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나를 선택해, 나로 시작해

나는 나와 보내는 시간에 남들보다 수월하게 적응했다. 어쩌면 과도하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하듯 나로부터 조금씩 먼 곳으로 문장의 무게를 이동시키며 생각을 발전시킨다. 인생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선택할 것이다. (2020.11.06)

저 혼자 붉은 것은 용서 받는가?

정말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좋았다. 영화에 나오는 인상적인 대사 중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가 있다. 마케팅 상사가 회의 중 좋은 의견을 제시한 직원들에게 하는 최고의 칭찬으로, 이것을 들은 직원은 기쁨을 얼굴에서 숨기지 못한다. 관객들을 웃기려는 웃음 포인트로 사용된 이 대사가 영화의 마지막 대사와 더불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마지막 대사는 “나를 보지 말고 너를 봐”라는 대사로, 자신을 줄기차게 비난해온 동료에게 유나가 하는 말이다. 두 대사 모두 시선이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이 독특했다. 나의 발전을 체크할 수 있는 기준도 나 자신이고, 가십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나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나 자신에 집중하는 양상이 영화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남을 보지 않고 나를 보게 되었는데 다시 남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어쩐지 나는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안정을 찾았다. 여러 사회적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 시간이 지낼 만하다고, 가끔 만족스럽기까지 하다고 고백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다. 약속과 소음이 없는 삶은 스트레스를 줄여주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친구들과 식당에 갔을 때 놀라고 말았다. 번화가에서 사람들 헤치고 시끌벅적한 식당까지 가는 일 자체가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이걸 어떻게 해왔지? 매일 회사에 가야 하기 때문에 출퇴근길 만원 버스가, 부딪히는 사람들이 불쾌하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 지워버린 게 아니었을까? 나는 나와 보내는 시간에 남들보다 수월하게 적응했다. 이제 내가 가진 한정적 에너지가 외부 환경을 의식하는 데에 쓰이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질 만큼. 어쩌면 과도하게.

하지만 어른들이 듣기 싫을 때까지 나를 가르치던 말처럼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나는 집 밖으로 나와 돈을 벌고 사람을 만난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 영원할 수는 없다. 나는 어쩐지 “혼자 푸르게 살 수 있을 것 같냐”는 말을 더불어 들어왔다. “깨끗한 물에 물고기 못 산다”는 말도. 나는 깨끗하고 푸른 아이였다기보다는 자기 의견이 있는 아이였다. 자기 의견이 있는 아이는 자주 혼이 났다. 덜 혼나면서 말하는 법을 조금은 익혔다. 더 자라서는 만원버스에 적응했다. 예상치 못했던 판데믹 속에서 예상치 못한 안정을 찾았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의식이 확실하고 정신을 바짝 차린, 각성된 상태가 되어 자신이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대상을 선택하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의미를 구성할 때 그 방법을 자기가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이런 종류의 선택을 행하지 않거나 선택을 할 줄 모른다면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 『이것은 물이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선택한 줄도 모르고 따르고 있는 것들을 살펴본다. 철학자가 이론을 점검할 때처럼 모든 문장과 단어를 꼼꼼히 따지며 시간을 들인다. 나는 내 선택의 기준을 나로부터 시작하고 있는지, 충분히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동시에 다른 사람과 어우러져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하듯 나로부터 조금씩 먼 곳으로 문장의 무게를 이동시키며 생각을 발전시킨다. 인생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선택할 것이다. 



이것은 물이다
이것은 물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저 | 김재희 역
나무생각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박주연

이것은 물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저/<김재희> 역9,000원(10% + 5%)

『이것은 물이다』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2005년 5월 케니언대학 졸업식에서 한 주제강연문으로, 현대의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 남긴 유산이다. 격식에 매이지 않는 유머, 날카로운 지성, 현실과 맞닿은 철학 그리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특유의 천재성으로 가득한 『이것은 물이다』는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겪어야 ..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ebook
이것은 물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저/<김재희> 역6,000원(0% + 5%)

‘물’이란 무엇인가 연민 없는 무정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다 소설 《한없는 웃음거리(Infinite Jest)》로 《타임》지 선정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에 이름을 올렸으며,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고 창조적인 작가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고(故) ..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의 대표작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이 오마주한 시집. 황유원 시인의 번역으로 국내 첫 완역 출간되었다. 미국 20세기 현대문학에 큰 획을 그은 비트 세대 문학 선구자,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스타일을 최대한 살려 번역되었다. 도시 패터슨의 역사를 토대로 한, 폭포를 닮은 대서사시.

본격적인 투자 필독서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경제/재테크 최상위 채널의 투자 자료를 책으로 엮었다. 5명의 치과 전문의로 구성된 트레이딩 팀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최신 기술적 분석 자료까지 폭넓게 다룬다. 차트를 모르는 초보부터 중상급 투자자 모두 만족할 기술적 분석의 바이블을 만나보자.

타인과 만나는 황홀한 순간

『보보스』,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신간. 날카로운 시선과 따뜻한 심장으로 세계와 인간을 꿰뚫어본 데이비드 브룩스가 이번에 시선을 모은 주제는 '관계'다.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순간을 황홀하게 그려냈다. 고립의 시대가 잃어버린 미덕을 되찾아줄 역작.

시는 왜 자꾸 태어나는가

등단 20주년을 맞이한 박연준 시인의 신작 시집. 돌멩이, 새 등 작은 존재를 오래 바라보고,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시선으로 가득하다. 시인의 불협화음에 맞춰 시를 소리 내어 따라 읽어보자. 죽음과 생,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우리를 기다린 또 하나의 시가 탄생하고 있을 테니.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