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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

엄마와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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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내려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설문지를 진지하게 체크해본 적 있는 사람들이다.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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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듣기만 해도 힘 빠지는 이 말은 우리 엄마의 18번이다. 회사에서든 친구 관계에서든 힘들다는 말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달래곤 하는데, 나는 그때마다 속으로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성격이 되었는데!’ 울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정말 내 강박이 오롯이 엄마 때문인가?’ 자문하고는 혼자 온탕 냉탕을 오가다 김이 새 버린다.

 

나는 좀… 열심히 사는 편이다. 신이 나를 만들 때에는 아마도 후회 없이 살겠다는 다짐 두 스푼과 잘해내려는 마음 한 스푼을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백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양념통 구멍 송송 난 쪽으로 뿌린다는 걸 실수로 큼지막한 쪽 뚜껑을 열어 쏟아버린 게 분명하다. 그 결과 나는 좀… 피곤한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많은 일을 벌이고, 지속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하고, 그 결과 차오른 자아효능감으로 다시 새로운 일을 벌이고, 지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자책하고, 만회하기 위해 다시 일을 벌이고…

 

(내) 문제는 결국 할 거면서, 정작 하기까지 예열이 오래 걸리고 엄살이 심하다는 점이다. 덕분에 처음에는 ‘아이고, 힘들어 어쩌냐’ 발을 동동 구르던 엄마도 내 우는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집안일까지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멘트는 내내 똑같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잘해내려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설문지를 진지하게 체크해본 적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 말고도 집안에 속 썩을 일이 많으므로 나만은 문제를 일으키지 말자는 마음으로 살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나를 포함, 이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사춘기 없이 컸다는 평을 듣는다. 다른 하나는 살아남아야 하는 환경 속에서 잘해내면서 생존해온 경우다. 이들은 대체로 독하다는 평을 듣는다. 어느 쪽이든 한 가지는 같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 잘하려고 애써왔다는 점. (엄마의) 문제는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뒤에 붙는 말이다. “그냥 평범하게만 살아. 평범하게만.”

 

지난 설에 K 컬쳐로 가득한 친척 모임에 갔다가, 먼 조카가 특목고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특목고 출신인 이모랑 이야기해보라는 주변 어른들 부추김에 못 이긴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중에 하고 싶은 거 있냐는 뻔한 질문을 했고, 묻는 순간 질문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답을 기다리는데 조카가 말했다. 자기는 그냥 조금 일하고 조금 벌고 조금 쓰면서 살고 싶다고. 나도 그러고 싶다고 맞장구치면서도 조카의 미래를 믿지 못했다. 조카가 살 미래를 믿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구나. 입학 축하한다는 말 대신 고생했다고 말할걸. 집에 오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고모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나. 고모가 내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고모는 정말 가난했던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중얼거리면서 고모가 지었던 미소를 이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대학 다닐 때도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가끔 그 미소를 떠올렸다. 때로는 충만한 미소로, 때로는 쓸쓸한 미소로 떠올랐다. 자조적인 미소 아니었을까 싶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나를 비웃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어른인 이나는 진심으로 유나를 사랑하고, 가끔 허공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거짓말 아니야. 정말 이 정도면 충분해.


이나는 고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나는 여전히, 자기의 그런 마음을 고모가 전혀 모르길 바란다.


_ 최진영, 『겨울방학』 중에서

 

 “자취방에 있다가 집에 오면 성공한 기분이야. 이렇게 뜨끈한 소파에 누워 TV를 볼 수 있다니.”


오랜만에 본가에 갔다가 진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소파에 전기장판을 깔아 놓은 상태였고, TV에선 〈나 혼자 산다〉가 나오고 있었다. 내 자취방은 실평수 7평의 오피스텔이고, 본가는 방이 세 개다.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얘, 이게 무슨 성공한 집이니. 그냥 평범한 거지. 너, 더 잘 살 수 있어.”


여기서 잠깐, 엄마의 이력을 간단히 읊자면 이렇다. 열심히 그림을 그려 미대를 나왔고, 패션 브랜드에서 일하다가 결혼한 후에는 개인 교습소를 차렸으며, 아이들 계급상승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뒷바라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서울 부동산을 공부하며 사지도 못할 이 집 저 집을 보러 다녔다.

 

그러니까 어머니… 하나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하나만?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라’와 ‘평범하게 사는 게 최고야’와 ‘너, 더 잘 살 수 있어’ 중에 택일해주시면, 인생 견적 내어 사전 품의 드리겠습니다. 결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정연 드림.

 


 

 

겨울방학최진영 저 | 민음사
세계의 불행과 가혹함보다 그 시간을 통과해야만 하는 이들의 말 한마디와 걸음걸이, 쪼개어 자는 잠을 관찰한다.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착하면서 나쁜 마음의 모양들을 소중히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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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정연(도서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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