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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말만은 해야겠다

우리 모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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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미투 운동’은 재작년 ‘OO 내 성폭력’ 사태의 연장선이나 다름없는데, 그동안 우리 사회는 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걸까. (2018.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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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서지현 검사와 최영미 시인의 폭로 시점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집행유예 판결을 덮으려는 음모라나 뭐라나. 서지현 검사와 최영미 시인의 폭로를 집중적으로 다룬 JTBC 뉴스와 삼성은 한통속이고,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앞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상황 봐가면서 폭로해야 하는 걸까. 지금 당장은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마무리가 먼저니까 나중에 폭로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골치 아픈 현안이 등장할 테니까 나중에 폭로해야 하고, 그러다 선거 때가 되면 너도 나도 ‘성평등’과 ‘저출산 해법’을 목청껏 외칠 테고, 선거가 끝나면 앞에 열거한 순서를 되풀이 할 테고, 안 봐도 비디오다. 그전에 지금의 ‘미투 운동’은 재작년 ‘OO 내 성폭력’ 사태의 연장선이나 다름없는데, 그동안 우리 사회는 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걸까.

 

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성폭력 피해 여성의 평소 행실을 문제 삼는 사람들까지 있다. 가령 어떤 남성 시인은 최영미 시인이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이자 “숫제 안하무인”이라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한다”고 비난했다. 대체 그와 같은 개인의 성격이 성폭력과 무슨 상관일까. 최영미 시인이 아무리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이자 “숫제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성폭력을 감당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게다가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 여성에게서 찾으려는 대부분의 시도는 다분히 남성 중심적 발상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을 읽으며 내심 뜨끔했다. 서지현 검사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남편에게 곧바로 알렸지만, 남편은 서지현 검사에게 “고소 같은 것을 감당할 수 있겠냐”며 되물었다고 한다. 문득 내 모습이 겹쳤다. 마누라도 다종다양한 성폭력 경험을 보유하고 있고, 그 경험담을 책으로 엮자면 거의 백과사전급이다. 그런데 나는 마누라가 처음으로 성폭력 경험을 얘기했을 때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고 꺼낸 얘기가 아닌 줄 알았다. 사실 그 말은 “나는 그런 놈이 아니다”라는 반사 신경에 가까운 변명이었다. 마누라 얘기를 그저 차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마누라는 내 말에 하던 얘기를 멈추고 말았다.

 

심지어 마누라가 과거의 상처로부터 알아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건 최영미 시인의 「괴물」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황해문화> 정기구독자였고, 덕분에 <황해문화> 97호에 실린 최영미 시인의 「괴물」을 몇 달 전에 읽었다. 평소 최영미 시인의 은근한 유머를 좋아했는데, 몇몇 대목에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주변 여성을 함부로 주무르던 30년 선배 시인을 들이받고 코트자락을 휘날리는 최영미 시인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 30년 선배 시인을 겨냥한 「괴물」이라는 제목은 반어법이고, 최영미 시인이 그 괴물을 우습게 여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최영미 시인의 인터뷰를 뒤늦게 찾아보면서 내 짐작과 바람은 지나친 요구였구나 싶었다.

 

나는 그동안 마누라가 차마 하지 못한 얘기를 대신한다고 생각했다. 파렴치한 남자들을 있는 힘껏 비난하면서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성폭력 피해자이자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의 입을 막은 줄은 몰랐다. 애초에 누군가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고, 마누라 대신 ‘미투 운동’을 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마누라가 과거의 상처를 자책하든 말든, 그건 내가 바로잡을 일이 아니었다. 마누라 스스로 충분히 바로잡을 테고,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누라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말을 아끼는 것,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런데 이 말만은 해야겠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집행유예 판결을 덮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투 운동’이 아니다. 삼성을 둘러싼 여러 비리에 관해서는 그전에 이미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있었다. 하지만 그 폭로는 마치 성폭력 피해자의 폭로처럼 잠시 주목을 받다 조용히 묻혔다. 오히려 김용철 변호사가 “불이익을 당해서 원한을 품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나돌았다.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안녕을 위해 정당한 고발을 하고도 2차 가해를 당한 셈이다.

 

이참에 눈앞에 골치 아픈 현안들을 나중으로 미루고, 정경유착보다 더 오랜 세월 꾸준히 반복돼왔던 성폭력을 샅샅이 파헤쳐 보면 어떨까. 곳곳에서 폭로가 이어지면서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못 견디는 개인이 쏟아지지 않을까. 그럼 그 개인은 저마다 자신을 억압하는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질 테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혁명’ 아닐까.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더 이상 없지 않을까. 다시 말해 성폭력은 여성 문제가 아니다. 위계질서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이고, 우리 모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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