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아버지의 길> 길 위에서 목격한 풍경들, 사람들, 그리고 희망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아버지는 길을 걷는 5일 동안 아름다운 세르비아 풍경에 포탄의 잔해처럼 남은 폐허의 흔적을 목격한다. (2021.05.06)

영화 <아버지의 길>의 한 장면

남편이 교사로 일한 학교에서 해고당하고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하자 참다못한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를 찾았다. 밀린 남편의 월급을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누구 하나 반응하지 않자 부인은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라이터에 불을 붙여 분신한다. 

이 소식을 듣고 남편이 현장을 찾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하다. 부인은 병원에 입원했고 아이들은 행방이 묘연하다. 사회복지센터를 찾으니 센터장이 한다는 소리가 부인은 위험한 행위로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렸고 남편은 변변한 일이 없어 제대로 양육하지 못해 자식들을 볼 자격이 없다며 되려 가해자 취급을 한다. 

위탁 부모 밑에서 이제나저제나 아빠와 엄마를 기다릴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는 길을 나선다. 고압적인 지방 관료와는 말이 통하지 않아 중앙 정부를 찾아 장관에게 직접 자신의 형편을 호소해 아이들을 찾을 생각이다. 아버지는 빵과 베이컨과 물과 덮을 담요를 챙기고 300km에 달하는 거리를 직접 걸어서 5일 만에 중앙 정부에 도착한다. 

이 일은 세르비아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스르단 고루보비치 감독은 중앙 정부 건물 앞에서 장관을 만나겠다고 몇 날 며칠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소재로 <아버지의 길>을 연출했다. 지난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파노라마 관객상과 에큐메니컬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건 잘 만들어진 이유도 있지만, 동시대의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어필하는 어떤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상영 시간 2시간의 <아버지의 길>에서 길 위의 아버지에 영화가 할애하는 시간은 절반을 훌쩍 넘긴다. 아버지가 걷는 행위로 맞닥뜨리는 사건과 목격하는 풍경이 메시지와 직결한다는 의미다. 


영화 <아버지의 길> 공식 포스터

극 중 아버지처럼 가진 것 없고, 힘도 없고, 도움받을 주변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건 내면의 목소리에 따른 본능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정물처럼 가만히 있기보다 어떻게든 움직임으로써 얻게 되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아버지에게는 그게 바로 ‘걷는 것’이었다.

실제로 스르단 고루보비치 감독은 본능에 의지해 정의로운 길을 걷는 사람의 모습을 이 영화에 담고자 했다.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예전에 보이지 않던 무언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아버지의 길>의 아버지는 길을 걷는 5일 동안 아름다운 세르비아 풍경에 포탄의 잔해처럼 남은 폐허의 흔적을 목격한다. 

버려진 공장과 주유소, 낡은 시골집과 제대로 페인트칠이 되지 않은 주거용 건물 등 낙후한 환경은 지난 20년 동안 세르비아가 겪은 나쁜 관료들의 의사 결정에 따른 후폭풍이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와 보스니아의 독립으로 유고가 붕괴하고 신(新) 유고 연방은 다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면서 가난과 부패는 일상이 되었다.   

그것이 지금 길을 걷는 아버지의 눈에 비친 세르비아의 현실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파괴해가는 비정한 관료주의 역사의 진행형 속에서 황폐해지는 건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이 지키려는 도덕성이다. 그에 맞서 아버지는 부모 된, 남편 된 도리로서 아이들을 되찾고 파괴된 가족을 복원하려는 존엄성과 도덕성 회복의 여정으로 길을 나섰다. 

세르비아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미궁에 빠진 사건의 진상을 위해, 정치적 시비에 휘말려 의도적으로 휘발된 사태의 해결을 위해, 힘이 없다는 이유로 부조리의 한복판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 가족이, 친구들이, 연대하는 시민들이 항의 시위로, 삼보일배로, 캠페인으로 길을 걷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걷는다는 건 보폭을 맞추는 것이기도 하다. 길을 걸으면 모르는 이와 동행하게 되고, 함께하는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며 삶의 의지를 다지고, 그 결과로서 예전의 달라진 나와 더불어 변화하는 사회를 향한 희망의 길을 이어갈 수 있다. <아버지의 길>이 의도한 바이면서 한국 영화 팬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유다. <아버지의 길>은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정식 개봉을 통해 곧 더 많은 한국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오늘의 책

더는 희생하지 않고 열렬히 욕망하고자

『파친코』 이민진 작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야기의 출발이 된 소설. 가족을 위해 희생하던 부모 세대와 달리, 열렬히 자신의 것들을 욕망하고 표현하는 이민자의 아들딸들. 케이시는 상처 가득한 그 길에서 싸우는 대신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지금의 언어로 이민자의 뉴욕을 바라보는 현재의 이야기.

매일 만나는 고전

『다산의 마지막 시리즈』 등의 저서로 고전의 지혜와 통찰을 전한 조윤제 작가의 신작이다. 오랜 기간 고전 연구를 통해 체득한 내공으로 수십 권의 동양 고전에서 찾은 명문장 365개를 골라 담았다. 매일 조금씩 고전 명문장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얻고 삶의 자양분으로 삼아보자.

감정 말고 이성으로 육아하고 싶다면

베스트셀러 『아들의 뇌』 곽윤정 교수의 뇌과학 육아법. 감정육아를 하면 부모는 본인의 의도만 기억하고 아이는 부모의 태도만 기억한다. 이 책은 영유아 뇌의 발달 과정을 설명하고 기분이 육아가 되지 않는 3단계 핵심 솔루션을 제시한다. 우리 아이의 정서를 결정 짓는 골든 타임을 놓치지 말자.

사이보그가 된 로봇공학자의 기록

루게릭병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은 로봇공학자 피터는 생존과 기술적 진보를 위해 스스로 사이보그가 되기로 결심한다. 장기를 기계로 교체하고, 후두적출로 잃은 목소리를 합성 음성으로 대체하는 등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피터의 도전은 과학 기술과 인간 삶에 대한 통찰과 감동을 선사한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