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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78화 : 이지산은 영리하게 일본어로 대답했다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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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이는 잠든 이지산을 무릎베개하여 누이고 졸다 깨다 하였다. 어째서 그맘때 주위의 몇몇 아는 사람들이 사라질 때마다 찾아보면 모두 만주로 가버렸던 걸까. (2020.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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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이지산과 신금이는 히카리호 특급열차가 압록강을 건너 안동역에서 멎자 열차식당에 갔다. 자리가 예약되어 있었고 작업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아버지 일철이 식당차로 들어왔다. 그들은 음료와 스시를 주문해서 먹었다. 경성에서 신의주까지 오는 길도 멀었지만 이제 갈 길은 더욱 멀었다. 이곳에서 새로 급탄 급수를 받은 기관차로 교체하게 되어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 일철이 아들에게 물었다.

 

 “기관차에 타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네, 아버지 그래두 돼요?”

 

신금이가 말했다.

 

 “우리 자리까지 왕래할 수 있어요?”

 

 “원래 일반여객은 객차에서 기관차로 오갈 수가 없게 되어 있소.”

 

신금이가 지산에게 일러두었다.

 

 “너 아부지하구 같이 기관차에 타면 일등칸으루 못 오게 되는 거야.”

 

 “정말 그래요?”

 

아들의 걱정스런 질문에 일철이 대답했다.

 

 “여기 식당차 앞쪽으로 일등칸이 두 차 있고 그 앞이 전망차다. 거긴 가봤지?”

 

 “네, 거긴 조선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심심해요.”

 

 “응 그래, 그 전망차를 지나면 우편차다. 우편차의 소화물칸 옆에 쪽문이 있는데 기관수들은 그리로 통행할 수 있다. 직원이 동행하면 너두 드나들 수 있지.”

 

이지산은 엄마와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엄마에게 말했다.

 

 “아버지하구 기관차 타구 가다가 지루해지면 엄마 자리로 돌아갈게요.”    
 
신금이도 지산이 오래 전부터 기차에 열광해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 이상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들은 이제 곧 중학생이 될 십대 소년이었다. 일철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일등칸을 지나고 신금이는 일등칸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일철은 지산이를 데리고 전망차를 지나 우편차로 들어갔다. 일철이 우편차에 마련한 휴게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자 철도국 우편직원이 소년을 보고 말했다.

 

 “리노우에 상, 아들인가요?”

 

 “예, 늘 기관차를 보고 싶다고 하여 데려왔습니다.”

 

 “호오, 아버지처럼 기관수가 되고 싶은 모양이구나. 너 이름이 뭔가?”

 

이지산은 영리하게 일본어로 대답했다.

 

 “하이, 리노우에 이케야마입니다.”

 

 “음 똑똑한 아들을 두었군요.”

 

일철은 아들을 데리고 우편실 소화물 칸의 쪽문을 열고 난간을 둘러친 기관차의 저탄저수고 옆 좁은 받침대를 지나서 기관실로 들어갔다. 다행이 그 무렵에도 조선인 기관조수가 배치되어 기관수 일철과 함께 들어서는 지산이를 반겼다.

 

 “어서 와라. 네가 지산이냐?”

 

 “네, 안녕하세요?”

 

일철은 아들에게 기차를 전진 후퇴 시키는 역전기 핸들봉과 그 옆의 브레이크 핸들과 주수기 자동급탄기와 가감밸브 핸들이며 속도계 압력계 같은 계기판들을 일일이 설명해주고, 화구 위의 보일러실에서 물이 끓어오른 수중기가 압축되었다가 내뿜으며 그 힘으로 피스톤을 움직이고 바퀴를 돌려 움직이게 되는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일철은 신호를 받고 기적을 울리고는 역전기 핸들을 당겨 기차를 전진시켰다. 조수가 역에서 넘겨받은 통표를 기관실 뒷벽에 걸어 놓았다. 기차는 점점 빠른 속도로 북을 향하여 달려 나갔다. 봉천까지 드넓은 벌판이 펼쳐졌고 먼 곳에 낮은 구릉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끝도 없이 너른 들에는 온통 옥수수 또는 수수밭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군데군데 농작물이 없이 비워진 들판은 조선의 황토 흙과는 다른 검고 기름진 흑토였다. 대평원은 몇 시간이고 계속되는 것 같았다. 조수가 지산에게 자기가 처음 겪었던 만주의 겨울 풍경을 이야기 해주었다.

