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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게요, 할머니의 세상을

내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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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할머니는 당신의 세상과 나의 세상이 만날 수 있는 건 ‘끼니를 챙기는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에 그토록 우리의 끼니를 챙기고 계셨던 걸지도 모를 일.(2020. 06. 19)


외할머니와 자주 통화 한다. 어제 퇴근길에는 얼마 전 발목을 삐어서 병원을 다니고 있다며 어리광을 부렸다. 다음 주 대구에 갈 때엔 할머니 표 오이 소박이와 물김치를 먹고 싶다고, 서울에서는 뭘 먹어도 할머니 밥 만한 게 없다고도 말한다. 늘 내 끼니 걱정에 건강만 해라,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말씀하시는 할머니와의 통화가 끝나고 나면 값진 사람이 된 것 같아 힘이 난다. 그래, 항상 사랑 받고 있었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나는 할머니와의 유대가 깊은 편이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음식을 늘 배불리 먹었던 탓에 통통한 체형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식 넷의 밥을 챙겨준 것으로도 모자라 할머니는 나에게도 늘 행복을 떠먹여 주셨다. 지난 달에는 할머니가 계신 시골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삼시세끼'를 찍는 것과 다름 없던 할머니의 '손녀 배 불리기' 프로젝트는 다채로웠다. 직접 구운 김, 새로 담근 겉절이 김치, 여름 반찬용으로 만든 가죽 나물, 며칠 전부터 재워둔 갈비, 한 마리 크게 구운 조기, 푹 끓인 삼계탕. 그러고도 "에고, 별로 차린 것도 없다. 우리 나영이 마이 무라!" 하고 내어 주신다. 따로 반응을 챙길 것도 없이 먹자마자 감탄사가 나오는 할머니의 밥상은 한 숟가락 떠 넣을 때마다 내가 나로 살아야 할 이유를 채워준다.



같이 잠들기 전,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우리들 밥 챙겨주느라 모든 일생을 다 쓰시는 것 같아요"하고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할머니는 "내사 이게 일이지 뭐"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생이 우리에게만 집중된 게 미안했다. 그리고 주기만 하는 그녀의 사랑은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궁금했다. 엄마가 입원했을 때에도, 할머니는 엄마가 먹을 밥이 가장 신경이 쓰인다며 갖가지 반찬을 만들어 오셨다. 그 후로도 할머니는 엄마를 위해 장을 보셨고, 엄마는 이 밥으로 힘을 내어 일을 다시 하셨다. 언젠가 셋이 함께 벚꽃을 보러 간 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는 내 딸 챙기느라 바쁘고, 내 딸은 자기 딸 챙기느라 바쁘네. 이렇게 엄마들의 사랑으로 세상은 돌아 가는거야."

할머니 얘기가 나오면 너무 우리만 생각하고 사셨던 것 같아 안타까운 표정과 눈을 하는 내게, 당신의 기준에서 할머니의 생을 평가하진 말라고 했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내 멋대로 할머니의 생을 재단하고 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각자의 삶의 모양대로 놔두자는 글을 그렇게 읽고서도, 할머니가 살아온 인생의 가치를 내 기준에서 평가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받은 사랑만큼 할머니는 희생하셨다고 생각한 미안함에서 시작된 마음이었다.

작년 봄에는 할머니가 서울로 오셨었다. 할머니와 2박 3일을 지내는 동안 서울을 어떻게 구경시켜 드리면 좋을 지 계획을 세워 두었건만, 내 생각보다 할머니의 다리는 더 좋지 않았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할머니에겐 힘든 일이었다. 여기 저기 이동해 둘러보는 것도 할머니에겐 무리였다. 할머니가 서울에서 해보고 싶던 것은 아주 간단했다. 집 근처 한강 걷기, 노량진 수산 시장을 구경하다 회와 매운탕 거리를 사다 집에서 끓여먹기, TV로만 보시던 서울의 대형 교회에서 예배 드리기. 이 2박 3일 동안 나는 다시 깨달았다. 내 기준에서 보여드리고 싶은 것과 할머니가 원하시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내 욕심으로 할머니의 세상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할머니의 서울 여행은 구경을 위함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함이었다. 기차에 탄 할머니를 뒤로하고 집에 왔을 때, 그래서인지 눈물이 왈칵했다. 아, 할머니의 세상은 우리가 전부였구나.

이걸 깨닫고 나서도 한동안 나는 할머니의 생을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할머니는 못 누리셨구나, 하는 미안함으로. 미안함이 들 때마다 떠올리려고 한다. 고작 한강 산책만으로도 행복해하던 할머니의 발걸음을. 여기서 끓여 먹은 매운탕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는 할머니의 말을. 우리 얘기라면 예전 일이라도 늘 생생하게 꺼내어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신 난 목소리를. 어쩌면 할머니는 당신의 세상과 나의 세상이 만날 수 있는 건 ‘끼니를 챙기는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에 그토록 우리의 끼니를 챙기고 계셨던 걸지도 모를 일.

할머니, 선을 넘지 않을게요. 이 선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잘 챙겨 먹을게요. 할머니도 잘 챙겨 드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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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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