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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고] 어쩌다 어른이 돼버렸다 – 번역가 박산호

<월간 채널예스> 2018년 11월호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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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다 보니 어른이 돼버렸다.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상한 어른으로 변해가는 건 아닌지 가끔 스스로를 점검한다. (2018.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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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는 별 생각 없이 살았다(은하철도 999와 미래소년 코난과 요술공주 밍키가 없었다면 내 유년은 좀 더 다크했을 듯). 10대 때는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 이 징글징글한 입시 공부를 끝내고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대학만 가면 어른들 말처럼 살이 빠지고 드라마에서 보는 그런 세련된 여대생이 될 줄 알았다. 어른들 말이라고 다 믿으면 바보 된다.

 

고대하던 대학생이 됐지만 대학만 가면 살이 빠지기는 개뿔! 서울에는 신묘하고 맛난 것 천지였다, 거기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맛본 술은 날이 갈수록 달고, 술안주는 또 왜 그리 입에 쩍쩍 붙던지. 결국 살이 저절로 빠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시골에서 보내준 생활비는 밥과 술 사먹기 바빠서 촌스런 패션 센스도 업그레이드하지 못했다. 열심히 술 마시며 책 읽고, 틈틈이 연애하다 번듯한 곳에 취직도 못하고, 이렇다 할 실력도 없이, 주량만 맥주 반잔에서 소주 2병으로 늘어난 채 20대가 훌쩍 가버렸다.

 

30대가 되니 어느새 주위 친구들, 특히 시골 동창들은 다 결혼하고 나만 독야청청 싱글이었다. 남들 다 하는 결혼 너만 못할지 모른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시달리다 뒤늦게 결혼해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아이부터 낳으라는 주위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떠밀리던 차 마침 아이가 들어섰다. 그때부터 육아와 살림과 일이란 세 가지 묘기를(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동시에 해보겠다고 용을 쓰다 30대가 지나갔다.

 

30대는 지금 생각해도 몹시 어정쩡한 나이. 20대까지는 젊다고 용서받던 실수나 허물도 30대부터는 좀 더 엄격한 잣대로 판단 받게 된다. 20대엔 나 한 몸 챙기기도 숨이 가빴는데 30대는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라는 미션을 다 클리어하고도 남는 기운이 있으면 좋은 딸까지 돼야 했다. 10대는 입시 공부하느라 힘들고, 20대는 취직해서 자리 잡느라 힘들었지만 정작 힘든 시절은 30대부터 시작이라는 걸 그땐 정말 몰랐다.

 

그러다 얼렁뚱땅 40대로 들어서자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어른이 돼버린 것이다. 더 이상 어리다는 변명이나 핑계가 통하지 않는 시기. 본격적인 어른의 나이. 그때야 비로소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어른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어른은 뭘까? 내게 어른이란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나 책임이 버겁다고 도망치지 않고 묵묵히 지고 가는 사람. 아래로는 아이들을 보살피고 위로는 노인들을 배려하는 사람. 사고를 치는 사람이 아니라 수습하는 사람, 제 한 몸뿐만 아니라 딸린 식구들까지 챙길 수 있는 사람. 권위가 아니라 행동으로 이끄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노력했다. 내 깜냥으로 해결이 안 되는 걸 붙잡고 힘들다고 온 세상에 대고 투정하길 멈추고 날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들을 정리하고 내가 감당하고 지킬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러면서 크거나 작은 일들이 터져도 허둥대지 않고 대처하는 법을 익혔고, 불안을 다스리는 법을 연습하면서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를, 내게 의지하는 이들을 다독이는 법을 깨우쳤다. 사춘기와 갱년기라는 두 개의 지옥을 함께 통과한 전우로서 딸아이와 교양인처럼 우아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됐고, 가능한 오래 즐겁게 살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다.

 

어른이 되는 건 마냥 힘들고 재미없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또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른이 되니 마음의 맷집이 늘어 남들의 지나가는 불쾌한 말 정도는 가볍게 흘려듣는 내공이 생겼고, 나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서 편해졌다. 예쁘고 날씬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대체 여자는 언제까지 그렇게 예뻐야 하는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익힌 것들이 축적돼 세상에 어느 정도 쓰임이 되는 걸 느끼는 보람도 알았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다 보니 어른이 돼버렸다.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상한 어른으로 변해가는 건 아닌지 가끔 스스로를 점검한다. 그러다 후배들에게 선배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말을 간혹 들으면 유치하게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른으로서 마지막 남은 숙제가 있다면 딸이 보기에 부끄러운 엄마가 아닐 것, 이 정도다. 멋진 어른이란 이 생을 떠나는 순간까지 미완성일 테니 나는 조금 더 그쪽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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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산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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