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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똑똑하고 이롭다, 이런 삼합 영화

<피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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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의 엄마와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여전히 내가 얌전하게 사는지를 지켜보는 엄마와 ‘여성, 인간,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8. 0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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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피의 연대기>의 한 장면

 

중2때 체육 시간이었다. 책상보다 운동장 흰색 달리기 선을 사랑했던, 달리기를 잘했던 나에겐 표정이 밝아지는 수업이었다. 그날 그 즐거운 수업은 끝내 마칠 수 없었다. 문득 팬티가 축축하다는 느낌에 울상이 된 채 홀로 교실로 돌아왔다. 초경이었다.
 
가까스로 사태를 해결하고, 어기적거리는 둔중한 발걸음으로 귀가해서 초경을 고백한 뒤 엄마에게 받은 건 거즈 생리대 네 개. 하루에 한 개면 될 것이라고, 미리 준비한 것을 선물처럼 꺼내놓으셨다. 잊을 수 없는 첫 생리대. 잊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픔 때문이었다. 생리통 때문이 아니라 거즈 생리대가 허벅지 살을 쓸며 생기는 상처는 생리를 공포로 만들었다. 아프다는 말을 비명 지르듯 하지 못한 까닭은, 생리는 비밀로 다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얌전한 여자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아니라는 엄마의 강박관념이 그대로 주입되었다. 편리한 시판 생리대를 왜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까. 엄마의 보수적인 생각엔, 조신한 여성이 생리대를 구입한다거나 휴대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에 속했다.
 
아흔의 엄마와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피의 연대기>. 여전히 내가 얌전하게 사는지를 지켜보는 엄마와 ‘여성, 인간,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피의 연대기>는 생리 다큐다. ‘생리’라는 소재가 다큐로 만들어질 수 있을 정도의 콘텐츠가 될까. 직업적인 호기심이 일었다. 다큐 영화를 극 영화보다 훨씬 흥미롭게 보는 데는 ‘편집력’에 대한 직업 감각이 앞서서다.
 
다큐는 전달하려는 메시지, 이미지를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설득력이 확연히 달라진다. 생리 다큐 <피의 연대기>는 발랄하고 자유분방한 밝은 터치의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animated documentary)다. 음악마저 사랑스러운. 그러나 예쁘기만 할까. 여성에게 생리대 보급이라는 법적인, 정치적인 전투력을 함양하는 메시지는 강력하게, 똑똑하게 전달된다. 전 세계 역사와 종교, 세대를 가로질러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직접 출연하여 생리와 여성의 몸,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문화적 고찰까지 털어놓는 김보람 감독의 재기발랄한 편집력은 김승희 애니메이션 작가의 자유롭고 발랄한 그림에 힘입어 가히 멋진 다큐의 완성도를 이루어냈다. 고발하는 대상이 있어 싸우려는 영화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이로운, 자성의 다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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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피의 연대기>의 한 장면
 


영화 포스터엔 온갖 색감의 생리대가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생리컵 디자인은 ‘비밀스럽고 고통스러운’ 생리 현상을 ‘밝고 자연스러운’ 일로 만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생리컵은 미국의 배우이자 가수인 레오나 차머스(Leona Chalmers)가 무대의 생리대 불편을 해결하려고 전 재산을 투자해서 1930년대 발명한 것. 제2차세계대전 발발로 생리컵 원료인 루버라텍스는 탱크 타이어에 총동원되어 공장은 강제 폐업되었지만 1950년에 어마어마한 마케팅 비용을 들여서 생리컵 시장 진출에 모든 걸 바쳤다. 하지만 당시 여성들은 ‘질에 들어간 물건을 재사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로소 이제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여성의 생리컵 사용 후기가 공유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 
 
<피의 연대기> 장면 중에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인터뷰가 있다. “왜 여성의 생리용품에 특소세를 부과하는가”라는 질문에 명답을 한다. “그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두 남성이기 때문이다.” 아하, 역시 그렇다.
 
2016년 미국 뉴욕의 공립학교, 노숙인 보호소 화장실 생리대 무상 보급 법제화와 2017년 한국의 여성 청소년에게 생리대 등 보건위생에 필수적인 물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문제 제기와 토론이 언제나 먼저였던 것.
 
여성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선택할 수도 없는 생리를 소득 계층을 뛰어넘어 자연스럽게 해결하려면, 목소리가 모이고 행동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걸 <피의 연대기> 다큐 한 편은 감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영문도 모른 채 세상에 태어나 나이를 먹어가고 의지와 상관없이 피 흘리는 존재로 자라난다. 한 달에 약 5일, 큰 숟가락 세 개 분량, 1년으로 치면 300밀리리터, 10년에 1.5 리터 생수 두 병 채우고 평생을 모두 합치면 10리터에 달하는 피를 흘리는” 여성이 “더 잘 피 흘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영화.
 
예쁘고 똑똑하고 누구에게나 이로운 이 삼합 영화에 함박웃음과 물개 박수 세 번,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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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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