『남한산성』의 현장

김훈의 신작 『남한산성』은 370년 전 47일간의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참담했던 날을 재현한다. 지난 29일 김훈 작가와 함께 70여명의 독자가 그 역사 속 현장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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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김훈의 신작 『남한산성』은 370년 전 47일간의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참담했던 날을 재현한다. 작가는 그 치욕적인 역사를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게 그린다. 『칼의 노래』가 이긴 전쟁인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했다면, 이번 작품은 패배한 전쟁인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다.

『칼의 노래』가 인간 이순신의 개인적인 면모를 중심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은 죽음으로써 삶을 얻고자 한 척화파 김상헌과 치욕적인 삶일망정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임금 인조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해지는 가슴은 그 모든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입장이 이해된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29일 김훈 작가와 함께 70여명의 독자가 그 역사 속 현장을 다녀왔다.

아침 9시, 답사여행 참가자들이 한국관광공사 앞에 속속 도착해 출석체크를 하고 있다.
“자! 빨리 타세요. 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빨리 출발하자고요.”
치욕과 굴종의 삼전도비. 이 비석에 새겨진 글은 칸(청 태종)이 조선을 침공한 사태의 책임이 조선에 있음을 천명하고, 칸이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 은혜에 감사하고, 조선은 청을 천자의 나라로 섬기며 그 속국이 되어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약을 담고 있다.

최근에 누군가가 비석에 페인트칠을 해놓아 이것을 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삼전도비 옆에 서 있는 부조. 소설에서는 이 현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 왕은 황색 일산 앞에 꿇어앉았다.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칸이 술 석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한 잔에 세 번씩 다시 절했다. 세자가 따랐다. 개들이 황색 일산 안으로 들어왔다. 칸이 술상 위로 고기를 던졌다. 뛰어오른 개가 고기를 물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 아, 잠깐 멈추라.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추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칸은 다시 일산 안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 (356쪽)

남문을 오르는 길에 있는 남한산성 안내도.
남문. 정조 3년 성곽을 개축하면서 현재의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조 임금은 적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성남 쪽으로 돌아서 산성의 정문인 이 남문을 통해 성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것은 임금의 위엄이었다.

소설 속 현장을 타박타박 오르는 독자들
그러나 병자호란을 마감할 때, 청 황제는 임금이 남문으로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곳 서문은 너무 낮아서 말을 타고는 나갈 수도 없지만, 임금과 소현세자는 말에서 내려 문을 통과한 다음,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서 평지까지 내려갔고,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좁은 서문 앞에 선 작가와 독자들. 작가는 치욕의 현장을 찾으면서 삶의 경건함을 느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했다.

“임금은 감당할 것을 다 감당하면서 삶의 길을 열어나간 것입니다. 아무리 치욕스럽고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의 삶은 영원한 것이죠. 저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여기 와서 성벽의 돌덩이를 만져 봅니다. 그러면 삶의 경건성이 느껴지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합니다.”

소설 속 수어사 이시백이 동-서-남-북-중 5개 군영을 총괄해서 지휘했던 곳. 삼전도 들판과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지만, 이 날은 간간히 내리는 빗줄기로 생긴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이 건물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 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이층 누각으로 다시 쌓고 현재의 '수어장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힘이 없는 듯한, 약간 느린 말투로 소설 속 상황을 들려주는 작가.
수어장대 앞에 세워져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비석.
성벽을 뒤로 한 이정표. 남한산성 안의 교통 중심지는 산성로터리다. 소설에서는 ‘삼거리’와 그 주변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삼거리에 큰 종이 매달려 있어서 관아에서 종을 쳐서 성 안 백성에게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종로’는 그 삼거리로 가는 길이다.

성벽을 이렇게 구불구불하게 축성한 것은 적이 성벽에 바짝 붙어있을 때 건너편으로 총이나 활을 쏴 공격하기 쉽도록 한 목적에서다.

다음은 소설 속 용골대가 통역 정명수와 산성을 두고 나눈 대화다.

- 단단해 보인다. 산골나라에는 저런 성이 맞겠어.
- 조선은 성 안이 허술합니다.
- 허나 성벽은 날카롭구나. 깨뜨리기가 쉽지는 않겠어.

총안. 성벽 위에는 성첩살받이터를 쌓았다. 성첩은 세 개의 총안을 묶어서 한 개의 타를 이룬다. 타와 타 사이에는 성 밖을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을 두었다. 총안을 통해 다가온 적을 쏠 수 있도록 바닥면의 각도를 성 밖의 지형에 따라 다르게 했다.

서문에서 내려오다 보이는 마을. 소설에서는 서날쇠의 대장간을 비롯해 초가집으로 된 민가가 있던 곳이리라. 작가는 소설 속 인물 김류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전달한다.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마음에 떠올랐다.”

점심식사 후 유일한 어린이 독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저자.
한 독자에게 직접 사인을 해주는 저자.
행궁은 적의 침공을 받아 도성이 위태로울 때 임금의 피난처이자 항쟁의 거점.
행궁 안 텅 빈 편전. 소설 속 격론이 벌어졌을 상황을 상상하면 쓸쓸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깜짝’ 상황극이 이어졌다. 소설 속 인물들이 현실에 나타난 20여 분의 공연은 병자호란 그때 역사의 현장으로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실감나는 것이었다. 극중 김상헌은 ‘임금이 없으면 백성도 없다’며,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대척점에 선 최명길은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다’고 반박하며,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 못함을 강변한다. 그들은 같은 목적을 향해 서로 다른 길을 택한 지식인이었다. 작가는 다른 책에서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라고 언급한다.

격정적인 공연에 모두가 숙연한 가운데, 일부 참석자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청군의 칸을 대신한 통역 정명수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곧 세 번 절하고 한 번씩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인조 임금.

공연이 끝나고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작가. 한 독자의 “주전파와 주화파의 공박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무하게 끝난다”라며 결말을 아쉬워하는 데 대해 작가는 “사실 마지막 문장은 ‘남한산성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썼다가 지웠다”라고 답했다.

통렬한 풍자지만, 독자에게는 크나큰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자 격렬한 논쟁을 불러올 수도 있음을 염려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소설 속 마지막 문장에서의 결말인 대장장이 서날쇠의 웃음으로도 작가의 뜻은 충분하게 전달된 듯하다.

무심한 듯한 표정의 작가는 따뜻함보다는 엄격함에 가까워 보인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부르는 원고를 대필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는 ‘소설을 쓰는 것은 말로 세상을 바꿀 수 없는데 말을 걸어야 하는 자의 고통’이라며 ‘나에게 글은 밥벌이’라고 표현했다.

6월 초입 한낮에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데도 이날은 중간 중간 가랑비까지 내려 서늘했다. 가벼운 반소매 차림에다 아침까지 거르고 온 필자는 서문 근처 성벽 주위에서 점심을 기다리는 동안 성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덜덜덜 떨기도 하고, 겨우 한 끼 걸렀는데 배고픔을 느끼기도 했다. 소설 속 배경처럼 한겨울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와 배고픔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때 그 현장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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