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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다양한 이야기를 접해야 완성된 인간이 됩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출간 기념 방한 문학으로 배운 정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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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페미니스트이자 작가이고,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선택한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이야기꾼이라는 정체성을 더 가까이 여기고 있어요. (2019.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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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문장이다. 페미니스트 소설가인 그의 작품에는 꾸준히 인종, 여성, 이민자가 중요한 주체로 등장한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  『엄마는 페미니스트』  등 유명한 에세이가 많지만,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페미니즘은 정의 구현 운동”이라는 그의 믿음은 소설에서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향력 있는 인물,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얼굴, 영미 문학의 차세대 작가….’ 수많은 수식언 중에서 문학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자 페미니스트이기에 기쁜 사람이면서, 문학을 쓰고 읽는 사람이어서 더욱 기쁜 아디치에가 보였다. 2019년 8월  『보라색 히비스커스』  출간을 기념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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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어땠나요?


인상을 갖기에는 너무 짧았죠. 그래도 ‘돌아와 보고 싶다’는 감정이 든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에 갈 때면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지 아닌지, 그리고 어떤 시선으로 쳐다보는지를 의식하게 돼요. 선의의 호기심으로 볼 때가 있고, 적대감이 느껴질 정도로 노려볼 때도 있는데, 서울에 오니 제가 근방에서 유일한 흑인이었음에도 제 존재가 매우 당연한 것처럼 저를 쳐다보지 않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환영해 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한국의 패션을 늘 좋아했어요. 한국 여성들의 스타일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한국 정치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서 산책하면서 거리에 걸린 현수막을 유심히 봤어요.


『보라색 히비스커스』  가 나온 지 15년이 됐습니다. 작품을 지금 보면 어떤가요?


이 질문을 받고 나서야 제가 나이가 들었구나 싶어요. 세월이 지나고 다 큰 자식을 대학에 떠나 보내야 하는 심정이 드네요. 나이지리아를 떠나온 지 4년쯤 된 상태에서 이 소설을 썼는데, 정말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가난한 유학생이어서 집에 갈 수도 없었고 집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었죠. 그러나 여전히  『보라색 히비스커스』  가 제게 소중한 이유는, 그 시절 향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그때 감정이 소중하게 남아 있어요.


작품을 보면서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독자라면 어느 정도 궁금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독자로서 책을 읽으면 작품에 어느 정도나 작가의 인생이 들어간 건지 궁금해하니까요.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설을 썼다면, 그건 칭찬으로 받아들여야죠. 그러나 『보라색 히비스커스』  와  『아메리카나』  는 자전적인 소설이 아니고, 내레이터와 저를 동일시하지는 않아요. 일반적으로 나이지리아인이 아닌 사람들이 제 소설을 읽을 때, 나이지리아에 대한 지식이 워낙 없고 자신이 읽는 게 나이지리아의 전부라는 인식을 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기는 거라고 보는데요. 제 인생의 요소가 들어갈 수는 있겠죠. 그러나 저는 아닙니다. 제 인생은 단조로운 편이죠. 소설 속 주인공처럼 흥미진진한 인생을 살진 않았어요.


작가님의 소설로 나이지리아를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소설로 인해 나이지리아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는 걸 우려하진 않나요?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는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책을 쓴 것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픽션을 쓰지만, 진실을 말하기 위해 픽션을 쓰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나이지리아를 긍정적으로만 보이게 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로지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만 소설을 써요. 이 진실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모두 혼재해 있다고 생각해요. 그중 나쁜 것만 보게 된다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끔 그런 일이 발생하고는 하죠. 예를 들어  『보라색 히비스커스』  만 읽고 나이지리아의 모든 남성이 다 폭력적이고 약자를 학대한다고 여긴다면, 일반화하려는 독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어떻게 책 한 권만 읽고 모든 나이지리아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어요?


소설에 나이지리아의 역사와 상황을 언급할 때가 많습니다. 자료 조사는 어떻게 하나요?


글을 많이 읽어요.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도 그 시대 배경에 대해 관련된 모든 책은 다 찾아 읽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 더해 사람들을 많이 인터뷰했어요. 전쟁이 언제 어떻게 발발했고, 당시 외교 정책이 어땠고 그게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책을 통해 알지만, 소설가로서 관심을 갖는 건 전쟁이 발발한 그날, 군인들이 마을에 쳐들어온 날에 이 사람은 아침에 무얼 먹었나, 이런 것들이거든요. 『보라색 히비스커스』  는 제가 나이지리아에 살던 시대를 그리면서도 인터뷰를 통해 제가 기억하는 게 맞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자료 조사를 하는 게 힘들진 않나요?


