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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인간

상황에 휘둘리던 내 모습도 진짜 내 모습이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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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과 여건이 개인에게 부과하는 압력을 인식하는 태도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일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하지만 태도의 올바름에 기대어 자기 몫의 책임으로부터 눈 돌리는 일은 진일보 했던 걸음을 다시 반걸음 되돌리는 일이다. (2018. 06. 22)

얄팍한 인간.jpg

            언스플래쉬

 

거절하는 일도 고역이다. 부탁하는 입장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매번 거절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다. 인터넷 서점 MD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가 '거절의 고충'을 견디는 힘이다. 책의 가치와 입지를 이해하는 일, 시장의 흐름을 읽는 일, 적절하게 판매계획을 수립하고 재고를 관리하는 일보다 중요하지야 않다.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자질이다. 다른 능력들이 '책'이나 '출판사/서점'을 위한 것이라면, 거절의 힘겨움을 견디는 능력은 '나'를 위한 것이다.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이 쌓이면 자신의 마음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주문수량과 도서 노출에 대한 부탁은 끝없이 밀려온다. 한 권의 책이 출간되면 그만큼의 부탁도 태어난다. 일부를 제외한다면 부탁은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다. 따끈따끈한 책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면 부탁이 밀려온다. 친근감 있게 바라보는 눈으로부터, 열정이 배어 다소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부터, 끝내 "다른 책보다 눈여겨 봐주세요" 말하지 않는 정중함으로부터. 그래, 사실 이것은 부탁이라기 보다는 기대라 해야 할 것이다. 공들인 책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들이 품을 수 있는 정당한 기대.

 

수많은 책 중 몇 권의 책을 골라내야 하는 입장에서 나는 늘 '무언의 기대'를 배반하고 있다는 의식을 한다. 누군가의 기대에 화답하지 못하는 일이 쌓이면 스스로 당당하기 힘들다. 누군가의 미움을 사고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상상이 틀리지 않음은 때로 현실에서 증명된다. 주문부수가 적다거나, 원하는 자리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항의가 드물지 않다.

 

처음엔 나의 억울함을 맞은 편에서 함께 쏟아냈다. 하지만 반복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굳이 힘빼지 않게 되었다. 표정은 건조하고 냉랭하게, 말은 짧고 형식적으로, 시선은 마주치지 않고 책으로만 향하기. 조금 수용하기 힘든 부탁이 있을라치면 먼저 날이 섰다. 애초에 상대가 기대감을 발산할 수 없도록 딱딱한 껍질로 나를 덮었다. 늘 시간에 쫓기며 하는 업무라 이런 태도가 효율적이기도 했다.

 

겉이 그렇다고 속도 딱딱했던 것은 아니다. 하루치 미팅을 마치고 나면 늘 진이 빠지고, 냉랭을 넘어 무례했던 날엔 스스로에게 실망해야 했다. 내가 놓인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뿐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자주 다독여야 했다. 책을 읽을 때도 그런 구절은 밑줄을 긋게 된다.

 

"MD는 게이트 키퍼로서 갑의 역할이 있다. MD는 소수고 출판사는 다수다. 누군가는 걸러내야 하고, 그게 MD의 일이다. 기준과 상황에 따라 걸러내는데 걸러냄을 당하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기분이 안 좋고 억하 심정과 억울함이 생길 것이다. 역으로 보면, MD는 출판사의 똑같은 요구나 요청을 수십 번 받는다. 업무 플로우를 간단하게 만들어놔야 시간 덜 쏟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니 늘 정해진 답변을 하고, 노출이 안됐다는 출판사 하소연에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
- 은유 인터뷰집, 『출판하는 마음』 (269쪽)

 

"하루 열여덟 시간씩 버스를 몰다 보면 내 안에 다양한 나를 마주하게 된다. 천당과 지옥을 수시로 넘나든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기사였다가 한순간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기사가 된다.", "원래 나쁜 기사는 없고 현재 그 기사의 여건과 상태가 있을 뿐이다. 누구나 잘하고 싶지 못하고 싶은 기사는 없다."
- 허혁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15쪽, 44쪽)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 나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마음이 수습된다. 그런데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위로도 때로는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사실 나는 '거절의 고충'을 벗어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담당업무가 바뀌면서다. 내가 지금 응대하는 거래처는 책을 대량으로 구매해가는 큰 손들이다. 구매가 성사되게 하기 위해 부드럽게 응대해야 한다. 정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하지만, 약간 과한 요구는 최대한 들어준다. 거절이 고민이 아니고 성사여부가 고민이다. 나는 딱딱한 껍질을 훌러덩 벗었다. 상황이 바뀌니 정말 나도 바뀌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 날의 나는 확실히 상황 탓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싶지만, 불행히도 어떤 찜찜함이 가로막고 있다. 부드러워진 나를 보며 안도하고 싶은데 오히려 또 다른 형태의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하긴 했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노력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 안의 내가 인식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왜 ‘상황과 여건’에 책임을 시원하게 돌리지 못하겠는가.

 

상황과 여건이 개인에게 부과하는 압력을 인식하는 태도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일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개인의 책임’을 다시 강조하는 일은 늘 조심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태도의  올바름에 기대어 자기 몫의 책임으로부터 눈 돌리는 일은 진일보 했던 걸음을 다시 반걸음 되돌리는 일이다.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나는 ‘상황과 여건’을 온전히 탓하지 못하고 다시 ‘나의 탓’을 돌아본다. 상황에 휘둘리던 내 모습도 진짜 내 모습이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참 인격이 얄팍한 인간이었구나. 비로소 마음 속 찜찜함이 사라졌다.

 

"어떤 사람을 가장 잘 알려면 함께 고생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힘든 순간에 나오는 성격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둥, 하지만 그런 궁지에 몰린 상황은 일시적인 예외일 뿐이라는 반대의 의견에 더 동의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냉정하게 판단할 여력이 있을 때, 그때의 모습을 그 사람의 진실에 가깝게 봐주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역사 속에서, 힘들어서 아무거나 붙잡고 싶을 때의 감정과 모습과 행위들도 진짜이며, 그걸 벗어난 상태에서 '지금의 나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라고 약간은 후회하는 모습도 진짜라고 생각한다. 모든 감정은 진짜다.”
- 안은별 인터뷰집, 『IMF 키즈의 생애』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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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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