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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보다 못한 사회

여기나 거기나 비슷하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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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도 부당한 신고식을 못 견딘 신병의 마음 같지 않을까. 뚜렷한 물증이 없는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은 번번이 의심받고, 증언의 법적 효력도 장담할 수 없다. (2018.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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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대에서 첫날이었다. 자대는 부대원이 스무 명 남짓한 작은 파견대였고, 부대장은 자신과 부대원을 가족처럼 편하게 대하라고 했다. 내무반과 각종 시설은 상상했던 것과 달리 얼핏 기숙사 같기도 했다. 후반기 교육대를 먼저 수료한 동기 녀석을 다시 만나 반갑긴 했지만, 동기 녀석의 표정은 나처럼 잔뜩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동기 녀석은 아직 가족이 되지 못한 것 같았고, 나는 자대에서의 25개월이 아득하기만 했다.

 

낯선 환경이 통 적응되지 않았다. 겨우 잠이 들려는 찰나 선임 두 명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내무반을 빠져나와 수송 창고로 가는 동안 선임들은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그 침묵이 두려웠다. 그제야 신고식이 있을 거라는 동기 녀석의 귀띔이 생각났다. 수송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선임들은 다짜고짜 원산폭격을 시키더니 내 동작이 굼뜨다며 발길질을 했다. 통증이 척추를 타고 발끝까지 전해졌다. 선임들은 내가 경미한 요추 추간판 탈출증(허리디스크)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내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가슴팍에 주먹질을 했다. 선임들 등 뒤로는 수송 창고 한가운데 벽면의 “때리면 죽는다”는 표어가 선명했고, 나는 그렇게 그들의 가족이 됐다.

 

몇 개월 뒤 자대로 신병이 전입해왔다. 신병이 곯아떨어지길 기다리는 선임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았다. 나는 짬밥이 한참 모자라서 신병의 신고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신병에게 신고식이 있을 거라고 귀띔해줬는데, 신병은 신고식이 생각보다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전 점호 시간에 신병은 자기 자리에 없었고, 비번인 부대원들은 신병을 찾아 산속을 헤집고 다녔다. 부대장은 진짜 가족을 잃어버린 가장처럼 허둥댔다. 다행히 신병의 신변은 이튿날 확보했지만, 신병은 자대로 복귀하지 않았다. 다른 파견대로 전출됐고, 신병의 신고식을 맡았던 선임들은 예정됐던 휴가가 취소됐다.

 

신병의 신고식을 맡았던 선임들과 부대원들은 우리의 가족이 되길 거부했던 신병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신병의 신고식은 우리들이 겪은 신고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도 신고식도 견디지 못한 신병이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신병은 그저 가-족같은 결속을 흩뜨린 불순분자였고, 사회 부적응자였다. 신병은 틀림없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어딜 가든 관심사병 신세를 면치 못할 거라고 했다. 애초에 신고식이 잘못됐다는 걸 모두 알면서 신병을 탓하기 바빴다. 남은 군생활을 생각한다면 자책은 사치스러운 감상이었고, 그때는 그게 폭력인 줄 몰랐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산속을 헤맸을 신병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도 부당한 신고식을 못 견딘 신병의 마음 같지 않을까. 뚜렷한 물증이 없는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은 번번이 의심받고, 증언의 법적 효력도 장담할 수 없다. 성폭력 가해자와 주변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자의 평소 행실이나 문란한 사생활 따위를 문제 삼으면, 성폭력 피해자는 졸지에 ‘꽃뱀’이 되기도 한다. 성폭력 가해자가 법의 심판대를 용케 ‘무혐의’로 통과하면, 성폭력 피해자는 ‘무고죄’라는 부메랑을 맞기도 한다.

 

가령 출판계 종사자였던 한 성폭력 피해자는 가해 지목인이 무혐의를 받으면서 온갖 악플에 시달리고 있다. 또 한 대기업 법무감사팀에 근무하던 여성은 직속상사의 일상적인 성희롱을 회사 측에 알렸지만, “남녀 간 감정싸움을 한다”며 업무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그나마 그 여성은 직속상사를 상대로 2년여의 법정 다툼 끝에 가까스로 승소했지만, 소송비용까지 보상받진 못했다. 말하자면 상처뿐인 영광인 셈이고, 그 여성이 그동안 겪었을 정신적 고통은 보상받을 길이 없다. 그나마 앞서 얘기한 두 여성은 소송비용을 감당할 형편이 됐고, 소송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성폭력 피해자는 아무리 원통해도 부당한 신고식을 못 견딘 신병처럼 어두운 산속을 헤매는 수밖에 없다.

 

이처럼 대부분의 성폭력이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 속에서 벌어지는 점을 감안하면, 어쩌면 성폭력은 군대 내 폭력과 본질적으로 같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의 미투운동은 군필자들이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여자들의 미투운동을 가로채자는 얘기가 아니다. 여자들의 미투운동과 별개로 군필자들의 군인정신 같은 미투운동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는 남성이라고 해서 딱히 더 큰 혜택을 누리는 것도 아닌데, 군필자들은 대개 그 오해를 가장 억울해한다. 그러나 부당한 신고식 같은 폭력을 서로 대물림하면서 억울해할 수는 없다. 파렴치한 남성을 솎아낸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가-족같은 결속을 강요받는 조직 문화에서는 선량한 남성도 얼마든지 파렴치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순수한 억울함을 의심받고 싶지 않다면,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부터 거부하자. 가-족같은 결속을 함부로 강요하지 말자.

 

어느 정도 짬밥이 찼을 무렵, 파견대 간 체육대회에서 신병을 다시 만났다. 물론 신병도 더 이상 신병이 아니었다. 마침 신병의 신고식을 맡았던 선임들도 한자리에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나는 신병 때문에 목숨보다 소중한 자신들의 휴가를 빼앗긴 선임들이 신병의 멱살이라도 잡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선임들은 신병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임들은 신병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신병은 이해한다고 했다. 나는 신병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신병은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처럼 말했다.

 

“여기나 거기나 비슷하죠 뭐.”


제대한 지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왠지 사회가 군대보다 못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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