끔찍할 정도로 재미없는 작업이죠.(웃음)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의 배경이 된 시기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역사 시대가 아니에요. 아직도 해석이 분분하고 논쟁이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제대로 묘사하고 싶었어요. 사실이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으면 책 전체가 무시당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열심히 취재를 했죠.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를 보면서 한국의 ‘대하소설’이 떠올랐어요. 한국에서는 주로 남성 소설가가 대하소설을 쓴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서양 문학에도 그런 편견이 있을까요?


서양에도 대하소설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대개 시리즈로 되어 있는 장편 소설은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거나 SF, 영어덜트 소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신 남성 작가는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룬다는 편견은 있는 것 같아요. 서평만 봐도 작가가 남자면 굉장히 무겁고 중요한 주제를 다룬다고 여기는데, 같은 전쟁이 배경이 된다 하더라도 여성 작가가 쓰면 더 가벼운 주제를 다룬다고 여기는 식이에요. 작가의 성별이 달랐다면 서평도 다르게 나왔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서평을 보고 실망하실 때가 있나요?


다른 책의 서평을 보고 실망할 때가 있어요. 제 책은 리뷰를 보지 않아서요.


리뷰를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화내기 싫어서요.  『보라색 히비스커스』  가 나왔을 때 리뷰 하나를 읽었어요. 칭찬 일색의 리뷰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틀린 말이 한 줄 적혀 있더라고요. 그 한 줄에 제가 너무 집착하게 되고, 쫓아가서 이 말은 틀렸다고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요. 작품에 대한 리뷰를 읽는 게 에너지 소모가 심해요. 아무리 칭찬을 받더라도 차기작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누군가 저보고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고 한다면, 다음 작품을 쓸 때는 인물 묘사에 좀더 신경을 쓰게 되죠. 그런 영향이 늘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요.


책을 발표하기 전에는 조언을 많이 들으시는 편인가요?


제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 제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들의 의견은 매우 잘 경청하는 편이에요. 제 소설을 그들의 눈을 통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제가 놓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케냐 작가인 빙야방가 와이나이나(Binyavanga Wainaina)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는데, 몇 달 전에 작고했어요. 차기작을 그분한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단편 소설, 장편 소설을 쓸 때 차이점이 있을까요?


오히려 단편을 쓰는 게 더 오래 걸릴 때가 있어요. 10년 전 시작했지만 아직 끝내지 못한 단편소설도 있거든요. 단편은 쓰다 막히면 묵혀뒀다 다시 꺼내보고는 하지만, 장편 소설은 소설과 제가 같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아요. 소설과 함께 일상을 사는 기분, 소설과 같이 호흡하는 기분이 들죠. 다 쓰고 탈고를 끝내고서도 감정의 잔재가 남아있기도 하고요. 단편은 좀더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 같아요. 끝나면 손 털고, 그럼 정말 끝인 거죠. 소재도 좀 다른 것 같아요. 어떤 목소리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건 장편감이다’ ‘이건 단편감이다’ 하는 생각도 같이 오거든요.


문예창작학과 아프리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어요. 학교에서 배울 때와, 실제로 글을 쓸 때와 차이점도 궁금합니다.


석사 학위 과정을 문예 창작(creative writing)으로 받을 당시 이미 소설로는 데뷔한 상태였어요. 제 이름으로 된 소설책이 나온 상태에서 다음 작품을 쓸 시간과 공간, 환경이 필요해서 학교로 돌아간 건데, 그래서 미움을 받은 것 같기도 해요. 문예창작을 배우려고 온 사람이 이미 소설을 출판했다는 건, 사람들이 지지하고 응원할 만한 스펙은 아니었거든요. 석사 과정은 제게 시간과 여유, 공간을 주었지만, 거기서 배운 것들이 늘 작가로서 도움이 되지는 않아요. 특히 미국에서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어떤 구조나 프레임에 순응하고 거기 맞춰가는 훈련을 받는 것 같아요. 학교를 나오고 나서는 제가 배운 걸 소설에 실천하기가 싫어지더라고요. 특히 비판을 너무 신중하게 받아들이거나 자신감이 없는 작가들은 문예창작학이 작가로서의 길을 망칠 수도 있어요. 학교에서는 다 같이 품평회를 하면서 동일한 지점에서 렌즈를 끼고 보기 때문에 특정 부분이 모호하거나 논쟁적이라는 문제제기를 하죠. 하지만 그런 걸 다 빼고 나면 글이 다 똑같아지고 밋밋해지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깔끔하다 하더라도 지루한 글이 돼요. 작가라면 논쟁적으로 쓰거나, 애매하게 써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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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하지 않은 세계관이 생기려면


