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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맨스 특집] 우리의 그라운드를 넓게 쓰는 방법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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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모으는 여성 서사들의 등장과 거기에 호응하는 우리의 태도가 의미하는 것들. (2021.11.10)

©디스위켄드룸 Χ 최지원  Jiwon Choi, Melancholia, 2021,
oil and acrylic on canvas, 162.2 Χ 130.3cm

오빠들의 세계사는 잔혹하다. 그것이 비단 전쟁에서 승리한 남자들의 기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 누이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서술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딸들의 이름을 덮어버리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라틴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신학서를 집필했던 여자 마르그리트 포레트는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을 받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 칭기즈칸은 딸들을 공동 통치자로 삼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은 여성에게 통치받았던 기록을 삭제해버렸다.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에는 그렇게 존재했으나 사라져버린 숱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아무튼, 언니』의 한 구절처럼 “지금껏 남성들은 운이 너무 좋았다”, “그들만의 카르텔은 철옹성보다 단단했다. 이제는 여성들이 운이 좋을 차례다.” 역사 속의 누이들, 그 누이들의 딸들, 그 딸들의 딸들은 다르게 자랐다. 자기의 이름이 누락되도록 두지 않는다. 

그들은 아예 판을 새로 짜거나 이미 짜인 판과 상관없이 자기 식대로 그냥 논다. 이를테면, Mnet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의 여성 댄서들이 그렇다. 길거리에서 다진 실력을 무대 위로 올리고, 백댄서에 머무르지 않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중이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자기 커리어에 대한 치열한 열정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쎈캐(센 캐릭터)’ 언니들의 걸 크러시를 포함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것을 가뿐하게 넘어선다. 상대 팀에 대한 경쟁의식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지만, 그들을 향한 ‘리스펙’ 또한 아끼지 않는다. 팀 안에서는 동료를 아찔하게 몰아세우지만, 갈등은 곧 화해와 격려로 전환된다. 끝내 함께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확인한다. 이 멋진 여자들이 신뢰라는 두터운 갑옷을 걸친 채 춤추고 있다는 사실을. 

멋진 여자들은 공도 찬다. 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여자들>에는 축구 하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스우파>와는 또 다른 희열을 준다. 한동안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방송인들, 스포트라이트에서 밀려난 연예인들이 리그를 구성해 진짜 경기를 펼친다. 오랜 시간 축구 레슨도 받고 각자의 시간과 노력을 더한 훈련과 수고도 마다 않는다. 모두들 공 차는 데 진심이다. 덕분에 스포츠 성장 만화에 나올 법한 가슴 뭉클한 드라마가 매회 탄생한다. 어쩌면 이걸 기회로 축구와 여자의 조합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실은 진즉에 축구 하는 여자들의 짜릿함을 기록한 에세이가 있었다. 김혼비 작가는 이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다들 정말 못 말리겠다. 아마추어 여자 축구가 있는지 없는지, 여자들이 축구를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전혀 관심 없는 세상의 곳곳에서 축구에 푹 빠진 여자들이 축구를 시작하고, 축구를 시작하게 끌어주고, 축구를 하다가 다치고, 힘겹게 재활하고, 그래 놓고 또 기어이 기어들어 오고, 축구를 못 해서 병이 나고, 축구를 공부하다 못해 심판 시험 준비를 시작하고, 축구를 좀 더 잘해보겠다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매일매일 연습을 한다.” 

한때 미디어는 섹시한 여자들의 몸을 거리낌 없이 훑었다. 여성의 몸이 어떻게 섹시미를 성취하는지, 그게 지상 최대의 관심사였던 시절이었다. 그랬던 언니들의 서사는 이제 땀내와 함께 새롭게 교체되는 중이다. 춤을 추거나 공을 차면서. 서로를 응원하거나 성장시키면서. 

브로맨스가 남성들의 성애적 관계를 뛰어넘어 남자들의 우정과 형제애를 두루 지칭하는 말이었듯, 여자들 사이의 끈끈하고 애틋한 모든 종류의 이야기가 워맨스에 포함된다. 워맨스의 세계에서 여성은 언제나 다른 여성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적이 되어 싸우지 않는다. 싸우더라도 억압과 편견이라는 진짜 적을 향해 함께 싸운다. 그 싸움의 방식은 자기의 시대를 고스란히 증언하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도발하거나 농락하지만, 오빠들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이를테면, 2009년 맨부커상과 20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앨리스 먼로의 『소녀와 여자들의 삶』은 1971년에 세상에 나왔는데, 그때 작가는 이런 문장을 썼다. 

“내 생각엔 처녀들, 여자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 분명히 그래. 하지만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건 우리 손에 달려 있어.” 

자전적 경험 위에 쓴 이 작품에는 주인공 소녀에게 영향을 미친 숱한 여자들의 삶이 누락되거나 뭉개지지 않고 등장한다. 20세기 여자들의 거의 모든 초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좀 더 가까운 사례를 찾는다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인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가 대표적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의 여성 서사는 레즈비언 로맨틱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서 복잡하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과 사랑이 어떻게 자기의 시대를 뒤집어놓을 수 있는지 반전을 거듭하며 짜릿하게 증명해 보인다. 

근래의 한국 문학작품들 중에서는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언니들의 연대기로 꼽을 만하다. 『쇼코의 미소』로 동시대에 존재하는 여성들 간의 관계를 드러낸 바 있던 작가는 『밝은 밤』에서는 증조모-할머니-엄마-나에게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선보인다. 여성 서사의 세밀화와 풍경화를 연달아 그려내는 셈이다. 『밝은 밤』이 과거에서 현재까지 여자들의 내밀한 생을 재구성하게 만드는 이야기라면,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은 미래적인 존재로서의 언니를 상상하게 한다. 폐허가 된 세상은 식물로 인해 되살아나는데, 이 식물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고 구원의 서사를 쓰는 주인공이 바로 ‘언니들’이다. 바이러스 때문에 절멸한 세상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노래한 또 다른 소설로는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가 있는데, 여기서도 사랑은 역시 여자들에게서 태어난다. 

오빠들의 세계사에서는 제대로 호명되지 못하거나 아예 지워졌던 이름들은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불려 나오고 있다. 그들은 전쟁 영웅의 얼굴을 하지 않았고, 군림하는 포식자의 모습은 더욱이 아니다. 그들은 칼을 휘두르며 오지 않는다. 여럿이 함께 땀 흘리며 춤을 추거나 공을 차면서 온다. 원도 작가가 “다음 생에서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 언니들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라고 쓴 것처럼, 다정하고 사려 깊게 온다. 그들은  이전 세대의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폐허로부터 세상을 어떻게 일으킬지 궁리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랑에도 거리낌이 없는 얼굴이다. 




* 이 기사의 제목 '우리의 그라운드를 넓게 쓰는 방법'은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에 실린 김혼비 작가의 글 제목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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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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