 

 “너는 그래두 좋은 계절에 왔구나. 좀 있으면 추워질 텐데 여기선 눈이 빨리 온다. 첨에는 부실부실 탄가루 날리듯 그렇게 오는 듯 마는 듯 하다가 점점 허공이 꽉 차게 빡빡하게 내린다. 눈송이가 커지구 뭉쳐져서 그야말루 어린애 대갈빡만하게 큰 눈송이가 펑펑 펑펑 쏟아진다. 저 온 들판을 가득 채우고 말이지. 여기는 또 별게 아니라더라. 하얼빈 흑룡강 너머 시베리아루 가면 지금 벌써 개천과 폭포들이 얼어붙었을 게다.”

 

 “기관수들은 참 좋겠어요. 먼 나라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구, 낯선 사람들과 도시두 볼 수 있으니까요.”

 

이지산은 눈을 빛내며 말했고 기관조수는 이야기에 흥이 불어났다.

 

 “응 그런데 기관수처럼 위험하구 고된 직업두 없단다.”

 

그는 기관수 일철을 힐끔 보고 나서 말했다.

 

 “비적들이 철로변에 폭약을 묻어놓구 터뜨릴 때두 있다. 내가 화물차 탈 때 얘긴데, 몇 년 전에는 일본 관동군 무장열차가 앞에서 호위를 하며 운행할 때두 있었어.”

 

일철이 헛기침을 하더니 조수에게 한마디 했다.

 

 “급수계 좀 보라구. 물 좀 넣어주고.”

 

조수는 얼른 눈치 채고 신나게 펼치던 이야기를 끊고 자기 일로 돌아가는 시늉을 했다. 이지산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비적들은 어디서 와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긴 일본군 점령지역이라 안전하단다.”

 

일철은 시간이 제법 지나갔다는 걸 알고는 기관수 자리에 걸터앉은 아들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이제 엄마에게 가봐라.”

 

그는 들판을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차의 운행을 조수에게 맡기고 아들을 데리고 통로를 지났다. 곧 우편차 쪽문을 열어 주고는 지산이에게 말했다.

 

 “이제 신경 종착역에 가서 보자꾸나.”  

 

지산은 일등칸의 엄마에게로 돌아갔고 봉천역에서는 홈에 내려 중국인들에게서 뜨거운 차와 만두를 사서 먹었다. 조선의 호떡 비슷한 빈탕훌루를 먹었는데 너무 달아서 꼬치를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황혼녘이 되자 넓고 푸른 수수밭이 펼쳐진 들판 끝으로 세숫대야만한 발간 저녁 해가 천천히 저물었다. 바람에 불린 옥수수 잎들은 바다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며 저무는 햇빛을 받은 부분들이 반짝거렸다. 큰 새 한 마리가 너른 들판 위의 어둑한 하늘 가녘으로 부지런히 날개를 치면서 날아갔다. 잠깐 창문을 열면 열차 지붕 위로 날아 들어온 석탄 연기가 매캐하게 유황냄새를 풍기며 실내에 머물다 사라진다. 신금이는 잠든 이지산을 무릎베개하여 누이고 졸다 깨다 하였다. 어째서 그맘때 주위의 몇몇 아는 사람들이 사라질 때마다 찾아보면 모두 만주로 가버렸던 걸까.     

