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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의 바로잡는 의학상식] 우리나라 의료 제도가 세계 최고라고?

이승훈의 바로잡는 의학상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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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종합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중에 3분 진료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3-6개월만에 방문하는 환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그간 경과를 확인하고 설명하는 데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2022.07.05)


격주 화요일, 이승훈 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 교수가

우리가 꼭 알아둬야 할 의학 상식을 소개합니다. 


언스플래쉬

다이나믹 코리아. 우리나라 사회의 변화가 많은 만큼 국민들의 정치, 경제 담론은 정말 대단한 수준이다. ‘공정’이 중요한 화두가 되면서, 2년 전 의료계 파업이 발생했을 때에도 국민들의 시선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의료제도 자체에 대해선 상당한 호평이 많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이용하기 편하면서도 저렴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이 제도는 어떤 계기로 이렇게 정착이 된 걸까? 이 제도가 국민들에게 정말 좋은 것일까?

잠깐 비교해보자.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는 ‘전 국민’에게 차별 없이 적용된다는 큰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는 서유럽과 영연방에서는 너무 기본적인 상식이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병원 진료를 받은 후 환자가 부담하는 비용이 아예 ‘없다’. 이미 납부한 세금으로 운영되는 구조라, 보험 내 진료라면 돈을 내는 제도로 만드는 게 더 이상하다고 여긴다. '본인 부담금'이라는 형식의 의료비 할인 제도로 운영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일본과 한국이다. 즉, 우리는 저렴하다고는 해도 항상 진료비를 내도록 되어있다. 자본주의 천국인 미국의 의료 보험 제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악랄(?)하기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라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사보험(私保險)에 가입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 시스템에서 보험료는 매우 비싸서 중산층이 좋은 보험에 가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간단한 치과 진료도 하지 못해 집에서 혼자 이를 뽑는 일도 허다하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제도는 미국보다는 낫고, 서유럽보다는 나쁜 제도로 보인다.

사실 의료보험 제도가 낙후될수록 의사들은 오히려 돈을 잘 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낙후된 보험 제도를 가진 미국에서 의사들은 대부분 부유층에 속하며, 제도가 미비한 중국과 인도에서는 부유층을 넘어 갑부 수준인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전 국민 제도가 없었던 1970년대에는 의사가 부르는 대로 진료비를 줘야만 했기에, 가족 중 한 명이 뇌졸중이나 암에 걸리면 가족 전체 경제가 무너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암 보험 제도까지 완비된 지금은 과거와 같은 극단적 사례가 드물다. 반면, 서유럽의 의사들은 생각보다 곤궁하다. 여기 의사들의 급여는 직업 전체 평균 수준 정도라, 우리나라와 같은 의대 진학 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의료보험 시스템의 발전과 의사의 수입은 반비례한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의료 보험 제도는 복잡한 역사를 거친 후, 2000년 7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탄생으로 시작되었다. 전 국민, 행위별 수가제, 의약 분업, 본인 부담금이 본 제도를 설명하는 키워드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본 칼럼의 취지와 맞지 않으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아무튼, 의료 기술의 표준화, 계량화를 전제로 한 우리나라 보험 제도는 보험 심사 평가원을 통한 감시 및 저수가 정책으로 의료 비용의 감소를 낳게 된다. 이는 국민들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지만, 병원들은 갑작스러운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떨어진 이윤을 박리다매(薄利多賣)해서라도 복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병원들의 조급함은 결국, 의사들의 노동력을 갈아 넣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었고, 그게 지금의 ‘종합 병원 3분 진료’의 시발점이 된다.

사실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중에 3분 진료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3-6개월만에 방문하는 환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그간 경과를 확인하고 설명하는 데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3시간 세션 기준으로 적어도 60-70명 이상의 환자를 보지 않으면 안 되도록 운영되는 것이 우리나라 종합병원의 현실이다. 이러니 외래 시간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짧은 시간 동안 환자와 최대한 효율적인 대화에만 집중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환자의 건강에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가정생활이나 감정적 변화 등에 대한 구체적 대화는 꿈도 못 꾼다. 아무리 바빠도 불친절하다는 고객 평가가 나오지 않도록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빠른 속도로 의무 기록, 검사와 치료 오더를 입력하고 바로 다음 환자를 받는다. 이런 환경에서는 3분 내 처리가 불가능한 복잡한 병력을 가진 환자가 내원하면 바로 입원 오더를 내는 일도 허다하다.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외래에서 진료가 가능함에도 말이다. 1, 2차 병원에서는 부족한 이윤을 벌충하기 위해 온갖 비급여 진료와 불필요한 검사와 치료가 남발된다. 의사를 처음 시작하면서 가졌던 사명감은 병원 유지라는 큰 전제 앞에서 부질없는 공염불이 되어버린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겐 병원 문턱이 무척 낮다. 1, 2, 3차 병원 구별은 구색일 뿐, 진료 의뢰서 한 장이면 자유롭게 원하는 병원과 의사를 선택할 수 있다. 이런 구조에서 병원은 환자 유치를 위해 다양한 광고와 유인책을 쓴다. 전 세계 어떤 선진국에서도,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볼 수 없는 상업적인 병원 홈페이지가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인 수준이다. 의사를 만나는 건 편하지만, 시간 압박으로 인해 깊은 수준의 진료는 불가능하다. 어려운 질환일수록 오진 확률은 높아지고, 효율적 진료를 위해 많은 환자들이 같은 패턴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 개개인에게 충실한 일부 의사는 정말 성실하고,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분들이다. 대부분 종합병원 의사들은 열심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지금의 구조를 한탄하며 수십 년째 진료실에 박혀있다. 이게 과연 가장 좋은 의료 제도일까? 환자들이 의사를 만나는 게 목표라면 좋은 제도가 맞겠지만, 정확한 치료가 목적이라면? 환자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의료 보험 시스템은 아직 인류에게 큰 숙제로 남아 있다.



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승훈 저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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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훈(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 교수)

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 교수.『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저자. ㈜세닉스바이오테크 대표이사, (사)한국뇌졸중의학연구원 원장 및 뇌혈관대사이상질환학회 회장을 겸직하고 있다. 의학자로서 뇌졸중의 기초와 임상에 관한 200여 편의 국외 논문을 발표했으며, 대한신경과학회 향설학술상, 서울대학교 심호섭의학상, 유한의학상 대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관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및 보건복지부 장관표창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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