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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에요, 사월이고요

속이 편치 않을 때는 언제라도 나무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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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바라기처럼, 모가지를 틀어 열렬히 보죠. 고요히 한곳에 서있는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시끄러운 마음이 진정되거든요. (2019. 04. 04)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봄이에요. 사월이고요.

 

삼월 중순에서 사월로 넘어가는 시기. 저는 이맘 때 ‘봄의 부레’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봄을 봄으로서 헤엄치게 하는 부레, 천지에 봄을 ‘둥실’ 띄우는 부레!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이때 돋아난다고, 뻗치고 도톰해진다고 믿어요. 가령 어린 나뭇잎들. 아주 쪼끄마한(이 형용사의 앙증맞음을 보세요!) 어린잎이 제법 돋는 시기죠.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 마음이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넘어진 마음이 기대는 것은 역시 이파리들이지요. 그 동안 어디에 있었니! 이 작고 귀여운 것들아! 주책과 호들갑을 떨며 감탄하는 것은 제 의지로 어쩔 수 없어요. 어여쁜 걸요. 제가 사월을 편애하는 이유입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갓 돋아난 어린잎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신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신이 어딘가,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운운.

 

이맘 때 창문은 ‘막(幕)’이 아닙니다. 닫는 도구가 아니라 여는 도구. 나를 세상 밖으로, 세상을 내 안으로 흐르게 하는 ‘연결 고리’가 되지요. 창을 통해 제가 보고 싶은 건 장엄한 산도 거대한 바다도, 어여쁜 당신 얼굴도 아닌, 한 그루의 나무입니다. 화곡동에 살 때 3층 작은 창으로 오래 된 감나무가 보였어요. 빛을 받으면 큰 잎사귀에 윤기가 흘렀지요. 서교동 살 땐 거실 창으로 앞집 뜰에 핀 자목련과 라일락이 보였고요. 그 집 진돗개가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 골치가 아팠지만, 자목련과 라일락 때문에 용서가 됐어요. 지금 사는 파주 집 침실 창으론 잘생긴 매화나무 한 그루가 보여요. 삼월 중순 지나니 홍매화 꽃눈이 가지마다 다닥다닥 맺혀  두근거리게 했지요. ‘봄의 신호탄이로군!’ 속으로 외쳤지요. 아침마다 창가에 붙어 매화나무를  먼저 살폈습니다. 꽃눈은 조금씩 커지더니, 3월 마지막 주부턴 ‘팟팟’ 피어났지요. 파주는 서울보다 온도가 낮아 나무들이 느리게 핀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그것이 알고 싶다 톤). 상상해 본 적 있으세요? 놀이동산 조명이 차례로 켜지듯, 맨 남쪽부터 시작해 ‘팟’ ‘팟’ ‘팟’, 순서대로 피어나는 꽃나무들을요. 눈 감고 이따금 상상합니다. 그리고 기다리죠. 파주 나무들의 순서를요! 벌써 매화는 상당히 피어났어요. 목련은 조금 더 느리고요.

 

속이 편치 않을 때는 언제라도 나무를 봅니다. 나무바라기처럼, 모가지를 틀어 열렬히 보죠. 고요히 한곳에 서있는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시끄러운 마음이 진정되거든요. 그쪽을 아무리 바라봐도 나무는 이쪽을 보지 않기 때문일까요? 제 눈길을 받아치지 않고, 다만 침착하게 서있는 존재. 나무는 스스로에게만 열중하는 존재니까요. 딱정벌레, 버섯, 지렁이, 청설모도 나무에게 의존하죠. 개미들은 나무기둥을 ‘고속도로’ 삼아 오르내리고, 새들은 둥지를 틀며, 이따금 뱀이 축축한 몸을 말리기도 하겠지요. 나무는 ‘그러려니’ 할 겁니다. 무심히 서서, 자기 할 일을 하죠. 꽃과 잎을 피우고, 떨어트리는 일. 바람 불면 흔들리고, 비 내리면 젖는 일.

 

 “나무와 이야기를 나눌 줄 알고, 나무에 귀 기울이며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진실을 알게 된다. 나무들은 무슨 교훈이나 처방 따위로 설교하지 않는다. 개별적인 일에는 무심하면서도 삶의 근원적인 법칙을 알려준다. (중략)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이제는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 처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 헤르만 헤세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149-151쪽.


스무 살 무렵엔 자주 가는 공원에 ‘황금나무벤치’라고 부르는 벤치가 있었는데요. 벤치 옆, 가로등 불빛을 받은 작은 나무가 꼭 ‘황금나무’처럼 보여 그렇게 불렀어요.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주로 밤에, 황금나무벤치에 앉아 있었어요. 시간을 보냈죠. 일도 없이. 그냥 밤이 흐르는 것을 보았어요. 어떤 시간은 그저 ‘흘려, 보내는 것’이 최선임을, 그 나무 아래서 알았죠.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어떤 나무든, 오래 보고 있으면, 사람을 조금 지혜롭게 만드나 봐요. 10년이 훌쩍 지나, 그 공원을 지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황금나무라고 부르던 그 나무, 그 벤치, 그 공원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거든요. 황금나무벤치가 변한 게 아니라, 제가 변한 거겠지만. 

 

봄이에요. 사월이고요. 사월이 너무 좋아서, 단 하루도 슬프게 지내지 않을 거예요. 나무를 실컷 보겠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린잎이 ‘어린 잎’으로 보내는 때는 아주 짧아요. 금세 지나가죠.

 

가끔 사람도 한 그루, 두 그루 세고 싶어요. 내 쪽으로 옮겨 심고 싶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흙처럼 붉은 마음을 준비하겠어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헤르만 헤세 저/두행숙 역 | 웅진지식하우스
그의 숨겨진 삶을 따라가다 보면, 왜 인간의 성장기를 자연에서 보내야 한다 말하는지, 그리고 인생의 성숙기가 오면 누구나 자연을 찾아가려는 마음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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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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