  
신경역에 내리니 이미 저녁때가 되었고 플랫폼에는 마중 나온 이들이 가득했고 역사 입구에는 이름 적은 팻말을 펼쳐든 이들도 보였다. 신금이와 지산이가 검문과 표 검사를 하는 출찰구의 줄에 서있는데 안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산 에미야, 여기다 여기!”

 

역시 막음이 고모가 낯선 차림으로 출찰구의 인파 속에서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표는 역원에게 신분증은 경찰에게 내밀고 검사 받고 나서 들어서니 막음이 고모가 먼저 조카며느리 신금이를 껴안고는 이내 상반신을 숙이며 지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먼 길에 배고프고 피곤하겠다. 한쇠는 아직 안 나왔나?”

 

막음이 고모는 저 혼자 다 말해놓고 일철을 찾는다고 입구에 가서 두리번거렸다.

 

 “우리 보구 대합실에서 기다리랬어요. 철도 사무국 들러 신고하고 나오려면 반시간쯤 걸릴 거래요.”

 

 “그렇겠구나. 머 걔는 지난달에 봤지만서두.”

 

신금이의 말에 몸을 돌려 다가오는 그녀를 보니 멋드러진 양장차림이었다. 투피스를 입었는데 어깨에 뽕을 넣어 부풀린듯한 남자 스타일의 상의에 몸에 꼭 끼는 스커트를 입었고 위에는 가벼운 천의 가을 코트를 단추 끼우지 않고 걸쳤으며 머리에는 장식 붙은 갈색 모자까지 썼다. 막음이 고모는 금이의 시선을 느꼈는지 자기의 아래 위를 스스로 훑어보고는 푸시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내 차림이 어때서……”

 

신금이가 말했다.

 

 “왜는 옛적 일본 이름이구요. 신여성 되셨네요.”

 

역시 원피스에 반코트 차림인 신금이에게 고모도 한마디 했다.

 

 “너두 양장했구먼 뭘 그래. 한쇠가 일러주든?”

 

 “뭘요?”

 

 “신경 나오려면 양장 입어야 한다구.”

 

그들은 대합실로 들어가 남편이 일러준대로 입구 쪽의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았는데 막음이 고모는 일본어로 ‘고히’ 두 잔과 지산이를 위하여 ‘아이스구리무’를 시켰다.

 

 “얘, 여기선 일본말이 아니면 대접 받지 못한다. 시장에 가면 중국말이 대접 받지만 호테루나 카훼나 차부에선 일본말 써야 고분고분해.”

 

 “조선말은요?”

 

 “마차나 택시 타려고 마부 운전수에게 조선옷 입고 조선말하면 못 알아듣는 척 하구, 아니면 그냥 걸어가라며 안 태워준다. 그러군 만주족 한족 것들이 우리 보구 쑥덕거린다. 망국노라구 그래.”

 

신금이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망국노 맞네요.”

 

 “여기선 그런다더라. 일본인 일등국민, 조선인 이등국민, 만주족 한족 몽골족은 삼등국민이야.”

 

 “저희들두 망국노면서.”

 

하다가 신금이는 시동생 생각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니?”

 

막음이 고모가 물어서 신금이는 중얼거렸다.

 

 “갑자기 이철씨 생각이 나서 그래요.”

 

막음이 고모도 눈이 빨개지고 손수건을 내어 코까지 풀고는 말했다.

 

 “옛날 얘기를 해선 뭘 하니? 에그 불쌍한 것, 내가 그 앨 갓난애 때부터 업어 키웠거든.”

 

 “언제 일본이 망하구 우리나라가 독립이 될까요?”

 

 “쉿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마라. 누가 들을라.”

 

 “지금 일본이 막 지구 있대요. 곧 패망한다든데 멀.”

 

막음이 고모가 목소리를 낮추어서 조카며느리에게 말했다.

 

 “넌 알겠구나. 너 아직두 헛것 보구 그러냐?”

 

 “고모님두 그러시잖아요?”

 

 “근데 여기 와선 올케를 한번두 본 적이 없구나. 너무 멀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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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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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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