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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더 페이보릿] 올드 레이디의 이야기 – 임선애 감독

영화 <69세>를 만든 임선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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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와 그 부정의(不正義)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정확했다. <69세>는 배려 깊은 만큼, 대담한 작품이다. (2020.11.05)

영화감독 임선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 위로 사운드만 들린다. 심상하게 대화를 이어가려는 효정(예수정 분)과 환자와 선을 남나들며 성적인 분위기를 만들려는 이중호(김준경 분)의 대화다.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고, 화면이 들어온다. 정형외과 물리치료실이다. 두 사람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음악이 깔리고, 날카로운 전자음이 울린다. 삐-삐-삐-.

영화 <69세>는 69세 간병인 효정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9세 간호조무사 이중호에게 성폭행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직설적이고 현실적이다. 실제로 성폭력이 그렇다. 일상적인 대화와 성희롱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고, 친밀감의 표현과 성추행을 바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임선애 감독(이하 임선애)의 표현대로 하자면, 상황은 서서히 “에스컬레이트(고양)”되어 간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고 해서 바로 대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 큰 위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임선애는 관객들을 효정의 자리로 초대한다. 있는 그대로,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해보자고. 그렇게 이후 효정의 선택과 행동들에 공감해보자고. 영화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시하지 않는” 반면,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와 그 부정의(不正義)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정확했다. <69세>는 배려 깊은 만큼, 대담한 작품이다.


영화 [69세] 촬영 현장에서 (왼쪽부터) 임선애 감독과 배우 예수정

뒷모습이 전하는 말

사건 후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효정은 가해자 이중호를 고발하기로 결심한다. 간병인과 환자로 만나 지금은 서로를 보살피며 함께 살고 있는 동인(기주봉 분)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고 경찰서를 찾는다. 옆에서 효정을 도우려는 동인과 달리 경찰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다. “(이중호가) 친절이 과했네.” 담당 형사가 무심결에 내뱉는 말은, 노인 여성 성폭행 사건에 대한 한국사회의 무지와 편견을 그대로 보여준다. “청년이 60대 여성을 강간할 리 없다”는 이유로 이중호에 대한 영장은 계속 기각되고, 효정은 심지어 치매 환자가 아닌지 의심까지 받게 된다.

효정과 동인이 서로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 동인의 아들 현수(김태훈 분)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서운함과 애처러움, 효정의 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영화는 노년의 일상을 묘사하는 세심한 디테일만큼이나 정서적으로 풍부한 작품이지만, 그 다양한 감정을 압도하는 건 단연 효정의 차가운 분노다. 예수정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효정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 정도 살아온 사람이라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 정도’는 그저 흘려 보내온 69년의 세월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노동을 하는 사람의 시간, 무엇보다 돌봄 노동을 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온갖 수모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온 사람의 시간이다. 효정은 독립적이지만 성폭력 가해자를 고소하러 경찰서에 갈 때는 남성 파트너를 대동하고, 주변의 시선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옷은 아주 잘 갖춰 입는 사람이다.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더욱 “피해자의 고통을 봐달라”고 강요하기보다는 이 상황에 이성적으로 접근해보자고 제안한다. 그것이 감독이 “예수정이라는 놀라운 배우와 함께 작업하면서도 종종 그의 뒤통수를 담았던 이유”다. 예수정, 아니 효정의 수많은 사연을 품은 듯한 얼굴이 가진 몰입의 힘에 전적으로 기대기보다, 그 힘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감정의 완급을 조절한 것이다.

영화는 수치심을 느껴야 할 것은 효정이 아니라 이중호라고 말한다. 이는 효정이 이중호의 가족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이중호의 어린 아내는 친정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효정은 이중호의 아내가 임신한 것을 보자 발걸음을 돌려 나온다. 그리고 아내를 만나러 온 이중호와 마주친다. 처가에 모든 것을 알렸을 거라는 생각에 이중호는 폭주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흥분한 적이 없었던 카메라가 불안으로 요동치며 포악질을 터트리는 장인의 얼굴을 비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중호의 지레짐작일 뿐이다. 이중호 본인이 만든 지옥의 이미지인 것이다.

“진짜 내 인생 끝나는 거 보고 싶은 거야?!”라고 부르짖는 이중호에게 효정은 말한다. “끝? 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니가 저지른 거 하나 하나 다 갚고, 그리고도 질기게 안 끝나는 게 인생이다.” 효정은 이중호를 불안과 공포 속에 놓아둔 채,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피해를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는 사회에 맞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중호를 고발한다.


영화 [69세]의 한 장면

움직이고 말하는 사람의 용기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는 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옥상에 오른 효정은 한국사회를 향해 수백 장의 고발장을 날린다. 그의 고발이 성공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효정의 이야기는 계속 살아남아 우리에게까지 도달했다.

“성폭력은 너무 흔하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덕분에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한다. 효정 역시 말하는 사람이다.”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 임선애의 오래된 관심사다. 첫 단편인 <나쁘지 않아>(2004)의 주인공 ‘그녀’(정제후 분)는 일견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주저하기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 때문에 길을 헤매기는 하지만. <69세>와 스타일이 꽤 다르긴 하지만, 임선애의 에두르지 않는 태도는 다음 단편인 <그거에 대하여>(2007)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X세대 허윤(정제후 분)은 성욕이든 식욕이든,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오르가슴을 오르가슴이라 부르지 못하고,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지 못하면서 ‘그거’라고 표현한다. 임선애는 딱 맞는 단어를 쓰지 못하고 “이거, 저거, 그거” 하는 한국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임선애의 문제의식은 자신의 작품 안에서 차곡차곡 쌓여왔다. 행동하는 사람 ‘그녀’의 모습도, 편견 안에서 섹스를 섹스라 말하지 못하고,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도, 효정이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두터운 레이어 중 하나다. 또 하나의 레이어는 한국 사회의 노인 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이었다.


영화 스틸 컷

어떤 삶도 잉여는 아니다

“성폭력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고민해 왔지만, 노인과 노년의 삶에 대해서는 과연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69세>는 임선애의 자기반성과 성찰 안에서 나온 작품이기도 하다. ‘노인’과 ‘여성’이 교차하는 자리에 효정이 서 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조력자를 청년으로 그리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과 “가해자를 간호조무사가 아닌 의사로 만들어서 사회적 권력관계의 문제를 부각시키면 어떠냐”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임선애는 흔들리지 않았다. 노년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여기고 그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인 문제에 이미 사회 구조의 문제가 얽혀있는데, 다른 요소를 더 할 필요는 없었다.

“한국에선 ‘올드’라는 단어에 어떤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만, 영어권 국가에서는 지혜가 많은, 삶의 경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는 의미가 훨씬 더 크다고 한다.” 

임선애는 영화의 영어 제목 <An Old Lady>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세월 속에서 쌓인 지혜와 품성에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시절을 산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생산성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노년은 잉여로 여겨진다. 영화는 삶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효정과 동인의 관계를 통해서 어떤 삶도 잉여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누구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아주 드라마틱한 하루를 보낸다.”

임선애의 첫 단편 <나쁘지 않아>의 주제였다. 선입견 속에서 타인의 삶을 뭉개 버리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에겐 현미경의 언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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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희정(문화평론가)

페미니스트 크리틱. 논문 〈21세기 한국영화와 네이션〉으로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쓰는, 세계》《페미니즘 리부트》와 《성평등》을 썼고, 《을들의 당나귀 귀》와 《그런 남자는 없다》를 책임 편집했다. 함께 쓴 책으로는 《대한민국 넷페미史》,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럼에도 페미니즘》, 《소녀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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