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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사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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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정말 원했던 건 단순히 물건을 보고 사는 게 아니라, 그 공간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2021.01.22)

언스플래쉬

“마트에 너무 가고 싶어요. 새 게임도 구경하고, 시식도 막 먹으러 다니고…….”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작은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팬데믹 시대를 맞이한 어린이 친구들을 인터뷰하던 중이었다. 질문은 간단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한 뒤, 예전과는 달리 갈 수 없게 된 곳이 있는지, 그래서 기분이 어떤지. 다시 가게 된다면 뭘 하고 싶은지. 비대면 시대답게 화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해 버퍼링이 끊이지 않았지만, 가족 다 같이 대형 마트에서 장 보던 일을 회상하는 어린이의 진지한 눈빛만큼은 화면을 그대로 투과해 내게 닿았다.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어린이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하던 말간 얼굴에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걸 소망해도 될까’ 하는 의아함이 스쳤다. 진심을 말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은, 왠지 모르게 놀란 얼굴이었다. 그때야 어린이들이 얼마나 일상적인 공간을 잃어버렸는지, 얼마나 평범한 순간들을 송두리째 빼앗긴 건지 깨닫고 새삼 놀랐다. 

하긴. 위험하다고 학교도 못 가는 마당에 어디든 갈 수 있을까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마트에 다시 가고 싶다니! 마트에서 시식용 동그랑땡도 먹어보고, 새로 나온 게임들도 살펴보고, 카트를 끌며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고 싶다니! 이렇게나 소박한 바람이라니! 

기가 막힌다. 온종일 집에 갇힌 어린이들은 마트에 가던 일상을 전생처럼 되짚어보며 놀라고 있는데, 어른들은 여전히 갈 데 다 가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구경하고 싶은 것도 다 하고 다닌다. 결국 피해 보는 건 또 어린이들뿐이다. 항상 그랬어. 대체 어린이들이 무슨 죄야? 진짜 문제는 어른들인데! 어른들 다 나빠! 다 사과해! 지금 이 순간, 마트도 못 가고 있을 전국 어린이들에게 다들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아닌 게 아니라…… 사실 나도 마트가 정말 그리웠다. 마트뿐 아니라 백화점이, 대형 쇼핑몰이, 물건을 사고파는 그 모든 공간들이 너무도 그리웠다. 종일 사람 많은 곳에 파묻혀 다양한 것들을 구경하고 싶은 욕구가 하루에도 열두 번은 솟구쳤다. 연휴를 지나며 이 애달픔은 더 깊어졌다. 그 어린이의 절실한 소원이 꼭 내 소원 같았다. 사과는 내가 받고 싶었다. 

실은 코로나 시대가 도래한 뒤, 모든 장보기 활동을 온라인으로 대체했다. 신기했다. 바빠도 며칠에 한 번은 꼭 동네 가게들에 들러 새로 온 물건을 둘러보며 즐거워했는데, 매일 밤 거실에 앉아 작은 휴대폰을 통해 대형 마트의 끝도 없는 물건을 마주하고 배송까지 시킬 수 있다는 게 정말이지 짜릿했다. 하지만 그렇게 일 년 간 온라인 마트를 집 앞 편의점처럼 애용하면서도 여전히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계속 어딘가로 가고 싶었다. 가서 더 보고, 더 느끼고 싶었다. 익명의 사람들 속에 숨어, 더 많은 것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정말 원했던 건 단순히 물건을 보고 사는 게 아니라, 그 공간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그냥 별별 물건들과 별별 사람들이 다 와서 복작이는 곳. 그렇게 새로운 이것저것이 서로 뒤섞여 오가는 광활한 장소들 특유의 활기와 에너지, 그 분위기와 정서와 조명, 온도, 습도…… 같은 것들을 나는 꽤 깊이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자책감이 몰려왔다. 나 제정신이니? 어떻게 그런 곳을 좋아할 수 있지? 골목상권과 소상공인을 위협하고, 교통체증을 유발하며, 무분별한 소비문화를 부추기는 곳을? 그런 자본주의의 지옥이 어떻게 그리울 수가? 정말이지 나란 사람……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거니……?

문득 옛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어렸을 때 동네에서 좀 먼 곳에 있는 교회에 가족이 함께 다녔는데, 예배가 끝나면 늘 근처의 작은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인터뷰했던 어린이처럼 가족이 오순도순 장을 보며 친목을 다지는 이벤트는 아니었다. 그보단 부모님이 우리 남매를 장난감과 문구류 등이 모여 있는 층에 풀어놓고 각자 볼일을 보러 가셨다가, 한두 시간 후에 돌아와 수거하는 식의…… 아무튼 그런 시스템이었다. 

매주 일요일 점심, 동생과 백화점에 덩그러니 남겨지는 그 자유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거기 가면 늘 새로 나온 인형 옷이나 관련 세트들을 오래도록 살펴볼 수 있었고, 48색을 넘어가는 크레파스와 물감, 수입산 파스텔도 만져볼 수 있었다. 분양을 기다리는 손바닥만 한 강아지들을 구경하다 지치면, 마돈나의 공연이 영원히 흘러나오는 선명한 TV를 보며 잠시 쉴 수도 있었다. 다리가 떨릴 정도로 오래 서서 책을 봐도 누구도 쫓아내지 않는 곳. 차례만 잘 지킨다면 새로 나온 게임도 맘껏 해볼 수도 있는 곳. 갖지 않아도 마치 가진 것처럼 느껴볼 수 있는 곳이 내겐 백화점이었다. 사러 가는 곳이 아니라, 잠시 살다 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하고많은 곳들 중 왜 하필 백화점이었을까. 아이들을 잠깐 놀게 할 장소라면, 뭐 놀이동산까지는 아니더라도 트램펄린장에 간다거나, 그냥 놀이터도 있을 텐데. 엄마한테 문자로 물어봤더니 단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돈 안 들이고 안전하게 놀 수 있는 데니까. 새로운 것도 많아서 가도 가도 안 질리고. 너도 재밌지 않았어?” 

재밌었어요, 엄마. 진짜로. 덕분에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절절한 사랑에 빠져 있잖아. 고작 1년 만에 상사병이 날 정도로…… 가만. 그러고 보니, 뭐든 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그냥 없는 집 맏딸의 타고난 눈치였을 수도 있겠다. 결국 다 돈이 없어서 가능한 놀이고 환상이었네…… 잠깐. 그러니까 그 말은 결국, 제일 자본주의적인 공간에서, 자본 하나 없이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놀았다는 거잖아. 내가 그렇게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어린이였다니! 그렇게나 전복적인 놀이를 창조하고 즐겨왔다니! 정말이지 나란 사람……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훌륭하게 큰 거니……?(역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영화 <키드 캅>(1993)의 포스터 

어쨌든 요즘은 정말 물건과 사람이 끝없이 오가는 모든 곳들이 다 그립다. 쓰다보니 더 사무치게 그립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와 팬데믹과 돈과 욕망과 현대인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할 시간에, 이준익 감독님의 <키드 캅>을 다시 보기로 했다. 백화점에 갇힌 다섯 아이의 모험담을 통해 내 유년을 좀 더 회상하다 보면, 코로나 시대의 어린이가 대형 마트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어린이들에게 백화점에 하룻밤 갇히는 일보다 더 짜릿하고 즐거운 상상이 또 있을까. 누가 리메이크 안 해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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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가은(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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