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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4월 우수작 - 주부라는 말에 지지 않기

올 봄에 꼭 하고 싶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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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안 한 상태라면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주부라고 부르지 않는데, 어째서 결혼한 상태의 여성은 주부라는 당위성이 생기는 걸까. (2020.04.01)

김재연.jpg

언스플래쉬

 

 

채널예스가 매달 독자분들의 이야기를 공모하여 ‘에세이스트’가 될 기회를 드립니다. 대상 당선작은 『월간 채널예스』, 우수상 당선작은 웹진 <채널예스>에 게재됩니다.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은 매월 다른 주제로 진행됩니다. 2020년 4월호 주제는 ‘올 봄에 꼭 하고 싶은 일’입니다.

 


“어디까지 가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50대 정도로 예상되지만 그보다는 젊어 보이는 단정하고 세련된 여성분이었다. 목적을 위해 접근하는 사람에게서 보이는 수상한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약간 나른해 보일 정도의 편안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전혀 경계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낯선 이의 질문에 나는 착착 대답을 하였고, 어디에서 내리는지 되묻기까지 하였다. 그 사람은 나의 행선지에서 두 정거장 전에서 내린다고 대답했다. 나이가 드니까 점점 얘기할 사람이 없어지는데, 말은 더 많아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 전에도 비슷한 시간대에 나를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인상이 좋아 보인다고, 오늘 또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언제 차를 마시거나 함께 점심을 먹자고도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러자고 대답했다. 안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내게 직장에 다니는지 물었다. 지금은 일을 쉬고 있다고 답했다.


“그럼, 그냥 주부?”


“글쎄요. 주부라고 하기는 뭐 그렇지만, 주부이긴 하죠.”


그 사람은 내게 어떤 일을 했는지, 왜 일을 그만 두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다만 주부라는 말에 왜 망설이느냐고, 결혼을 안 했냐고 물었다. 결혼은 했지만, 집안 살림을 도맡아서 꾸려가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남편이 대단하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나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일을 하고 있고, 남편이 잠시 일을 쉬고 있는 상태였다면 어땠을까를 떠올려 보았다. 남편도 주부라고 불릴까. 결혼을 안 한 상태라면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주부라고 부르지 않는데, 어째서 결혼한 상태의 여성은 주부라는 당위성이 생기는 걸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이. 나는 차라리 ‘무직’이라는 말이 그리워졌다.


새로운 직업을 찾느라 ‘주부’에 매진하지 않는 나의 생활을 반성하는 동안 어느새 나는 그 사람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내 번호를 저장하면서 닉네임을 뭐라고 할까요, 이쁜이? 낯선 사람의 이름을 이쁜이로 저장하는 이 사람의 정체가 그제야 의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한발 늦었다. 그 사람은 내일 점심을 먹자고 했고, 본인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오면 좋겠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었지만, 그 사람은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며 답을 보류했다. 곧 내릴 거라 얘기가 끊길 것 같아서 그런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리고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게 된 결정적인 한 마디가 있었다. 그 사람이 새끼손가락을 내민 채로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약속은 칼 같이 지키는 거예요.”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과 언제 점심이라도 같이하자는 말을 건네면서 약속을 칼 같이 지키라고 쐐기를 박는다? 이것은 약속 장소에 내가 꼭 나타나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사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고 정하지도 않았단 말이다. 그렇다면 이건 우연한 만남이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내 눈빛에 경계가 쳐지기 시작하자 그 사람이 초조함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너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람이 지하철에서 내린 후, 나는 홀린 듯 주고받았던 전화번호와 카카오톡을 차단했다. 집에 도착할 즈음, 문자가 왔다. 아차, 문자도 얼른 차단했다.

 

지하철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전화번호와 이름을 내어주고 돌아온 이 사건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같이 늙어가는 여성으로서의 동질감 때문에 너무 쉽게 경계를 푼 걸까.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자’라는 나의 신념을 반성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주부’라는 말에서 오는 부끄러움과 죄책감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었던 걸까. 그게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결혼한 남성을 일컫는 말은 ‘유부남’ 하나인데, 결혼한 여성을 일컫는 말은 ‘유부녀’ 이외에도 가사노동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주부’가 자동적으로 따라붙는다. 만약 직업이 없다면 남성은 ‘무직’, 여성은 ‘전업주부’라고 부른다. 만약 ‘주부’가 직업에 속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에게 ‘주부’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기본값처럼 주어진다. 설사 직장을 다니고 있다 해도 퇴근 후에 그럴싸한 밑반찬을 뚝딱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집안에 먼지가 쌓인 것을 발견하면 스스로 ‘주부로서의 자격’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마치 ‘주부는 이러해야 한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주부’는 직업일까, 굴레일까.


올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꼽으라면, ‘주부’라는 말에 지지 않는 것이다. 결혼을 한 지 10년이 되어 가는데도 늘지 않는 나의 요리 실력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한 여자인 ‘주부’라면 요리를 잘해야만 한다는 편견부터 접어둘 것이다. 왜 특별히 배운 적도 없는 요리를 잘해야‘만’ 하는가. 결혼과 동시에 갑자기 요리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주부’라는 말은 사회가 씌워 놓은 투명한 가시덩굴인지도 모른다. 그 투명 덩굴이 하는 일은 따갑고, 갑갑한데 그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덩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모든 여성들에게 골고루 씌워 놓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나만 특별히 따갑고 갑갑한 건 아니라고, 예민하게 굴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재하지도 않은 ‘주부다운 것’, 혹은 ‘주부답지 않은 것’의 환영에서 벗어나는 것이 올봄 나의 숙제이다.


비록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있긴 하지만, 지하철에서 그림자처럼 다가와서 나에게 ‘그냥 주부?’라는 질문을 던진 그분이 새삼 고맙기도 하다. 나는 과연 ‘주부인가 아닌가’를 고민하는 대신, ‘주부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김재연 직장 아닌 직업을 찾기 위해 분투 중. 함께 읽고, 쓰는 연대의 공동체를 꿈꾸고 있음.

 

*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페이지
http://www.yes24.com/campaign/00_corp/2020/0408Essay.aspx?Ccode=000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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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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