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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술도 끊을 수 있나요?

나에게는 중독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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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원래 약하다. 하다못해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싸워서 매번 지는 나인데, 삶이라는 끝판왕과 싸우려니 어딘가 붙들만한 중독재를 찾아낼 수밖에. 밖은 추워지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려되는 세상이잖아. (2020.10.30)

 언스플래쉬

세 캔째 맥주를 비우고 난 다음날 아침, 나에게 알코올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혼자 마시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술을 마시고 실수를 저지른 적은 없지만 불안했다. 얼마나 중독 상태인지 남에게 확인을 받고 싶어서 계속 주변에 물어보고 다녔다, 마시는 양을 줄여서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물론 한국인은 대개, 거의 모두, 알코올 문제가 있다. 누구는 술 먹고 넘어져서 앞 이빨을 깨기도 하고(다행히 그 정도 사건이 일어난 적은 없다), 쟤는 하루에 맥주를 이만 씨씨까지 마셔봤다고 자랑을 하고(맙소사 내가 그 정도는 아니다), 걔는 일주일에 일곱 번 마신다(그정돈...). 초록은 동색이고 술쟁이 주변에는 술쟁이만 남게 되어 사이 좋게 나는 너보다 낫다며 자기 위안한다. 분명 모두가 '나는 그정돈...'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리고 그정돈 씨들은 일어나 술을 마시러 갈 것이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명랑한 은둔자』를 읽고 나서 꺼내들었다. 김명남 역자가 '옮긴이의 말'에서 『드링킹』을 읽고 난 얼마 후 술을 끊은 이야기를 썼는데, "책은 때로 사람을 바꾼다"는 말에 혹해서 끝까지 읽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 술을 끊게 될까?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은 공기를 묘사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단정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크고 오묘하고 곳곳에 편재해 있다. 인생의 모든 굽이에 알코올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존재를 느끼면서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 알코올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평범한 술꾼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구체적인 선을 넘어 버리는 것은 어떤 단순한 이유, 어떤 한순간, 어떤 단일한 심리적 사건을 통해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 점진적이며 집요하고도 불가해한 형성의 과정이다. 

『드링킹』, 22쪽

이제까지 굳이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왜 나는 중독을 두려워할까. 더 나빠진 다음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봐? "느리고 점진적이며 집요하고도 불가해"하게 나빠질까 봐? 

건강은 좀 나빠졌겠으나 주변 상황이 나빠질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보신주의자로 또 이상한 일에 꽂혀서 나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닌지 또 의심한다. 혹시 내가 사회에서 충분히 고기능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불안감 때문에 술을 탓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술 영향도 있겠지만, 그리고 계속 마시면 중독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냥 모든 이유를 술에 아웃소싱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원청의 자세로 내 삶을 대하고 있진 않은가? 모든 것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술만 탓하는 건 아닌가?

요새 평일 저녁에는 넷플릭스를 멍하니 보거나,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게임의 일일 퀘스트를 깬다. 사실 술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하지 않고 술이 시켜서 했다는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술을 마신다. 술이 들어가 노곤해진 저녁의 직장인은 퇴근 후 자기계발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컴퓨터를 켜서 온라인 강의를 듣거나 굽은 허리를 펴려고 매트를 깔고 운동하는 건 선택지에 없다. 하지만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은 정말 이걸 다 할 수 있나? 원래 퇴근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야?

일도 과하게 하고 술도 과하게 마시는 한국인은 모두 중독 문제가 있다. 과잉이 된 것들은 더 많은 과잉을 필요로 한다. 한 잔은 또 한 잔을,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퇴근하고 술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술과 자기계발에 이중 중독되어 있는 건 아닐까? 알코올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날도, 그저 저녁에 하기로 마음먹었던 일을 제쳐두고 캔을 땄던 내가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약하다. 하다못해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싸워서 매번 지는 나인데, 삶이라는 끝판왕과 싸우려니 어딘가 붙들만한 중독재를 찾아낼 수밖에. 밖은 추워지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려되는 세상이잖아. 그러니 한잔...이 아니라. 와 위험했다 방금. 알코올 때문에 삶의 바닥을 친 이야기를 읽고도 이런 생각을 했다니.

AA가 주는 답은 단순하고도 복합적이다. '그냥 하라. 오늘 꼭 하루. 연습하라. 도움을 요청하라. 한동안 공황감과 갑갑함에 괴롭겠지만 불편함을 그냥 견뎌라. 그러면 마침내 고통이 누그러들 것이다.' 

- 같은 책, 347쪽

사회를 바꾸기는 힘들어 보이고, 하루 동안 덜 자괴감이 드는 방식으로 살아보자고 생각한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마시지 말아야지. 더도말고 딱 오늘만. 이 이상 고기능으로 살기도 힘들고, 이 이상으로 노력하기도 힘드니까. 책이 내 인생을 바꿔줄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정도는 분명 가르쳐주는 게 있었다. '그저 오늘 하루만.'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캐롤라인 냅 저 | 고정아 역
나무처럼
명랑한 은둔자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저 | 김명남 역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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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캐롤라인 냅> 저/<고정아> 역13,050원(10% + 5%)

이 이야기는 러브 스토리다. 열정에 관한 이야기고, 감각적 쾌락과 깊은 흡인력, 욕망과 두려움, 타오르는 갈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 강렬함으로 온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결핍에 관한 이야기다. 도저히 이별을 상상할 수 없는 상대와 작별을 나누는 이야기다. 아이비리그 출신의 엘리트 저널리스트 캐롤라인 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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