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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10월 우수상 - 나를 따라오던 어두운 그림자

살면서 가장 억울했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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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또각 힘들게 계단을 오르는데 누군가 자꾸 나를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넓은 계단에 지그재그로 위치를 옮겨 봤지만 나를 따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2021.10.07)

언스플래쉬

퇴근하는 새벽달을 보며 출근하고, 출근하는 저녁달을 보며 퇴근하던 사회 초년생 시절이었다. 강북에서 강남으로 출퇴근을 하느라 점심때가 아니면 해를 보지 못하고 지냈다. 그나마 점심도 구내식당에서 먹는 날엔 종일 해를 보지 못하고 지낸 날이 많았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스물셋, 열정 가득한 신입사원으로 해를 보지 못하고 지낼 때에도 내 마음에는 늘 해가 있었다. 낯선 서울 생활에 들떠 있었고, 동대문에서 구입한 싸구려 치마 정장을 걸쳐 입고도 자신감이 넘쳤다. 발에 맞지 않는 뾰족구두를 신고 뒤뚱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멋진 커리어우먼을 상상하며 밤낮없는 바쁨을 즐겼다. 그날이 있기 전까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던 즈음, 크라프트지를 닮은 황갈색 치마 정장을 예쁘게 차려입은 날이었다. 여덟 시쯤 되었을까. 정말 오랜만에 칼퇴근을 하고 동네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D역 7번 출구. 유난히 계단이 많은 곳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이미 몇십 개 계단을 올랐지만 출구 앞에는 또 60여 개의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각또각 힘들게 계단을 오르는데 누군가 자꾸 나를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넓은 계단에 지그재그로 위치를 옮겨 봤지만 나를 따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무서운 마음에 돌아보지는 못하고 출구를 향해 힘껏 달렸다. 그런데 순식간에 나를 덮친 그림자, 나를 따라서 뛴 남자는 내 몸의 일부를 움켜쥐고는 내가 지르는 소리에 놀라 재빨리 달아났다. 남자는 계단 아래로, 나는 계단 위로 뛰었고 계단을 모두 올라와서 뒤를 돌아본 순간 그 남자도 뒤돌아서 나를 쳐다봤다. 30대 중반의 남자는 너무나도 평범한 인상이라 더 소름 끼쳤다. 내 주변에 흔히 있을법한 보통의 사람이 나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다니 충격적이었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울면서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는 일밖에 없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한 마디 내뱉고는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욕이라도 배워뒀더라면 더 심한 욕을 해주었을 텐데... 출구에 서서 지하철에 신고를 할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 긴 계단에 cctv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금방 단념했다. 신고를 생각했던 순간은 단 몇 초였다. 스물셋의 나는 그 계단을 다시 내려간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고 누구도 나를 보호해주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의 나는 미흡했고 어리석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날의 기억으로 시달렸다. 계단을 오르는 모든 순간 다시 그날이 떠올랐고 한낮에도 내 그림자에 내가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필 집으로 오는 출구라 어쩔 수 없이 나는 매일 그 계단을 올라야 했고, 혹시라도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칠까 봐 동네를 다닐 때도 항상 두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같은 출구로 나오는 여자를 기다렸다가 함께 걷는 일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구두를 신었지만 출구를 나오면 집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출구에서 집으로 오는 길엔 가로등도 없었고, 길목엔 택시회사와 아저씨들이 들르는 선술집이 있었다. 가끔 남자라도 마주쳐서 더 무서운 밤엔 혼자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달리기도 했다. 차라리 미친년처럼 보이면 쉽게 다가오지 못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지나고 보니 신고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됐다. 그때 조금 더 적극 대응했더라면 그 사람을 잡지는 못하더라도 내 마음에 덜 남았을 텐데... 몇 달이 지나면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결혼 전까지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수많은 계단에서 어두운 골목길에서 나는 가능한 매번 달렸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내 그림자에 놀란다. 그때 조금 더 용기 내서 그 사람을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그 계단 아래 어느 cctv에 그 사람이 찍히진 않았을까. 그 사람은 여전히 그 한심한 짓을 계속하고 있을까. 처벌받지 않은 한 번의 성공으로 수위를 높여가며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을까. 수많은 상상만 하며 나는 여전히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을 원통해한다. 나는 겁쟁이였지만 나와 같은 일을 겪는 누군가는 조금 더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기억이 더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힐 테니까.

"성도 이름도 모르지만, D역 7번 출구에서 마주쳤던 너! 당신의 완전 범죄가 언제까지 계속되리라는 착각은 하지 마. 아직도 당신이 그 한심한 짓을 반복하고 있다면, 당장 멈춰! 그러지 않는다면, 어느 용기 있는 사람이 당신에게 빛나는 은팔찌를 선물할 거야."




*우미영

마음을 다독이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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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우미영(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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