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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귓속말』 편집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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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평생 책을 딱 한 권만 내면 좋겠어요.” 6개월 동안 남미를 여행하다 재입사하여 문학 임프린트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이만근은 장발의 머리를 한 채 아득한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2020. 04.10)

풍경의 귓속말.jpg

 

 

맞은편에 앉은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습니다. 꽤 잘생겼어요. 범생이처럼 반듯하게 생긴 그 얼굴 탓에 저는 어떤 기대감도 들지 않았습니다. 저와 그는 회사에서 몇 번 마주친 게 다였어요.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지요. 그는 제게 말을 한 뒤에 몸을 돌린 채 뭔가를 하는 듯했어요. 그러곤 바로 저를 정면으로 진지하게 응시하더군요. 다음 순간 그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습니다. 앞니 하나에 새까만 김을 붙이고 있었어요. 이 무슨 쌍팔년도식 몸개그인가. 저는 빵 터졌습니다. 이만근을 사적으로 가깝게 본 첫 날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 책을 딱 한 권만 내면 좋겠어요.”

 

6개월 동안 남미를 여행하다 재입사하여 문학 임프린트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이만근은 장발의 머리를 한 채 아득한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개성 강한 작가들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오히려 작가들 모두 만근이를 좋아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봐주고 자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좋아하지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을 누구나 좋아합니다. 이만근은 상대를 살려주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생은 내가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글귀를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만근은 그 말을 실감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살아오면서 자기한테 찾아온 문장을 차곡차곡 간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글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긴 시간에 걸쳐 오랫동안 갖고 있던 그의 수많은 문장들을 보는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진지한 얼굴의 앞니 김 개그로 기습당한 것보다 더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감성과 심성을 갖고 있어서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이렇게나 자기연민 없는 담백한 감성이라니. 힘든 어린 시절을 겪었던 사연을 알게 된 후 더 놀라웠습니다. 세상에 대한 어떤 원망도 없고 자책도 없고 조용히 세상 구석구석 가뿐히 돌아다니며 풍경을 만나고 소리를 듣는 ‘따뜻한 바람’ 같은 존재. 만근이가 채집한 이 토막 문장들을 어떻게 책으로 낼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이런 존재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만들었습니다. ‘간신히, 책’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황할지도 모르겠어요. 한 쪽에 글 한 줄, 혹은 한 단어만 있는 곳도 있습니다. 여백을 편집하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백의 호흡이 문장을 살리고 맥락을 풍성하게 돋우는 글입니다. 이 글은 쓴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읽는 사람의 것인 글입니다. 글쓴이가 앞으로 나서는 글이 아니라 뒤로 물러서거나 옆에 다정하게 앉아있는 글입니다.

 

그는 무엇이 되기 위해 꿈꾸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샐러리맨으로 야근을 마치고 동료들과 한잔 하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습니다. 어떤 날은 잡지사 기자로 사람들을 인터뷰했습니다. 어떤 날은 2평짜리 담배가게를 차려 눈먼 가족 대신 담배를 팔았습니다. 어떤 날은 남미대륙의 깎아지른 높은 절벽에 엎드려 세상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어떤 날은 서울 시내 중국요리점 매니저로 손님들을 상대했습니다. 어떤 날은 비엔티엔에서 수십 명의 월급을 챙기느라 라오스 지폐를 새다 새벽을 맞았습니다. 바람이 흐르는 대로, 인연이 흐르는 대로 오갔습니다. 어디라도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소설이나 시를 짓기에는 성격상 민망해서, 최소한의 문장만 남겨진 그의 짧은 토막글들입니다. 감히 책으로 만든 이유는 그와 당신이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서운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내는지, 대책 없는 감정은 어떻게 추스르는지, 외로움은 어떻게 감당하는지, 세상이 준 상처들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유머는 어디서 그렇게 뜬금없이 솟아나는지, 당신이 어느 한순간 놓친 감성과 생각들을 그가 대신 표현해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들 억울해하기보다 누구나 세월이 되지 않느냐는 그의 말이 가진 무게를, 당신은 헤아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풍경의 귓속말 이만근 저 | 나비클럽
세상의 흐름에서 한 발 떨어져 관조하며 온갖 말들에 묻혀 있던 나의 진심과 세상의 속살이 내는 조용한 숨소리를 듣는다. 작가는 세상에 대해 쓸데없는 욕망을 가져본 적 없는 만큼 부질없는 자기연민이 없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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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영은(나비클럽 편집자)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바람으로 나비클럽을 만들었고 사람을 만나고 책을 만든다.

풍경의 귓속말

<이만근> 저10,8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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