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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딧물은 어디에서 오는가

도처에 스승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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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가 어떻게 오는지, 나쁜 날씨가 어디서 오는지, 나쁜 인간이 어떻게 세상에 ‘돋아’나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튼 계속, 주시할 거다. 진딧물! 우리 명자 씨를 괴롭히면 못 쓴다고! (2019. 05. 30)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활짝 꽃 핀 명자나무를 본 적 있는가? 불붙은 꽃다발처럼, 황홀하다. 동백은 영롱하고 벚꽃이 화사하다면, 명자나무는 분방하게 아름답다. 말괄량이처럼 뛰어다니며 피는 꽃 같달까. 내가 다니던 대학 교정은 자그마했는데, 봄에 꽃이 피면 볼만했다. 그 중 커다란 명자나무 한 그루는 유독 빛났다. 근처에 명자나무 볼 곳이 없어 서운한 차에, 인터넷으로 명자나무 분재를 살 수 있었다. 살아있는 나무를 택배로 받는다는 게 믿기지 않아, 화원 주인과 직접 통화해 보았다. 오는 도중에 죽지 않을까 물었더니 절대 죽지 않는단다. 믿어보기로 하고 이렇게 당부했다. “꽃이 다 핀 건 싫어요. 봉오리가 많이 맺힌 애, 천천히 기다릴 수 있는 애로 보내 주세요” 주인은 내 말투를 이어받았다. “네. 봉오리 많은 애, 예쁜 애로 보내드릴게요.” 모르는 사람과 뭔가 은밀한 거래를 한 듯, 두근거렸다.

 

꽃 화분을 택배로 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니! 이걸 우리 할머니가 보고 돌아가셨어야 하는데. 상자를 열자마자 “명자 씨! 명자 씨!” 외치며, 화분 주위를 뛰어다녔다. 꽃송이가 많이 달린 ‘예쁜 애’였다. 그런데 봉오리가 많지 않았다. 그 사람 거짓말쟁이 아냐? 스티로폼을 치우는데, 바닥에 명자나무 봉오리들이 우수수 떨어져있었다. 아까워라! 이걸 어떡하누! 할머니처럼 구시렁구시렁하며, 떨어진 봉오리들에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떨어진 놈들을 주워 돌절구에 넣고 물을 부었다. 며칠은 살 수 있도록.

 

환한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명자나무 꽃이 생각보다 쉬이 졌고, 이파리는 시들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치길 몇 날. 잎이 너무 처진 같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럴 수가. 진딧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야, 너희들 정말 양심이 있어, 없어? 응? 이렇게 예쁜 명자나무에! 다닥다닥 붙어서! 응? 이 양심도 없는 것들아! 너네 다 죽었어.”

 

성난 파리처럼 파닥이던 스스로를 돌이켜보니, 부끄럽다. 그 순간만큼은 진딧물이 파렴치하다고 느꼈지만, 진딧물에게 무슨 양심이 있겠는가? 나는 진딧물 퇴치 약을 찾아 분사했다.  삼일 정도 뿌려주니, 이파리는 되살아났다. 2주일 뒤 또 다시 명자나무가 시들해서 보니, 진딧물이 또 퍼진 게 아닌가. 그것도 새로 돋은 연한 잎에만 집중 포진! 왜 자꾸 진딧물이 생기는 거지? 그것도 명자나무에만. 애초에 명자나무가 올 때 진딧물이 함께 온 건가? 그럼 그 화원에서는 주문하지도 않은 진딧물까지 배송한 거야? 

 

오후에 동네 꽃집에 들렀다. 주인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진딧물을 ‘완전 박멸’할 방법을 물었다. 그는 가루약 두 봉지를 꺼내더니 분무기에 넣고 물에 희석해 뿌리라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전에도 약을 뿌려 없앴거든요. 근데 또 생긴 거예요.”


 “새싹에 주로 붙어있죠?”


 “네! 연한 잎에만! 얄미워 죽겠어요.”


 “원래 그래요. 손님도 샐러드 먹을 때 연한 잎이 좋아요, 안 좋아요?”


 “뭐… 연한 잎이 맛있긴 하죠.” 


 “진딧물도 마찬가지죠. 손님 집이 식물 키우기에 좋은 여건이란 뜻이기도 하니, 괜찮아요.”


 “(괜찮다고?) 아니, 그런데요. 도대체 진딧물은 어디서 오는 거예요? 원래 우리 집에 진딧물 같은 건 없었단 말이에요.”


 “손님. 그럼, 감기 바이러스는 어디서 오나요?”

 

순간 정적.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하,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미소를 지은 채 손질하던 꽃에서 눈을 떼지 않는 주인. 우문현답이다. 도처에 스승이로군. 나쁘다고 모조리 도려낼 수야 없다. 그런 마음을 먹은 내가 오만한 거지. 어쩌면 진딧물의 입장에선 나야말로 양심도 없는 인간일지 모르겠다. 좀 살아보겠다고 잎에 붙었는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박멸을 부르짖었으니. 나는 진딧물계의 히틀러가 아닌가?

 

바이러스가 어떻게 오는지, 나쁜 날씨가 어디서 오는지, 나쁜 인간이 어떻게 세상에 ‘돋아’나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튼 계속, 주시할 거다. 진딧물! 우리 명자 씨를 괴롭히면 못 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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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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