<뉴요커> 기사에서 “왜 세계는 지금 아프리카 문학에 열광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첫 번째는 아프리카 작가들이 영어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을, 두 번째는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인 흑인들처럼 “화나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았습니다. 이런 해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첫 번째 이유에는 저도 동의해요. 누군가는 저에게 왜 모국어로 문학을 하지 않고 영어로 소설을 발표하느냐고 묻죠. 영어는 나이지리아의 공용어이고, 학교에서 영어로 모든 것을 배우기 때문에 영어는 나이지리아의 언어예요.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나이지리아를 식민지화했기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우리 언어로 만들었어요. 두 번째 이유는, 미국계 흑인들이 왜 더 화가 나 있는지도 이해해야 해요. 너무 오랫동안 국가의 인종차별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당연히 화가 나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저도 그런 역사를 접했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미국계 흑인들이 덜 객관적이라는 게 아니에요. 객관적인 진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백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편견이 나타나고, 백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미국계 흑인이 쓴 소설이 많이 발표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활동할 때마다 미국계 흑인으로 패싱되거나, 나이지리아인이 아닌 아프리카인으로 통칭해서 불릴 때 피곤하진 않나요?


저를 미국계 흑인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무식한 것이겠죠. 저는 미국에 사는 아프리카인일 뿐이에요. 흑인을 백인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보는 사회에서 인종차별을 일상적으로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과, 대부분 절대다수가 흑인인 사회에서 살아간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인종과 자아에 대한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고요. 가끔 저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해달라고 초청이 들어올 때가 있어요. 저도 인종차별에 대한 불편은 있지만, 나이지리아에서 자랐기 때문에 인종차별은 제 일상이 아니었어요.


아프리카인으로 불리는 것은 맥락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아프리카에도 다양성이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이해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귀찮아서 저를 아프리카인으로 부른다면, 물론 짜증이 나죠.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저를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부르는 건 일종의 자부심의 발로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보면서 아프리카 인으로서 전세계로 책을 출판할 수 있겠다고 희망을 갖는 건 저에게도 굉장히 희망찬 일이에요.


사람들이 더욱 많은 다양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프리카 문학이 조명을 받는다고도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디아스포라 문학이 점차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시는 편인가요?


너무 늦게 찾아온 관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도 자라면서 러시아 문학, 미국?영국?인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랐어요. 그런 이야기를 사랑했고,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나이지리아같이 세계 경제 지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 나라라면 계속해서 외부에서 콘텐츠가 들어오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나라가 전부가 아니고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세계 경제 중심에 있는 나라에서도 문화적 다양성이 계속 흘러야 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접해야만 완전한 세계관, 편협하지 않은 세계관이 생기고 완성된 인간으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  『엄마는 페미니스트』  가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페미니즘 활동가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인식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어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와  『엄마는 페미니스트』  는 얇으니까요. 제 소설은 두껍고요.(웃음) 저는 페미니스트이자 작가이고,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선택한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이야기꾼이라는 정체성을 더 가까이 여기고 있어요. 

 

하버드 연설에서 “문학은 나의 종교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늘 그래 왔던 것 같아요. 저에게는 문학과 소설이 늘 인생의 길라잡이였어요. 많은 것을 소설로부터 배웠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거나 공부를 싫어한 건 아니지만, 인생에 있어서는 학교보다 소설로 더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치관도 소설을 읽으면서 형성됐고, 인생에 교훈을 얻었거나 하는 건 다 소설을 통해서였어요. 소설을 통해 정의와 평등을 믿게 되었고, 소설을 통해 모든 인간은 인격체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걸 믿고 배웠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소설이 제 인생의 스승인 거죠.


도서관에 책을 보내는 재단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재단(Purple Hibiscus Trust)’에서 그 일을 하고 있어요. 나이지리아 도서관에 책을 채워 넣는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책을 보내는 운동뿐 아니라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춘, 여성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워크숍이나 행사를 많이 하고 싶어요. 지금 하는 워크숍도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여성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게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는 워크숍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프리카 문학계에서만 해도 제가 잘 알려진 작가 중 하나지만, 다른 작가들은 거의 다 남성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창작 워크숍으로 여성 작가를 양성해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발언하고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해요. 목소리를 낼 환경과 자신감이 없으면 그게 작품에도 영향을 미치거든요. 문학 작품이 아니더라도,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원서를 내는 것조차 망설여요. 안 될 거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는 거죠. 반면 남자들은 “뭐 어때!” 하면서 해버린단 말이에요. 그런 자신감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이 야망을 가지는 것이 괜찮고, 좋은 일이라는 걸 말하는 워크숍을 하고 싶어요. 시내에 나가면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하는 야심 찬 여성들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돈이 없어요. 재단을 통해 사업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는 일도 하고 싶어서 나이지리아 대출제도에 관해 공부하고 있어요.


 


 

 

보라색 히비스커스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저/황가한 역 | 민음사
그녀만의 독특한 건강하고 주체적인 여성적 자아의 에너지가 물씬 풍긴다. 대중적인 플롯과 편안한 문체를 선택해 문학적인 성취와 동시에 세계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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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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