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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을 타기 위한) 산책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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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봄이 오면 ‘봄바람’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봄철에 불어오는 바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2019.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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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그 오빠랑 이 앞에서 만나 산책을 시작하곤 했는데.” 하며 멈춰 섰다. 같이 걷던 친구들도 나를 따라 멈췄다.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길 근처에 움푹 들어간 흙길이 있었다. 바로 위에 가로등이 있었지만 그 자리는 그림자가 지는 쪽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쉽게 지나칠 공간이었다. “여기 이쪽 구석에 오빠가 숨어있으면 내가 저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걸어왔었지. 그 오빠가 여기 나와있는지 안 나왔는지는 코가 먼저 알았어. 늘 뿌리던 향수가 있었거든. 나는 그 향이 너무 좋았어. 오빠 졸업한 뒤로 그 향수 냄새가 그리워서 내가 쓰기 시작했었는데 10년 넘도록 아직도 쓰고 있잖아.”

 

지난 주말에는 친구들과 모교에 다녀왔다. 우리들은 담양에 있는 대안학교를 졸업했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기숙사에 살았다. 1000일을 넘게 함께 살았으니 거기에 가면 말이 많아지곤 한다. 기숙사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만으로도 이야깃거리는 충분한데, 그곳이 시골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더 풍성해진다. 논두렁 한복판에 학교가 있고 주변은 대나무 밭이나 숲, 노인들이 사는 집이 띄엄띄엄 있었다. 걷다 보면 저수지나 개울이 나오기도 하고 읍내는 30분 넘게 걸어가야 했다. 나와 친구들은 대도시에서 살다 온 십대 후반의 아이들이었다. 그런 애들이 피씨방이나 노래방 심지어 제대로 된 마트도 없는 산골창에서 만든 이야기는 저들에게 각별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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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좋았지.” 친구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봄바람,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는 봄바람이라는 말이 있었다. 처음 들은 사람은 ‘봄바람이 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봄바람은 ‘봄이 되어서 불어오는 바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 기숙사에서 선배들이 “봄바람 불어올 시기가 됐다.” “걔랑 걔랑 봄바람이라며?”

“와, 그 둘, 봄바람이 생각보다 세게 부네?” 하면 무슨 소린가 싶었다. 내내 선배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알 것 같았다. 무슨 뜻이냐고 물은 적이 없지만 언제부턴가 나와 친구들도 자연스레 그 단어를 쓰고 있었다. “나 요즘 봄바람 탄다?” “그 오빠랑 봄바람이야?” “나도 봄바람 타고 싶다.”

 

봄바람을 타는 방식은 단순했다. 시골 한복판에서 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산책을 가자고 말하는 것. 그게 봄바람의 시작이었다. 여러 사람의 눈과 귀가 모여있는 학교에서 나와 숲으로 향하든, 산자락을 걷든, 벗어나야 했다. 그래야 둘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차도 없고 운전도 할 줄 모르니 하염없이 걷는 일로 둘의 시간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 얘기를 들은 누군가 “아이고, 귀여운 학생들이었네.” 라고 간단히 말해버리면 어쩐지 서운할 것 같다. 가물거리긴 하지만 그때 우리들에게는 그 산책이 우주의 전부였다. 산책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들이 시작되었다.

 

일과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묵학(야자)을 했다. 내 경우에는 그 시간에 산책하는 걸 가장 좋아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몰래 도서관에서 나왔다.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다가 잽싸게 샛길로 빠졌다. 빠른 걸음으로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대나무 숲 옆의 움푹 들어간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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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다가 저 멀리 학교 사람들이 보이길래 남의 집 대문 뒤로 숨었던 날이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조마조마하다. 둘이 숨을 죽이고 대문 뒤에 붙어 있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급히 들어오긴 했지만 남의 집 마당이었다. 집 안에서 사람이 나오면 어쩌지, 저 멀리 오는 학교 사람들이 우리를 봤을까, 소근거리며 한동안 나란히 서 있었다. 함께 걸을 곳을, 같이 걷기 위해 기다리던 자리를, 사랑을 속닥거리기에 알맞는 단어를 찾아낸 우리들은 정말 대단했지.

 

오늘, 이 원고를 쓰면서 처음으로 ‘봄바람’을 사전에 찾아봤다. 첫 번째 뜻은 ‘봄철에 불어오는 바람’이고 두 번째 뜻으로 ‘봄을 맞아 이성 관계로 들뜨는 마음이나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있었다. 사전에 있던 말이구나. 이따 저녁에 홍대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 알려 줘야지. 다들 놀라겠지? 날이 따뜻해지고 있다. 봄바람을 이야기하던 세 번의 봄은 지나갔고, 서울에서 맞이하는 열두 번째 봄이 오고 있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려서 토요일 12시쯤 학교 끝나고 집에 느릿느릿 걸어올 때 그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있고 문방구의 먼지 낀 창 너머로 장난감들의 알록달록한 빛깔들이 눈에 들어오고 생각이라곤 '오늘은 뭘 하고 놀까?' '집에 가면 엄마가 뭘 맛있는 걸 해놓았을까?' 그런 것뿐인, 그때의 여유와 에너지가 좋았습니다.(167쪽)
-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중에서

 


 

 

사생활의 천재들정혜윤 저 | 봄아필
‘사생활’로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희망은, 가장 현실적이고 아주 작은 그러나 가장 또렷하게 손에 잡히는 일상의 순간들이다. 이 책은 그 일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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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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