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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뜨 갱스부르, 자신의 의지로 몸을 던지다

샤를로뜨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 『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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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t>는 단순한 5집이 아닌,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삶이 담긴 ‘첫 번째’ 작품이다. (2018. 0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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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시크의 아이콘 샤를로뜨 갱스부르는 프랑스 음악계 거장 세르주 갱스부르와 그의 뮤즈이자 자유분방한 여성상을 제시한 배우 제인 버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엄마처럼 살짝 내린 앞머리에 무심하게 내려앉은 긴 머리칼과 길쭉한 몸매는 그에게 청초한 이미지를 부여했고, 모델로 시작한 연예계 커리어는 곧 영화, 음악으로 확장되었다. 현재 가수를 겸하고 있지만, 본업은 배우이며 리치 앤 포베리의 「Sara perche ti amo」가 OST로 삽입된 <귀여운 반항아>에 출연했다.

 

<Rest> 이전에도 4장의 음반을 냈지만 각 앨범의 주인공은 샤를로뜨 자신이 아니었다. 1986년 데뷔작 <Lemon Incest>(원제 <Charlotte For Ever>)는 아버지 세르주 갱스부르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발매한 홀로서기 앨범 <5 :55>와 벡(Beck)이 선두에서 지휘한 2009년 3집 <IRM>에서 샤를로뜨 갱스부르는 한 발짝 물러선 채 뮤즈로서 참여할 뿐이었다. 그의 손길이 아예 닿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색이 미미했다.

 

미발매 곡과 라이브를 담은 4집 <Stage Whisper>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그가 조금 달라졌다. 트레이드마크였던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음산한 음악에 불어로 점철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음악에 있어서 긴 공백 기간 동안 그는 알코올 중독이었던 이부자매의 죽음을 목도했고, 이는 1991년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 세르주 갱스부르의 죽음과 맞물려 트라우마를 유발해 샤를로뜨가 다시 음악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폴 매카트니가 작곡한 「Songbird in a cage」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전곡 작사를 맡은 갱스부르는 죽음을 직면한다. 음반 전반부에 포진된 괴기한 노래들은 죽음 이후의 물리적 상황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흰 천으로 덮인 창백한 피부와 부드러운 머리칼만 남은 채 움직임을 멈춘 영혼 그리고 남겨진 자의 상실감을 다룬 「Lying with you」의 미스터리한 기계음과 「Kate」 (죽은 언니의 이름)의 예측 불가능한 현악 편곡은 불가항력을 향한 모종의 성스러움까지 느껴진다. 다프트 펑크의 멤버 기 마누엘 드 오맹 크리스토(Guy-Manuel de Homem-Christo)가 참여한 여섯 번 째 트랙 「Rest」에 와서야 샤를로뜨는 먹먹하게 들리는 베이스를 따라 정제된 목소리로 떠난 자를 배웅하며 철저히 슬픔의 바다에 몸을 담근다.

 

음반은 죽음을 지나 산 자의 고뇌를 당혹스러울 정도로 경쾌하게 풀어놓는다. 비운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시 「Mad girl’s love song」의 구절을 옮긴 「Sylvia says」는 애시드 재즈와 펑크(Funk), 디스코가 버무려진 누 디스코 스타일의 편곡에 생존자로서의 삶의 방향을 갈구하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언니 케이트의 무덤에 다녀온 후의 감상을 담은 「Les Oxalis」는 아프리칸 리듬 퍼커션에 맞춰 가사를 읊는 사를로뜨의 독백에 이어, 딸과의 대화를 삽입해 죽음과 삶, 탄생으로 이어지는 운명을 역순으로 배치했다. 그야말로 인생 전체를 통괄하는 완전한 마무리다.

 

"사람들은 내 진짜 모습을 모른다. 그게 내가 괴이한 영화를 찍고, 폭력적인 음악(<Rest>)을 만든 이유다. 차분한 내 목소리에 음산한 음악을 입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고, 나는 날 드러내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다."

 

<Rest>는 언론과 아버지의 그림자가 만든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예술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의 산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가 여기저기 부유하고, 프랭크 오션과도 작업한 세바스티앙(SebastiAn)의 작법과 프로듀싱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당면한 개인의 트라우마를 치밀하게 그려냈다. 세바스티앙과 오랜 시간 앨범을 준비했다던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으로 선구(先驅-미리 달려가 봄)함으로써만 인간은 진실된 한 명의 개인이 된다고 했다. 정확히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행보다. 그는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무기력하게 떨고 있는 개인이 되길 주저하지 않고, 이미 던져진 세계에 다시 자신의 의지로 몸을 던진다. <Rest> 는 단순한 5집이 아닌,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삶이 담긴 ‘첫 번째’ 작품이다.

 


정연경(digikid8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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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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